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승낙
계원이 도씨의 집으로 돌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씨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아가씨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약을 먹고 잠에 드셨습니다.”
도씨는 벌겋게 부은 눈을 억지로 뜨고 임옥진을 향해 힘없이 웃었다.
“아가씨, 이번에는 헛걸음을 하신 것 같네요.”
임옥진의 눈에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친고모와 조카 사이인데 거리낄 게 뭐가 있겠어요? 근용이를 보러 온 건데 못 보고 가면 섭섭하죠. 온 사람 성의도 있는데 휘장 밖에서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도씨는 기분이 나빴다. 이게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 화해하고 싶어서 온 사람의 태도인가? 임근용이 왜 병이 났는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이러는 건 일부러 가서 더 괴롭히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설마 임근용이 억울함을 참으며 자기에게 웃는 낯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건가? 도씨의 표정이 굳었다.
한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씨가 얼른 끼어들었다.
“됐어요, 한 가족이고 두 집이 멀지도 않은데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잖아요? 마음만 전달됐으면 된 거죠. 아가씨, 오랜만에 왔고 마침 어머님 쪽도 시간이 난다 하시니 날이 밝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이 일에 대해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셋째 동서, 아까 근용이를 몇 년 더 집에 머물게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모처럼 아가씨도 여기 있으니까 같이 가서 어머님하고 상의해 봐. 약혼 예물이라던가 이런 저런 일들이 산더미 같으니 동서도 바쁠 거 아니야.”
육운이 몰래 임옥진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임옥진이 눈을 내리깔고 잠시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가요.”
도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들 가 계세요. 전 좀 이따가 갈게요.”
그녀는 눈이 몹시 뻑뻑해서 뜨거운 물로 찜질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셋째 동서, 그럼 늦지 않게 와.”
주씨는 그녀에게 눈짓을 하며 웃음을 머금고 임옥진 모녀를 밀며 밖으로 나갔다.
공 마마는 또 한바탕 바빴다. 그녀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로 번갈아 가며 도씨의 눈을 찜질하고 분을 발라 그녀의 화장을 고쳐 주며 계원에게 물었다.
“너 아가씨 만났어? 아가씨께서 뭘 하고 계시든?”
계원은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말했다.
“아가씨께서 일부러 노비를 불러다 옆에 앉히고 노비에게 옷감을 상으로 주셨어요. 방금은 손님이 계셔서 밖에다 두고 왔어요.”
그리고 옷감을 가져와 도씨에게 보여 주려 했다.
도씨가 얼른 그녀를 저지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너에게 준 상이니 네가 갖도록 해라.”
도씨는 임근용의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듣고 기분이 많이 나아져 낮은 목소리로 공 마마에게 말했다.
“사실 육함이는 괜찮은 아이야. 육씨 가문에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문제는 아가씨야. 성격이 너무 못됐어. 연약한 우리 딸이 아가씨의 괴롭힘을 당해낼 수 있겠어?”
공 마마가 작은 소리로 대책을 제시했다.
“그럴 때 어찌해야 할지는 부인께서 아가씨한테 잘 가르쳐 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도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안락당으로 가자. 시간을 오래 끌면 또 내가 거드름을 피운다고 할 거야. 춘아야 나랑 같이 가자. 마마는 여기 남아서 근용이 혼수 책자 좀 정리해.”
공 마마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도씨가 안락당 밖에 도착하니 임옥진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지주 댁에 가서 송 부인한테 중매를 청할 생각이에요. 오늘 나오기 전에 사람을 시켜 관매한테 가 보라 했어요. 이 혼사는 반드시 잘 치러서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만들 거예요. 두 집안이 망신을 당할 수는 없잖아요…….”
이 말을 듣고 도씨의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임옥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아버지께서 약혼 선물은 첫 번째 몫으로 금병주 여덟 병, 진주와 비취, 장신구, 금 그릇, 금박 치마를 보내라고 하셨고 비단, 차병(*茶饼: 약혼 때 예물로 보내는 찻잎, 용봉병(龍鳳餠), 화장품 등) 같은 작은 것들도 빼놓지 말라 하셨어요. 두 마리의 양이 끄는 수레에 선물 상자 열 개를 실어 보낼 거예요……육소가 부인을 들일 때보다 훨씬 더 성대하게 해야지요!”
임 노부인이 말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일 뿐이야. 중요한 건 네가 성질을 죽여야 한다는 거다. 시어머니가 되면 예전과는 다를 거야. 친 고모와 조카 사이이니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남한테 비웃음 거리를 만들어주면 안 된다. 아운아, 네가 네 어머니를 잘 타일러 주려무나.”
육운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 걱정 마세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도씨는 일부러 자신이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 노부인은 도씨를 보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임옥진 옆에 붙어 앉혔다.
“너희 두 사람은 이제부터 사돈지간이야. 친척끼리 사돈을 맺게 되어 두 사람 밑에 있는 아이들도 서로 연결된 거란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성질을 죽이고 괜히 아이들까지 휘말리게 해 힘들게 만들지 말거라.”
