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진실
육 노태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일 어리고 나약한 손자를 응시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부모와 똑같이 쇠고집이었다.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가업이 순조로웠고 새로 시집온 손자며느리도 도리를 잘 아는 아이인 데다 육함 역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서 달리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이 애송이와 시간을 좀 허비한다 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보자꾸나!’
“하나, 둘, 셋!”
셋까지 셌지만 육선이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육 노태야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짝!
“예!”
어린 시동이 대답하며 들어오더니 육 노태야 앞으로 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소야와 이소부인께서 돌아오셔서 밖에서 문안을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물러나 육선에게 인사를 했다.
“여섯째 공자,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더니 한쪽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육선은 고집스럽게 책상을 노려보며 입에 고이는 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할아버지, 손자와 손자며느리가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문이 가볍게 열리고 육함과 임근용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육 노태야에게 인사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아용, 댁은 두루 평안하시더냐?”
육 노태야는 옆에 앉아 있는 육선은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할아버님, 집은 아무 일 없이 평안합니다.”
임근용이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로운 육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한 노비 주제에! 감히 내 손을 건드려? 꺼져!”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니 육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필사적으로 그의 앞에 있는 하인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어린 시종은 이리저리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사죄했다.
“여섯째 공자님, 소인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짐승만도 못한 게 어디 건방지게!”
육 노태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육선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뺨을 후려쳤다. 육선은 뺨을 맞고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다가 아예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육함은 몇 번이나 앞으로 나가 그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가 임근용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청석판이 깔린 바닥만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육함은 하는 수 없이 육 노태야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육 노태야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매를 걷더니 고개를 돌리고 계속 임근용에게 물었다.
“네 일곱째 동생은 이제 제 선생께 돌아간다더냐?”
“예. 내일 간다고 들었습니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육 노태야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걸 몇 번 물어보더니 말했다.
“그만 가 보거라.”
이때 임근용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육공자는 아직 어려서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망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
육 노태야가 입꼬리를 치켜들고 육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둘째 형수 체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마! 여봐라, 여섯째 공자를 부축해라!”
육선은 시종의 품에 안겨 스스로 서려고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흐느끼며 눈물만 흘렸다. 시종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자기 몸으로 지탱하며 난처한 표정으로 육 노태야를 바라보았다.
육 노태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함과 임근용에게 빨리 돌아가라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너희 할머니께서 기다리시겠다. 네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으니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거라.”
육함과 임근용은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문이 닫히고 난 후 육 노태야는 시선을 거두고 의자에 앉아 시종에게 명령했다.
“여섯째 공자를 깨끗이 씻기고 내 옆방에 침상을 하나 더 놓아 거기서 자게 해라.”
그런 다음 육 노태야는 시녀 두 명을 배치해 밤새도록 육선을 지키게 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좀 전에 임근용의 일거수일투족과 표정, 눈빛 등을 자세히 떠올려 보았다.
임근용은 냉혹한 여자였다. 사실 그가 육선을 아주 세게 때린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분명 무시무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웬만한 여자라면 진작에 겁을 먹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육함 역시 끼어들지는 못했어도 참기 힘들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임근용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잔잔하고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임근용은 착한 척은 못 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며느리들이나 육운이 여기에 있었다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분명 육선을 위해 나서서 사정하며 자신의 선량함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설령 임옥진이라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임근용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정을 했고, 그것마저도 그냥 도리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육선이 핍박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임근용은 너무 냉정하고 현명해 이미 육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를 대신해 사정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육선은 여씨 때문에 망가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육씨 가문의 자손들은 대부분 어릴 때 몸이 약해서 요절하기 쉬웠다. 여씨는 맨 처음 육함을 잃고 또 둘째 아들까지 잃으니 하나 남은 이 독자를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전전긍긍하며 아꼈다. 육선은 어렸을 때 아주 흔한 병을 한 번 앓았을 뿐인데 여씨는 이에 질겁을 하고 그 후로 늘 그에게 보약을 먹이며 바람을 쐬지 못하게 했다. 늘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해대니 아이는 음식을 가리기 시작했고 크면 클수록 허약해졌다. 육선이 허약해질수록 여씨는 더 아이를 싸고돌았고 그는 더욱더 더 괴팍하고 허약해졌다.
