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14
214화. 5년
임근용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육운이 바로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임옥진이 말했다.
“아운아, 네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난 아버님이 근용이한테 집안일을 맡긴 건 차츰차츰 차남가에서 분리해 우리 둘째네를 일으켜 세워 주겠다는 뜻인 줄 알았어.”
육운도 막막해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생각엔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입을 연 이상 침방 하나 관리하는 걸로 성에 차 하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아마 새언니의 다른 모습을 좀 더 지켜봐야 안심하실 수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리고 새언니도 절대로 침방에만 만족할 사람은 아니니까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어쨌든 당분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육함과 임근용은 정말로 차남가와 맞서기에는 부족했다. 임옥진은 육함이 하루라도 빨리 진사에 합격하고 임근용이 빨리 건강한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패가 더 크고 무거울 필요가 있었다.
* * *
임근용은 평소처럼 오경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를 본 여지가 그녀에게 권했다.
“아가씨, 이소야께서 집에 안 계시니 좀 더 주무셔도 돼요. 대부인께서도 날이 밝아야 일어나시잖아요.”
이것이 바로 임옥진의 며느리로서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육 노부인은 아침에 방해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임옥진은 일도 하지 않아 자연히 비교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임근용 또한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시간부터 그녀에게 가서 시중들 필요가 없었다.
임근용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할 일이 많아.”
그녀가 단장을 마치자마자 두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저기, 혹시 누구세요?”
누군가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두아지? 이소부인께서는 일어나셨니?”
여지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일찍 온 걸 보니 눈치가 빠른 것 같네요.”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가씨, 밖에 좀 세워 둘까요?”
이 사람은 임옥진이 일부러 꽂은 첩자가 분명했다. 거절할 수는 없지만 난처하게 해서도 안 됐다.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뭐 하러 그래? 괜한 짓 하지 마. 들어오라 하고 다른 애들도 불러서 인사시켜.”
임근용은 방죽에게 반드시 봄날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하고 온전한 믿음을 심어 주어야 했다.
“남들한테 비웃음 당하지 않게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해.”
임근용이 방죽의 내력을 소개하자 두아와 앵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지만 계 마마는 한없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나이에 이런 신분이라면 마마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계원도 입술을 깨물고 걱정하며 임근용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계원의 신분과 지위는 예전만 못해서 감히 나서서 말할 수가 없었다. 계원은 속으로 여지의 입을 빌려 간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근용은 두 모녀가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따로 위로하지 않고 방죽과 여지를 데리고 송씨에게 갔다. 송씨는 어제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굴며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녀는 흔쾌히 임근용을 침방으로 데려가 서 마마와 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현장 훈련을 마친 후에 송씨는 임근용에게 집안일을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라며 강권했다. 임근용도 사양하지 않고 한쪽에 조용히 앉아 송씨의 뛰어난 집안일 솜씨를 참관했다. 점심때가 되자 송씨가 연신 하품을 해댔다. 오후가 그녀의 사적인 시간이라는 걸 알아챈 임근용이 눈치 있게 작별을 고하고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임옥진에게로 가 임옥진을 모시고 점심을 먹었다.
임옥진은 그녀가 어디든 방죽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고 대충 몇 마디 묻기만 했다. 임근용은 기회를 보다 자신의 혼수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임세전을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임옥진은 임근용이 자기 혼수를 관리하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고 또 그녀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외간 남자가 아닌 친척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허락해 주었다.
이에 임근용은 사양하지 않고 방죽에게 일을 시켰다.
“무슨 방법을 쓰든지간에 넌 가능한 한 빨리 나한테 소식을 알려 줘. 빠르면 빠를 수록 좋아.”
뒤이어 그녀가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임세전이 이미 육씨 가문 저택에 와 화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지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빠르긴 빠르네요. 다른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면 한두 시진은 더 있어야 하잖아요?”
임근용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그 여자를 어디다 쓰겠어?”
사람은 각자 쓰임이 다를 뿐이지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방죽의 강점은 내외원에서 물건과 소식을 빠르게 전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 * *
임세전은 오늘 제대로 차려 입고 있었다. 청회색의 둥근 깃에 좁은 소매가 달린 상의는 소박하고 꾸밈없어 보였지만 옷감이나 만듦새는 꽤 정교했다. 허리에 찬 옥패도 아주 질 좋아 보였고 곧은 몸매에 여유로운 행동거지가 임, 육 두 집안의 자제 못지않았다. 임근용은 그를 보자마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셋째 오라버니의 외모가 이렇게 수려한 줄은 몰랐네요.”
“네가 시집오고 나서 처음 방문하는 건데 네 체면을 상하게 하면 안 되잖아.”
임세전은 임근용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풋풋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안색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물었다.
“넌 괜찮아? 육함이 너한테 잘해 줘?”
처음에 임근용이 육함에게 시집가기 싫어했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임근용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괜찮아요. 어쨌든 계속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신속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던 찻집이요, 오라버니는 그동안 어떻게 준비했어요?”
