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서문 (2)
육 노태야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다시 육함에게 물었다.
“이제 친척들을 만나면 알아 볼 수 있겠느냐?”
육함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요 며칠 손자가 돌아다니며 한 번씩 다 만나 뵈어서 열살 이상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잘 됐구나!”
육 노태야가 칭찬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책을 읽을 때는 제대로 잘 선택해서 읽어야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걸 읽어서는 안 된다는 걸 늘 명심하거라. 오늘은 온 가족이 영경거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어. 내가 오늘 아용이한테 둘째 며느리를 도와 집안일을 하라고 명령을 내릴 생각이란다. 아용, 혹시 무서운 건 아니지?”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두려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일이 여기까지 와 버렸으니 임근용은 무조건 성공해야만 했고 실패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일에 실패해 이 집에서 외출하는 것조차 제약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겠는가?
육 노태야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그들에게 함께 옆집으로 가서 육선을 보고 가라고 눈짓했다. 육륜은 전과 다름없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채 죽느니만 못 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육선은 오히려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있었는데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고 살도 좀 붙은 것이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육 노태야가 기침을 하자 육륜뿐만 아니라 육선까지 얼른 일어나 공손히 손을 모으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육선은 육함과 임근용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입술을 움직여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형님, 둘째 형수님.”
육함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 잘 챙겨 먹고, 공부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마.”
육선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응?”
육 노태야가 엄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하자 육선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육함과 임근용을 쳐다보지 않았다.
육함은 얼굴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어리며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육 노태야가 육함과 임근용에게 그만 가보 라며 손을 흔들었다.
* * *
진작부터 그들이 일찍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육 노부인은 잠시 임근용을 칭찬해준 뒤 그들을 배려해 얼른 가서 쉬라고 말했다.
두 부부는 영경거에서 나오자마자 육 노부인께 문안하러 왔다는 여씨를 우연히 만났다. 오늘 여씨는 오늘 골골거리던 예전과는 달리 대추색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금 보요를 꽂았으며 얼굴에는 지분까지 바른 상태였다. 그녀는 다정하게 임근용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축하해. 무슨 말인지 알지. 앞으로 곤란한 일이 생겨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셋째 숙모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임근용은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씨는 임근용의 손을 놓더니 또 다시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째야, 넌 아무 걱정 말고 공부하러 가. 집에는 내가 있으니까 너 대신 아용이를 잘 보살필게.”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숙모께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시고 몸조리에만 전념하세요. 다른 일들은 되도록이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여섯째가 아직 어리고 이제 막 기운을 차린 것 같으니 숙모께서 시간 되실 때 여섯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보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도 이번에 고생이 많으셨어요.”
임근용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예, 숙모님께서 제 걱정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숙모님 건강만 돌보세요.”
여씨는 육함과 임근용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만 잘 지낸다면 난 아무 걱정 안 해.”
* * *
밤이 되자 몇 십 개의 촛불이 영경거를 환하게 비췄다. 여덟 폭짜리 산수 병풍이 대청을 둘로 나눠 안쪽에는 육 노부인을 비롯한 여자 가족과 아이들, 바깥쪽에는 육 노태야를 비롯한 남자들이 앉았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했지만 다들 아주 조용하게 식사를 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육소의 두 아들인 원랑과 호랑은 아직 어려서 유모가 한쪽 옆에 앉아 아이가 원하는 대로 이것 저것 집어 주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입을 삐죽거렸다.
려씨는 마음이 몹시 초조했다. 그녀가 아이들을 달래 보려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자 원랑을 꾸짖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 커 가지고 법도를 조금도 모르는 너 같은 아이한테 내가 뭘 바라겠어? 계속 소란을 피우면 밥이고 뭐고 방에 가둬 버릴 거야!”
원랑은 예닐곱 살에 불과했고 평소에 아주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이런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했고 곧 입을 오므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송씨가 굳은 표정으로 려씨에게 경고했다.
“어린 것이 식탐을 좀 부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쓸데없이 애를 혼을 내고 그러느냐? 밥 먹을 땐 애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 다른 사람들도 못 먹게 방해하는 게냐?”
려씨가 억울해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시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며느리가 잘못했습니다.”
육운이 임근용에게 눈짓을 했다. 임근용은 아주 예의 바른 모습으로 밥과 반찬을 집어주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고부 둘이 왜 저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마음 속에 분노가 쌓여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빌미로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교활하고 간사해 볼썽사나운 일이 생길 것 같자 상대방이 입을 열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는 육 노부인이 분위기를 수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육 노부인이 웃음을 머금고 자애롭게 원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우리 착한 손주, 증조할머니한테 와 보렴.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울지 말고. 뭐가 먹고 싶어? 증조할머니한테 말해 봐. 다 줄게.”