얼마 전까지는 육 노태야도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셋째 아들과 며느리의 심정을 헤아려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는 모른 체하며 그들이 하는 대로 둘 생각이었다. 평소의 육선은 허약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육륜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런대로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여씨가 이번에 이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임근용이 육함에게 그런 제의를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직접 보지 않았으면 육 노태야 또한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육 노태야가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삼남가에는 후계자가 없어질 것이다. 만약 그것조차 무시해 버린다면 훗날 장남가와 삼남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반목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육함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육 노태야는 전에는 스스로가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육 노태야는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세상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며 스스로가 아주 무력한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체감했다.
육 노태야는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찍 발견해 아직 만회할 시간은 있다는 점이었다.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지만 일을 성사시키는 건 하늘에 달린 것이니 어쨌든 그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근용은 아주 총명했지만 또 너무 냉담했다. 그녀는 아직도 육씨 가문에 마음을 완전히 다 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육 노태야는 어떻게든 임근용을 계속 찔러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집현각 밖의 대나무 숲은 어두컴컴했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쳐 지나가자 마치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육함은 밤바람에 흩날리는 임근용의 치마자락, 차분한 걸음걸이, 조용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원래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육선이 으르렁거리며 시동을 욕한 것이 누구 보라고 한 짓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육함과 임근용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형제인 육선이 그 지경이 된 것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임근용은 시집을 오자마자 이런 일들을 당했으니 마음에 원한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용.”
“응.”
임근용은 아직도 육 노태야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육 노태야가 자기 앞에서 육선을 때린 건 육선이 잘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육함의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며 이런 저런 쓸데없는 질문을 해댄 것도 임근용이 육선을 대신해 사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 노태야가 상대적으로 더 온화한 방식으로 이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음에도 이렇게 격렬한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임근용이 피할 수 없게 만들어, 그녀를 가능한 한 빨리 이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육함이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좀 차가웠지만 힘이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용, 아까 그 일은 식구가 많아서 와전된 것 같소. 걱정하지 마시오. 바르게 행동하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진가를 알게 될 거요.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육선이도 당신에게 감사할 거요.”
육함이 말하는 아까 그 일이라는 것은 여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퍼붓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임근용은 사실 여씨가 뒤에서 욕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여씨가 정말로 욕을 한다 해도 임근용은 그녀에게 가서 욕을 퍼부을 수도, 왜 욕을 하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만약 욕을 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면 더더욱 그녀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임근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안 해요. 아까 말했잖아요. 진위 여부를 모르는 일이니 마음에 둘 필요 없다고요. 육선 공자에 관해서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당신이 할아버님께 말씀드려서 할아버님께서 나서서 하신 일이잖아요. 앞으로 육선 공자가 잘돼서 감사 인사를 한다면 당신한테 하는 게 맞는 거죠.”
육함은 잠시 침묵했다가 그녀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그는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곁에 붙어 서서 바람을 막았다.
* * *
육 노부인은 두 사람을 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임근용에게 자신의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 마마를 불러 말했다.
“새끼양고기가 먹고 싶으니 내일 준비하라고 주방에 알리거라.”
이건 다른 형태의 위로였다. 임근용은 배가 터지도록 욕을 먹은 뒤에 새끼양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육 노부인의 마음을 얻은 것 같아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 노부인은 잠시 그들을 데리고 있다가 임옥진에게로 보냈다.
임옥진은 여전히 불쾌해하며 계속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임씨 가문의 상황을 몇 마디 물어보더니 육함에게 할 말이 있으니 남으라고 말했다.
육운은 여전히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눈치껏 임근용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귓속말로 말했다.
“며느리 노릇을 하다 보면 늘 억울한 일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특히 우리 집 같은 상황에서는 새언니가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해요. 오라버니한테 화내지 말아요.”
남의 말 하기는 쉽다고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건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오해를 받거나 욕을 먹는다고 뒤에서 숨어서 울며 억울해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이미 힘든 길에 들어섰는데 마음을 크게 가지지 않으면 자기만 고달플 뿐이었다. 임근용이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마음을 크게 가지고 이소야한테 화 안 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