임세전은 자신이 그 동안 준비해 왔던 것들을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게 가게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문제야. 세를 얻을 거야, 아니면 살 거야? 내 생각엔 세를 얻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아. 아무래도 내부 수리를 많이 해야 해서 돈을 많이 투자해야 하거든. 나중에 주인이 가게를 빼라고 하면 손실이 클 거야.”
강남의 찻집과 평주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운치가 있느냐 없느냐 였다. 강남에는 고급 찻집도 있고 길거리에서 차를 파는 찻집도 있지만 대부분 안쪽으로 들어가면 멋진 정원이 펼쳐졌다.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넓고 밝은 방이 무수히 많았는데 거기에는 이름난 꽃과 풀, 산수화, 그윽한 향과 음악이 있었다.
손님은 다사(*茶师: 다도 전문가 혹은 다도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다도 공연을 청할 수도 있고, 스스로 직접 차를 내리며 즐길 수도 있고 사람들을 초대해 서로 겨뤄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찻집은 일반적인 가게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가게 부지를 빌린 후에는 필수적으로 내부 수리를 해야 했다.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히 사는 것이 빌리는 것보다 수지가 맞았다. 때문에 임세전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임근용은 일찍이 계획한 바가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 찻집을 그렇게 오래 하지 않고 한 5년 정도만 할 생각이라면 빌리는 게 나을까요, 사는 게 나을까요?”
임세전은 잠시 멍해졌다.
“그럼 빌리는 게 낫지. 근데 왜 5년밖에 안 하겠다는 거야? 나 잘 할 자신 있어.”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를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오라버니도 몇 년 동안 예전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발전했잖아요. 내가 은자 하나를 주면 금방 두 개로 불리고요. 안 그래요?”
임세전이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야 전부 넷째 네…….”
“그런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그만해요. 오라버니는 매번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만 사실 나도 오라버니가 없으면 안 돼요.”
임근용은 임세전의 성공이 전적으로 자신의 도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세전에게 기회를 주긴 했지만 임세전의 총명함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노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임근용은 아직 자신의 진짜 계획을 임세전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육함을 내세웠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이 평주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민행이 공부를 꽤 잘 하잖아요.”
임세전의 눈이 밝아졌다.
“그러네, 민행은 아마 과거에 합격 할 거야. 평주는 너무 작고 외진 곳이라 장사가 잘 된다고 한들 뭐 얼마나 벌겠어. 다른 번화한 동네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평주라는 지역에서는 정말 온갖 방법을 다 쥐어짜내야만 동전 하나를 세 개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남의 부유한 지역이라면 아마 어렵지 않게 세 개로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임근용이 미소 지었다.
“바로 그거에요. 그러니까 절대 낭비하지 말고 돈을 많이 모아놔야 해요. 오라버니, 계약서를 쓸 때 잊지 말고 계약 기간을 꼭 5년으로 잡아요. 땅 주인이 임대료를 올릴 여지를 주면 안 돼요.”
5년 후, 이 가게가 비적들의 난으로 불타버리든 살아남든 간에 그녀는 육씨 가문 사람들에게 이 가게를 공짜로 넘겨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게를 임대하고 차리는 것 같은 일은 지금의 임세전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그래도 임근용과 상의는 해야 했다.
“내가 전에 두 곳을 봐 뒀는데 하나는 성 남쪽의 양씨 가문의 새집이야. 이 집은 수리한 후에 주인이 1년밖에 살지 않았대. 안의 구조가 괜찮아서 많이 수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임대료가 싸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라 개업한 후에 시간과 노력을 좀 들여야지 천천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하나는 성 중앙에 있는 주씨 가문의 가게인데 여긴 낡고 좁아서 개조하는 데 돈이 많이 들고 임대료도 비싸. 하지만 목이 좋아서 눈독 들이는 사람이 많아. 넷째 네 생각엔 어디가 적당할 것 같아?”
임근용이 말했다.
“시간 날 때 직접 가서 보고 다시 얘기해요.”
전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뒤에 숨어서 모든 일을 임세전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걸 늘 잊으면 안 됐다. 임근용이 이 찻집을 열고자 한 진짜 이유는 스스로 연습하고 경험을 쌓을 만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함께 가게 자리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임세전은 또 염지에 강물을 끌어다 대는 일과 소작인을 구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으면 올해부터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평주와 청주에 갑자기 농지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다른 집들에서도 소작인을 구하려 할 거야. 이 근방에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인근 주현에 가서 사람을 구해야겠지. 그때 빨리 조건을 협상하고 소작인들을 선점하려면 반드시 미리 계획을 세워 둬야 해. 넌 무슨 계획이 있어?”
그 땅은 소작인을 구해 경작을 해야했고 또 뭘 심든 경작하기가 아주 까다로웠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땅을 사서 괜히 돈만 날린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임, 육 두 집안이 모두 관료 가문이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땅에 대한 세금까지 내야 했을 것이다. 넓은 땅을 싸게 사는 건 안목만 좋으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땅을 경영해 돈을 버는 건 능력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