Sehon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고집쟁이
육함은 눈을 내리깔고 전혀 후회하는 기색도, 변명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육 노태야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육함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어찌나 고집이 센지 누가 뭐라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이였다. 그는 계속 기다리다가는 이 손자 놈에게 화가 나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그래, 기다릴 필요가 없지, 그냥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나 물어보자, 그 여씨 가문에 시집가야 할 딸이 몇 명이냐? 장가가야 할 아들은? 전에 여 노태야의 장례에는 또 얼마나 썼다더냐?”
육함은 잠시 멍해졌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 노태야께서 70의 나이로 작고하셨어요. 5만 관을 썼는데…… 그것 때문에 돈을 많이 빌렸지만 아직 다 갚지 못했다고 해요. 그 집에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둘, 아들이 셋 있어요.”
육함은 여 노태야라는 네 글자를 말하며 아주 껄끄러웠다. 그는 분명 자신의 친외할아버지였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각별히 아껴주었음에도 지금은 마치 아무 상관없는 남처럼 말을 해야 했고 심지어 돌아가셨을 때 상복조차 입을 수 없었다.
“하!”
육 노태야는 잠시 침묵했다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을 들으니 여씨 가문이 완전히 몰락한 것 같구나? 장례까지 돈을 빌려서 치르고 남은 자식들의 혼사를 시집간 딸에게 맡기다니! 네 얼마 안 되는 그 황금 100냥으로 번 돈이면 네 형이 대주에서 식량을 사올 때의 운임과 인건비는 되고도 남지 않겠느냐?!
네가 먹고 입는 건 대체 어느 집에서 준 것이냐? 널 생각해 일부러 돈을 주고 기분 전환을 하게 해 주었거늘 나한테 이런 식으로 갚는단 말이냐? 이렇게 날 속여?! 네가 그리 여씨 가문만 돌보면, 네 어머니가 슬퍼하고 낙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냐?”
육함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작게 말했다.
“낳아 주신 은혜와 키워 주신 은혜를 감히 어찌 잊겠어요. 임씨 가문은 아직 제 도움이 필요 없지만 여씨 가문은 이미 쇠퇴하고 있어요. 손자도 저 하나뿐이라 지금은 가장 시급한 일부터 처리하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러 숨기려 했던 것이 아니라 괜한 말을 해서 실수할까 봐 걱정이 되었을 뿐이에요.
식량 일은 도씨 가문의 힘을 빌려 불로소득을 얻은 것이라 그 이상 욕심을 부리는 건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어찌 되었든 할아버지께서 손자가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신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벌을 달게 받을게요. 하지만 또 다시 이런 기회가 주어진대도 저는 똑같이 할 거예요.”
이 고집쟁이가 사람을 화병으로 죽게 만들 작정이로구나! 좀 돌려서 듣기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괜한 말을 해서 실수를 할까 걱정이 됐다고? 어쩐지 말이 없어도 너무 없다 했더니! 육 노태야는 크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휙 돌리며 벽 모퉁이에 있는 등롱을 바라보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성격이 너무 세서 늘 이치를 따지며 양보할 줄 몰랐고, 하나는 음울하고 나약해서 늘상 눈물만 흘려댔다. 둘 중 어느 하나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 괜한 말을 하면 실수밖에 더 하겠는가.
육함은 느긋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육 노태야를 힐끗 보고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한참 후에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육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두 가지 소식을 도씨 가문은 어디서 얻은 것이냐? 너는 또 어떻게 알았느냐?”
그의 이 말은 더 이상 여씨 가문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육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에 점점 어렴풋하고 불분명한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육함은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고르며 말을 했다.
“그때 도 대공자가 집안의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각장에 놀러 왔었어요. 임씨 가문 넷째 여동생이 우연히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도 대공자가 단번에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어요. 저도 각장에서 사방으로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들을 만나 본의 아니게 그런 말을 듣게 됐어요.”
“임씨 가문 삼남가의 딸 임근용 말이냐? 네 어머니가 아운이를 위해 연 난로회에서 주제넘게 나섰던 그 아이?”
육 노태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수염을 훑었다.
“초여름에 평주의 여러 가문에서 경쟁적으로 염지를 사들일 때 도순흠이 제일 처음 자기 여동생을 위해 염지를 사기 시작하지 않았느냐. 그때 임씨 가문 삼남가가 가장 많은 이득을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도순흠이 청주에서도 염지를 많이 사들이긴 했지만 모두 청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갑자기 몸을 똑바로 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말해 보거라!”