원랑은 눈물을 흘리다가 씩 웃으며 육 노부인의 품에서 식탁 위의 요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석수(冻石首)랑 거위 튀김(白炸春鹅)이요.”
시녀가 한쪽 옆에서 원랑에게 음식을 집어 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래며 보살폈다.
원랑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자 려씨도 잠잠해졌다. 육 노부인이 말했다.
“큰 손자며느리와 둘째 손자며느리도 이제 앉아서 밥을 먹고 나머지는 시녀들한테 시중을 들라고 해라. 오늘은 손님도 없고 다 집안사람들뿐이니 그렇게까지 규칙을 지킬 필요 없어. 모처럼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건 함께 즐겁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자는 뜻 아니겠느냐. 앉아라, 어서 앉아.”
려씨와 임근용이 감사인사를 하고 말석에 앉았다. 육 노부인은 또 임옥진과 송씨에게 각각 자신의 며느리에게 반찬을 집어 주라고 지시하며 분위기를 다시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는 끝이 났다.
시녀들은 그릇과 젓가락, 식탁과 의자를 치운 뒤 병풍을 걷고 차와 과일을 올렸다. 온 집안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들 차를 한 잔씩 마시고 나자 육 노태야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모두들 집중하며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육 노태야는 아들, 손자, 며느리, 손자며느리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오늘 너희에게 모이라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육함이랑 근용이가 혼인을 한 지 벌써 거의 한 달이 다 되었지 않느냐. 육함이도 다시 제 선생 문하로 공부를 하러 가야 해서 송별연 겸 해서 모이라 했다. 두 번째는 한 동안 둘째 며느리가 혼자 너무 고생을 하지 않았느냐. 네가 아주 고생이 많았어.”
육 노태야는 말에 무게를 실으며 송씨와 육건중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너희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큰며느리는 강남에서 맏이를 돌보느라 바빠 둘째 며느리가 가족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처리하고 노복을 단속해 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불평 한 마디 없이 아주 열심히 해 주었다. 우리 집안이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다 둘째 며느리의 공로야.”
송씨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아버님께서 이렇게까지 며느리를 칭찬해 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한 가족이고 며느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찌 감히 공을 내세우겠습니까?”
가증스럽기는. 임옥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손가락에 낀 새빨간 홍옥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씨는 임옥진과 송씨를 번갈아 가며 보다 또 임근용을 쳐다보더니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육 노태야가 송씨에게 손을 내저었다.
“겸손해할 필요 없어. 네 공로를 네 공로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않느냐. 난 이유 없이 누군가를 욕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아. 진작부터 너 혼자 이렇게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그 동안은 달리 방법이 없었구나. 그래도 큰 손자 며느리가 널 도와준 덕분에 내 마음이 좀 편해졌지.”
려씨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육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육 노태야도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큰 손자며느리도 현명하고 유능해서 아주 마음에 들어.”
려씨가 일어나 감사인사를 하기 전에 그가 낭랑한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번에 고택에 갔을 때 보니 다들 여유롭게 보내는데 너희 고부 둘만 정신 없이 바쁘더구나.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가 임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손자며느리야!”
계속 그가 화제를 돌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임근용은 부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예, 할아버님.”
육 노태야의 눈이 눈썹 밑에서 번득였다.
“넌 이틀 동안 잘 준비해서 10일부터는 둘째 숙모와 큰형님을 따라 집안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서 되도록 빨리 손에 익히도록 해. 알겠느냐?”
임근용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뭔가 다짐하는 말 같은 걸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육 노태야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육 노태야는 다시 송씨와 려씨를 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저 아이를 너무 봐 주지 말거라. 저 아이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하게하고, 뭔가를 숨기지도 말거라.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치고, 일깨워줘야 할 것은 일깨워 주거라.”
그러더니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둘째 너도 알다시피 난 밑에 있는 사람이 일을 잘못하면 그 사람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관리하는 관리인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왜인줄 아느냐? 그건 관리인이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큰 손자가 뭔가를 잘못하면 둘째 네가 제대로 못 가르친 탓이고 둘째 네가 잘못하면 내가 제대로 못 가르친 탓인 게야.”
그의 말뜻은 너무나 명확했다. 육소는 얼른 “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육건중은 하얗고 뚱뚱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예,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