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계원
“아가…….”
도씨는 벌겋게 부어오른 눈으로 문 앞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임근용을 보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 어미가 쓸모가 없구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그래도 이 혼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임근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가 도씨를 부축했다.
“어머니,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기 앉으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도씨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
“아가, 서두르지 마. 곧 네 외삼촌한테 서신이 도착할 거야.”
도순흠이라고 결코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임근용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애태우실 필요 없어요. 이 혼사는, 그냥 이렇게 하는 걸로 해요.”
“…….”
도씨와 임근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말을 잃었다.
임근용은 표정과 말투가 차분해 보이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어머니, 저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요. 신지도 아직 어리고요. 전 어머니가 정말로 걱정돼요. 그래서 너무 일찍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무리인 줄은 알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어머니께서 제 혼수를 준비해 두셨잖아요? 그걸 제가 관리할 수 있게 저한테 맡겨 주세요.”
여태껏 혼사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동의한다고 하더니, 조건을 제시하고, 혼사 날짜를 말하고, 혼수를 자기가 관리하게 해달라고 하는 등 임근용의 말은 비약이 너무 심했다.
도씨와 임근음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계 마마는 무슨 상황인지 잘 몰랐지만 넷째 아가씨가 승낙했다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포착했다. 계 마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가씨, 드디어 생각을 바꾸셨군요.”
임근용은 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생각을 바꾸었다니, 그녀를 바로 곁에서 모시는 계 마마와 같은 측근조차 자신이 소란을 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살면서 어떤 종류의 고통과 슬픔은 오로지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씨보다 먼저 정신이 돌아온 임근음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볼래?”
임근용은 계 마마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너희들은 모두 나가라.”
방 안에 세 모녀만 남자 임근용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찌르는데도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전 집에 2년 정도 더 남아 있고 싶어요. 신지가 좀 더 자라야 제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이건 임 노태야에게 제시하는 조건이었다. 시기를 좀 늦추는 것으로 쌍방이 한 발씩 물러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도씨가 또 눈을 붉혔다.
“아가, 너 후회하지 않겠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임근용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쪽 길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 기회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기회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생은 아주 길었다. 그녀가 죽은 그 해에도 그녀는 겨우 스무 살이 아니었던가?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슬픔과 절망, 원한과 분노를 모두 맛보았지만 쾌락만은 아직 맛보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쓰든 그 맛을 한 번 봐야 이번 생을 다시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혼수를 네가 관리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임근음은 임근용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임근용이 맑은 눈을 빛내며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난 신지한테 가업을 하나 만들어 줄 거야!”
그녀는 비적이 들이닥칠 그 해에 도씨와 임신지, 도씨 가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서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바람은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다.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비바람은 없다.
* * *
초겨울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 아래에 있는 침상을 비췄다. 침상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온몸에 가득 내리쬐는 햇빛을 받고 있으니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임근용은 비록 도씨에게 이 혼사에 동의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병 핑계를 대며 아무도 보지 않고 어떤 일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짜로 얻은 자유인데 어찌 누리지 않을 수 있으랴?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애써 억누른 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육 대부인과 사촌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지금 부인 댁에 있어요. 아가씨를 보러 왔다고 하는데 공 마마가 저한테 가서 아가씨께서 만나실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임근용은 눈이 번쩍 뜨였다. 계원이, 계원이를 왜 잊고 있었단 말인가. 기왕 육씨 가문에 시집을 가야 한다면 계원을 빠트려서야 되겠는가?
계 마마가 살며시 휘장을 걷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임근용이 눈을 떴다.
“밖에서 얘기한 사람 누구야? 계원이지?”
“예.”
계 마마가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계원이 공 마마에게 보내진 이후로 두 모녀는 마음이 불편했다. 계원은 임근용을 만날 때마다 애써 피했고 평소에는 감히 임근용 앞에서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 임근용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임근용이 조용히 말했다.
“계원이를 못 본 지도 한참 됐는데 들어와서 잠깐 얘기 좀 하다 가라고 해.”
계 마마는 그녀의 관심에 깜짝 놀라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계원아, 계원아, 어서 들어와서 아가씨께 인사드려라.”
계원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들어와 조심스러운 눈길로 임근용을 힐끗 보더니 법도에 맞게 임근용에게 인사를 올렸다.
“노비가 아가씨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일어나.”