육함은 육 노태야가 화를 내거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아주 흥미 있어하자 조심스럽고 진지하지만 재미있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육 노태야는 다 듣고 나서 아무 말 없이 숯화로에 올려진 구리 주전자를 가리켰다. 육함은 얼른 일어나 구리 주전자를 손수건으로 싸서 들고 그의 앞에 있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잔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육 노태야는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가 보거라.”
이렇게 끝인 건가? 육함은 약간 의아해하며 작별 인사 올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육 노태야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낳아 준 것도, 길러 준 것도 다 큰 은혜를 입은 것이지. 지금까지는 네가 잘 처신했구나. 네 상황이 쉽지 않은 건 나도 안다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게 네 운명이란다. 지나간 일들을 자꾸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너한테 좋을 것이 없어. 네 숙모도 힘든 점이 많겠지만 그래도 여섯째가 있지 않느냐. 네 어미는 오히려 곁에 다른 사람이 없어. 네가 좀 더 따르고 이해해 주려무나.”
육함이 몸을 돌려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육 노태야는 그에게 손을 내젓고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도씨 가문에서 주도해 시작된 것이었다. 세 가지 일은 아직 어떤 이윤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겨울이 되면 결과가 분명해질 것이다.
* * *
육함이 집현각 밖으로 나서 대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는 작은 길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야, 괜찮니? 할아버지한테 혼났어?”
이어서 한 여자가 대나무 숲에서 빠른 걸음으로 나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으며 낮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불쌍한 우리 둘째 아들…….”
여씨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으로 손수건을 쥔 채 애간장이 끊어질 것처럼 울고 있었다.
육함은 살짝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모님…… 울지 마세요. 안 혼났어요. 밤바람이 차니 감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숙모?”
여씨는 얼른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놀란 토끼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본 사람 없지? 널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네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 여기서 한 시진이나 기다렸는데…….”
육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돌아가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여씨의 눈물이 잠시 그쳤다 또 흘러내렸다.
“정말로 너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네 외숙부 댁처럼 사촌 자매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겠니? 네 외숙부가 그러더라. 네 큰 사촌 오라버니 집에서 갓 낳은 아이를 익사시키려 했었다고. 어차피 제대로 키울 능력도 안 되니…….”
육함이 점점 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이번 겨울까지만요…….”
“겨울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니?”
여씨가 눈을 들어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숲에서 가볍게 스치는 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육함은 여씨를 내버려두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기 누구요?”
육함은 가능한 한 멀리까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붉은 등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대나무 가지를 비춰 얼룩덜룩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만 보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대나무 잎과 가지에 밤바람이 불어오자 솨아솨아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고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씨는 조심스럽게 뒤에서 살금살금 걸어왔다. 그녀는 그의 뒤에 숨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뭐가 있었니?”
육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숙모 얼른 가 보세요.”
“내가…….”
여씨는 또 그를 잡아당기며 몇 마디 하려 했지만 육함의 찌푸린 미간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하려던 말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볼게. 항상 건강 조심하고.”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갑자기 더 중요한 일이 생각나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임씨 가문 차남가의 임근주는 어떤 것 같니?”
육함이 재빨리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명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여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임 이부인이 네…….”
그녀는 원래 임옥진을 육함의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그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아 이를 악물고 말을 바꿨다.
“큰형님이랑 자주 왕래하는 것 같더라. 임씨 가문 쌍둥이 자매도 늘 아운이랑 어울리는 것 같고.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런 뜻인 것 같으니 주의하려무나.”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육함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육함은 눈만 내리깔고 있을 뿐이라 그녀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여씨가 초조해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그건 평생의 일이야. 잘 생각해야 봐야 해! 임 이부인은 정말 간사한 사람이야, 듣자 하니 그 모녀가 계략을 엄청 잘 꾸민다고 하더라…….”
그러자 육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숙모님은 얼른 돌아가세요. 그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하실 거고 조부모님도 저한테 안 좋게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여씨는 육함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대나무 숲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아이가 자신에게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절로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 아이가 장남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자 자신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듯 울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여씨는 7, 8년 동안이나 아이를 그리워했고, 언제나 그를 걱정했다. 그녀는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힘겹게 기다렸지만, 돌아왔을 때 아이는 이미 자신의 귀여운 둘째 아들이 아니었다.
아이가 벌써 다 커버린 것이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손이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이것저것을 먹겠다고 애교를 부리고 귀여운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나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이는 점잖고 예의 바르게 그녀를 숙모라고 부르고 임옥진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친동생과는 한 시간도 채 함께 앉아 있지 못했지만 육운과는 함께 앉아 책을 보고 글씨를 쓰고 악기를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