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화풀이
산이라 주위가 아주 조용했다. 절에서 사람들에게 배분해 준 건물은 뒷산과 가까워서 아주 청아하고 평화로웠다. 유일하게 불편한 점은 이번에 그들 일행이 너무 많고 마침 참배객이 많은 성수기라 절에서 그들에게만 많은 공간을 줄 수 없어 임씨 가문 가족들이 모두 한 건물에 묵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임근용은 방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도씨을 깨우고 창가에 앉아 도씨가 몸단장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주인들이 모두 낮잠에서 깨어나자 시녀들은 물과 대야를 들고 온 정원 사이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누군가가 임근지가 묵고 있는 옆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섯째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여지가 임근용에게 속삭였다.
“석류네요. 다섯째 아가씨도 성격이 정말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 화가 난 게 있으면 집에 와서 내든지 왜 굳이 사람들 다 보라고 밖에서 그런대요? 아까 밥 먹을 때도 보세요. 말을 어찌나 못 되게 하는지. 아가씨는 왜 아무 해명도 안 하고 가만히 계셨어요?”
임근용이 말했다.
“그 비녀들은 청주에서 산 거고 또 같은 가게에서 산 거야. 걔 말이 다 맞는데 내가 뭘 해명해? 내가 직접 고른 거라며 너스레라도 떨라고?”
세상에는 명확하게 해명하기 힘들고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지는 일도 있는 법이다. 더구나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누가 그녀에게 그런 해명을 요구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때 갑자기 라씨가 최 마마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늦가을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주 더운 것처럼 그녀는 온 얼굴이 새빨개져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시녀가 인사하는 것도 무시하며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라씨는 여러 번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 재촉했다.
시녀가 물을 가지고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온몸이 흠뻑 젖은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빈 통을 들고 나왔다. 곧이어 쌍둥이가 묵고 있는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옷을 갈아입은 임근주가 빠른 걸음으로 나와 라씨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이 살짝 열리는 것이 보였는데 마치 누군가가 안을 엿보는 것 같았다.
임근용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도씨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방금 그건 무슨 소리야?”
임근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어머니께서 이제야 돌아오셔서 아직 옷을 못 갈아입으신 것 같아요. 방금 시녀가 물을 배달하다가 뭔가 실수를 했나 봐요.”
임근용은 마음이 아주 무거웠다. 라씨는 거절당해 틀림 없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난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씨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라씨를 저렇게까지 곤란하게 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라씨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사람은 아마 임옥진일 것이다. 무엇보다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임옥진이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해지자 모든 분노를 라씨에게 쏟아낸 것 같았다. 임근용은 순간 라씨와 임옥진 사이에 불쾌한 일이 생겨 또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 봐 한없이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씨는 이런 임근용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형님이 욕했니?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는 않든?”
그러더니 구경을 할 생각으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맞은편 창문에서 누군가 엿보고 있어요. 그쪽에서 우리가 엿보는 걸 보면 좋지 않을 거예요.”
임근용은 한 손으로 도씨를 붙잡고 무심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욕하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시녀가 온몸이 흠뻑 젖어서 나왔어요. 작은어머니께서 아주 조급하고 더워 보이더라고요.”
공 마마가 웃었다.
“온 집안 식구가 한 건물에 있으니 이게 별로네요. 뭘 하든지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모두가 다 알게 되잖아요.”
도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재밌어,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온 기회인지 모르겠네. 어쨌든 우리 가족들은 남들이 뭘 보든, 듣든 걱정할 게 없어.”
주종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라씨가 했던 일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임옥진이 라씨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았다. 라씨는 오늘 제대로 비위를 맞추지 못해 순식간에 개한테 물리는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춘아가 문을 여니 주씨가 허 마마를 데리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정리 다 됐어?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 이맘때가 제일 조용하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적을 거라고 하더라고. 지금 갈까?”
도씨가 웃으며 말했다.
“저야 벌써 다 준비하고 두 형님들 기다리고 있었죠.”
그러더니 라씨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째 형님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요?”
“방금 둘째 동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난 벌써 준비가 끝난 줄 알았지. 뭐 하길래 아직도 안 보여?”
주씨가 허 마마를 불렀다.
“둘째 동서랑 여섯째, 일곱째 아가씨한테 가서 빨리 준비하라고 좀 재촉해 봐.”
허 마마가 라씨 방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임근주가 창문 쪽을 향해 말했다.
“금방 끝나요. 큰어머니와 셋째 숙모께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주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도씨에게 말했다.
“우리 근지도 몸이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아. 방금 생강탕을 끓이라고 시키고 아이한테는 누워서 땀을 좀 빼라고 했어.”
그러더니 또 임근용에게 말했다.
“네 다섯째 동생이 요즘 성격이 좀 이상해졌어. 무슨 잘못을 하거나 말실수를 하더라도 자매로서 정을 생각해서 네가 많이 이해해 줘.”