임근용은 몸을 곧게 펴고 조용히 계원을 훑어보았다. 계원은 지금 한창 키가 클 나이였다. 공 마마한테서 구박을 받지는 않았는지 자라야 할 곳은 모두 제대로 자라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전에 그녀의 곁에 있었을 때보다 못했지만, 얼굴 살은 조금도 빠지지 않았고 피부도 타지 않아 전처럼 희고 윤기가 흘렀다. 정중하게 법도를 지키는 모습을 보니 공 마마에게 정말 제대로 배운 것 같았다.
계원은 임근용의 시선에 살짝 당황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몰래 계 마마에게 눈짓하며 도움을 청했다.
계 마마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임근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 오랜만이네, 우리 얘기 좀 해.”
예전과 처지가 달라진 계원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앉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사양하자 임근용이 짜증을 냈다.
“전에는 네가 이렇게 법도를 지키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다른 데 간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이렇게 이 집 사람들과 물건에 낯을 가려?”
이 말은 들은 계 마마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의자를 갖다 주고 말했다.
“아가씨가 앉으라고 하시면 앉아야지.”
계원은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지만 감히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임근용이 잠시 조용히 있다 말했다.
“공 마마한테 가서 잘 지냈어?”
계원은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얼른 눌러 참았다.
“잘 지냈어요. 공 마마가 무서운 것 같지만 마음은 여려요. 법도를 잘 지키고 시킨 일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어요. 마마는 늘 노비한테 맛있는 걸 가져다주세요. 부인께서도 아주 자비로우셔서 종종 상을 주시고요.”
물론 이 모든 것은 그 두 사람이 계원이 한 짓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임근용을 대신해 계원을 잘 가르쳐 집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일이 알려진다면 계원은 아마도 진흙탕에 굴려진 뒤 발로 지근지근 밟히게 될 것이다.
임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일 열심히 해. 나랑 네 어머니의 체면이 상하지 않게.”
“노비가 아가씨의 은혜를 어찌 잊겠어요. 며칠 전 노비의 생일 때도 아가씨께서 술을 보내 주셨잖아요.”
계원은 이 말을 하고 난 뒤 절로 마음이 동해 용기를 내 눈을 들고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또 한 번 자기 잘못을 사죄하려는 데 임근용이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소한 일은 마음에 둘 필요 없어. 돌아가서 어머니께 이렇게 전해. 내가 몸이 피곤해서 약을 먹고 잠들었다고.”
그녀가 이렇게 대화를 끝내려는 걸 보고 계원은 약간 실망했지만 감히 더 바랄 수는 없어 자신의 바람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임근용이 여지에게 지시했다.
“내가 청주에서 가져온 옷감이 있어. 분홍색 옷감, 그 색은 계원이한테 제일 잘 어울리니까 계원이한테 갖다 줘. 그걸로 상의를 하나 만들어 입으면 될 거야.”
여지가 조용히 뒷방으로 들어가 옷감을 가지고 나오자 계원은 입술을 깨물고 감사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아가씨, 상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임근용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 마마에게 지시했다.
“이제 계원이는 어머니 쪽 사람이니까 마마가 나 대신 배웅해 줘.”
임근용의 이 말로 인해 계원의 작은 바람은 순식간에 깨끗이 부서졌다. 계원은 눈을 내리깔고 맥없이 계 마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임근용은 다시 눈을 감고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원하는 건 임, 육 두 집안을 연결시킬 혼인과 임씨 가문의 며느리를 하나 더 보내 임옥진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비적이 닥치기 전까지 도씨가 상대적으로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만들고 임신지가 제대로 잘 자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각자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녀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지는 임근용의 눈알이 눈꺼풀 밑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일에 몰두했다. 갑자기 임근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지야, 내가 가르쳐준 글자들 다 잊어버린 거 아니지? 요즘 좀 바빠서 시험을 못 봤네.”
여지가 얼른 대답했다.
“안 잊어버렸어요. 매일 나뭇가지로 마당의 진흙 위에 쓰면서 복습했는걸요.”
임근용이 미소를 지었다.
“석판을 하나 만들어. 내가 붓을 줄 테니 맑은 물을 찍어서 쓰면 될 거야. 가서 책 좀 가져와. 한가할 때 몇 글자 더 가르쳐 줄게.”
이렇게 꼼짝 않고 침상에 누워 햇볕을 쬐는 것보다 뭔가 할 일이 있는 것이 나았다. 여지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얼른 책과 종이와 먹을 꺼내 펼쳐 놓더니 임근용을 불렀다.
계 마마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낮은 소리로 앵두와 두아에게 몇 마디 지시하고는 주방에 가서 말없이 임근용의 국과 약을 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