예전의 두 앙숙은 속으로 아무리 불쾌하다 할지라도 일단 원한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시치미를 떼며 악수하고 화해하는 척한 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도씨는 이 기회를 틈타 2년 늦게 혼사를 치르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주씨의 귀띔을 들은 임 노부인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근용이가 설을 쇠고 2월이 되어야 겨우 열네 살 생일을 맞으니 좀 어린 편이긴 하지. 내 생각엔 넷째 공자와 다섯째 공자가 혼인을 한 후에 이 일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구나. 옥진아, 네가 가서 너희 노태야와 노부인께 말씀드려 보거라.”
임옥진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 * *
이날 저녁, 임옥진 모녀는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라씨는 아프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았고 쌍둥이 또한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나오지 않았다. 임 노부인은 이례적으로 그녀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주씨에게 임근용이 좋아하는 음식과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만들어 보내 주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기왕 시작한 일 끝장을 보겠다는 기세로 임옥진의 면전에서 도씨에게 초첩자에 어떤 혼수를 올릴 것인지 물었다.
도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근용이 혼수는 제가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춘절 전에는 얼추 다 준비가 될 겁니다. 지금 공 마마한테 책자를 확인하라 했으니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초첩자에는 대략적으로만 쓰고 정첩을 쓸 때 자세히 쓰겠습니다.”
육씨 가문에서는 홀대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일부러 귀하고 비싼 물건들을 준비해 임옥진을 통해 말을 전했다. 또 자신들이 잇따라 돈을 벌게 된 것이 임근용의 공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넉넉하게 돈을 풀어 전에 생각해 두었던 것보다 몇 할을 더 얹었다.
임옥진은 들은 것들을 머릿속에 기억해두며 오늘의 방문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 육 노태야 부부에게 그 경과를 이야기했다. 육 노태야는 임근용이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순종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거라 생각하고 몇 년 동안 혼인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것도 괜찮지. 앞으로 육함이는 공부에 전념하게 해라. 그럼 나중에 벼슬길에 올랐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질 게다. 구체적인 혼인 시기는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자.”
그리고 임옥진은 일부러 송씨를 찾아가 면전에서 약혼 예물과 납채를 일일이 정하며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으로 골랐다. 그녀는 어떤 실수도 없도록 꼼꼼히 신경 쓰며 자신이 이 혼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충분히 드러냈다.
임옥진은 송씨가 예예 하며 무조건 승낙하고 육소의 아내 려씨(吕氏)가 억지웃음을 짓는 걸 보고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녀의 평생에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친아들이 일찍 죽어 차남가의 장남 육소가 집안의 서열상 제일 큰 형님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육소는 육함보다 몇 살 더 많았고 벌써 자식을 낳아 아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임옥진에게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차남가에서 선두를 차지해 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송씨 고부 두 사람이 집안일을 관장한다 한들, 또 육건중과 육소 두 사람이 집안의 가업을 관장한다 한들 그들이 또 뭘 어찌하겠는가? 그들은 어린 그저 계집애가 금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남 대신 헛수고만 하고 있는 것 일뿐이었다. 노태야의 보살핌이 있는 한 기다리다 보면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건 결국 장남가가 될 것이었다!
육운은 잠시 앉아 있다가 육함에게 갔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웃었다.
“오라버니, 축하해요. 진작에 소문이 와전된 거라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셋째 외숙모가 어머니랑 혼수와 납채에 대해 상의하고 있어요. 초첩자는 거의 다 써서 정식 중매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로 교환할 거고 그러고 나서 바로 납채를 보낼 거예요.”
육함은 등불 아래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육운이 즐거워하며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만났어?”
육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육함은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더 추궁할 기색도 보이지 않고 말을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육운은 그쯤에서 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못 만났어요. 넷째 언니가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에서야 알았는데 둘째 외숙모가 너무 지나치셨어요. 여섯째와 일곱째 사촌 언니가 그 얘길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넷째 언니한테 욕을 하고 둘째 외숙모도 쫓아와서 한바탕 퍼부었대요. 누가 그런 걸 견딜 수 있겠어요? 나라도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래도 넷째 언니는 철이 들었고 마음도 너그럽잖아요. 어머니랑 제가 이렇게 찾아가서 성의를 보였고 외할머니께서도 둘째 외숙모에게 벌을 내리셨으니 언니도 더는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녁 식사 때 제비집 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입맛은 있는 것 같아요.”
육함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본 육운이 친근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걱정 마요. 셋째 외숙모께서 얼마나 자식들을 싸고도시는 분인데요. 언니를 억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너무 순조롭지 않아요? 근데 셋째 외숙모가 넷째 언니를 보내기 아쉬워하셔서 몇 년 더 데리고 있다가 보내시려나 봐요. 오라버니가 좀 기다려야겠어요.”
육함이 담담하게 웃었다.
육운은 잠시 그의 곁에 앉아 있었지만 그가 그녀와 이 일에 대해 대화할 의향이 없어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녀가 문지방을 넘자 장수가 얼른 달려왔다.
“공자, 이제 안심하셨죠? 그것 보세요. 공자 같은 인재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육함은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오늘은 좀 일찍 자자.”
그는 진심으로 임옥진이 뭔가 일을 잘못해서 임근용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