이 말은 아까 임근지가 밥상에서 한 짓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큰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많이 양보할게요.”
주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씨와 함께 잡담을 하며 목소리를 점점 낮췄다.
“동서, 그 혼담은 성사될 것 같아? 동서는 오씨 집안과 가까우니까 분명 잘 알 거 아니야.”
도씨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체했다.
“제가 그걸 어찌 알겠어요? 가문이나 재능, 용모 모두 엇비슷하니 아마 성사되지 않을까요? 좀 아까 돌아올 때 보니 둘째 형님이랑 오 대부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고요. 아마 지금쯤이면 이야기가 끝났을걸요? 아니면 둘째 형님한테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
주씨는 미소 지으며 직접 물어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 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손바닥만 한 건물에서 라씨가 들어오자마자 화를 낸 걸 나도 알고 있는데 네가 아직까지 모를 리가 있느냐? 분명 어떻게 됐는지 결론을 알고 싶은데 스스로 물어보기 싫어서 나를 앞세워 물어보게 만들려는 속셈이겠지. 대신 물어봐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어디 애 좀 태워 보셔!’
도씨 또한 웃으며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주씨가 임근지를 거절한 임옥진이 미워 그녀가 비웃음을 당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후 맞은편 방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라씨가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임근주를 데리고 나왔다. 주씨가 도씨를 바라 보니 도씨 역시 주씨를 쳐다보았다. 전혀 스스로 입을 열 생각이 없던 주씨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정리 다 됐으면 이만 가자고.”
임근용은 살며시 임근주와 임근옥의 표정을 살폈다. 임근옥은 전혀 이상한 기색 없이 즐겁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고 임근주는 다소 엄숙한 표정이긴 했으나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임근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가는 길에 다른 갈림길에서 걸어오고 있던 양씨와 그녀의 맏며느리인 오 대소야의 부인, 그리고 오 이부인과 오릉을 우연히 마주쳐 서로 인사를 나눴다. 도씨가 자세히 보니 라씨가 웃고 있긴 했지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양씨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양씨도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지만 라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고 두 사람은 직접적인 대화도 하지 않았다.
도씨는 자신이 이 일에 끼어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양씨가 아무리 온화하고 남에게 미움을 사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을 적당히 얼버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라씨와 임옥진이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고 잘난 체를 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혼사를 거절당했으니 몹시 낯부끄러울 것이다. 가문끼리의 친분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해도 뒤로는 절대 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양씨는 이런 일로 가문끼리의 친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또 이 일 자체를 그냥 빨리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에 적극적으로 주씨와 도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에 임옥진이 침울한 얼굴로 육운을 데리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임옥진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육운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그녀의 소매를 꽉 잡고 낮은 목소리로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방 마마와 두 시녀는 예법에 맞게 눈을 내리깔고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들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임근주가 먼저 육운을 불렀다.
육운이 고개를 돌리며 깜짝 놀랐다.
“어, 언니들 언제 왔어요? 어머니랑 얘기하느라 발자국 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그리하여 사람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모두들 태연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임근용은 육운이 전에는 바르지 않았던 분을 한 겹 발랐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때 임근용은 정말로 육운에게 탄복했다. 그녀는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범하게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양씨가 오 이부인에게 눈짓하자 오 이부인이 임옥진에게 먼저 가서 인사했다.
“육 이부인은 왜 안 보이시나요?”
임옥진은 눈빛에서 분노를 거두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별로 내키지 않는 듯 굳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가 아프다며 우리 먼저 가라고 하더라고요. 동서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향을 피우러 간다고 했어요.”
그녀는 옆의 나무에 시선을 고정하며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주씨는 이 광경을 보고 결과를 짐작했다. 주씨는 임옥진의 표정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오히려 오씨 가문 사람들이 더 점잖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렇게 뻣뻣하게 굴며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큰올케로서 임옥진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늦가을이라 그런지 감기에 걸리기도 쉬운 것 같아요. 우리 근지도 감기에 걸려서 방금 생강탕을 끓이라고 했어요. 이쪽으로도 한 그릇 가져오라 했는데 아가씨도 한 그릇 드실래요?”
“아니에요, 큰 올케, 말은 고맙지만 전 괜찮아요.”
임옥진이 억지웃음을 보이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양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씨를 노려보았다.
도씨는 임옥진이 이유도 없이 자기를 노려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이 뭔지 똑바로 파악을 해야지, 네 딸이 퇴짜를 맞은 걸 왜 내 탓을 하는 게야? 내가 너랑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오히려 날 노려본단 말이냐?’
도씨도 전혀 피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임옥진을 노려보았다.
임옥진은 도씨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노려보자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졌다. 임근용은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사람의 눈빛을 차단했다.
라씨는 한쪽에서 냉정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다 여유롭게 손수건을 들어 가볍게 입가를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