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좌우
임근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 역시 오상이 무슨 극악무도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잘한 단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와 그를 비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 봤자 그냥 친구 하나만 잃게 될 뿐이었다. 오상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그녀에게 별로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직 여기 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된 것이다.
오상이 진지하게 임근용을 한 번 훑어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넷째야, 넌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난 네가 나한테 엄청 화낼 줄 알았어. 이제부터 날 소인배 취급하고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전혀 아니었네. 넷째야, 넌 여자고 나보다 나이도 어리지만 난 네가 아주 존경스러워.”
임근용이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난 그냥 평범한 젊은 여자일 뿐이에요. 오라버니, 다른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녀가 오상에게 작별을 고하자마자 육함과 오형이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임근용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두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오형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웃는 얼굴로 말했다.
“둘째 형님 거기서 뭐해요? 저쪽에서 보니까 형님이 형수님한테 허리를 굽히고 절하던데 차가 다 됐는지 보러 간다더니 그새 형수님한테 뭐 잘못했어요? 빨리 말해 봐요, 또 무슨 짓 했어요?”
오상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움을 샀어.”
육함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 임근용의 옆에 서더니 웃으며 말했다.
“근용이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야. 분명 네가 뭔가 기분 나쁜 말을 했겠지. 안 그렇소, 아용?”
임근용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상이 말했다.
“근용이가 속이 안 좁다고? 내가 근용이 시녀한테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발끈해서 무섭게 달려들던데. 괜한 싸움 만들지 않으려면 내가 허리를 굽히고 사과해야지 별 수 있겠어?”
때마침 계원이 다기를 들고 나와 웃으며 말했다.
“다 노비가 멍청한 탓이에요.”
오상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몰라, 어쨌든 난 사과했어.”
오형이 말했다.
“우리 둘째 형님 성격이 원래 이래요. 순간의 즐거움만 좇느라 가는 데마다 미움을 산다니까요. 선량하신 두 분이 너그러이 봐주세요.”
육함이 담담하게 웃었다.
“저 친구 성격이야 이미 잘 알지.”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임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장루에서 음식이 도착했다. 세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잠시 잡담을 하다가 곧 헤어졌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밤바람이 상쾌해졌다. 마차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거리를 달리자 기분이 한껏 여유로워졌다. 임근용은 자세를 고쳐 최대한 편안하게 앉았다.
“민행, 내일은 친정에 한 번 다녀왔으면 해요.”
육함이 말했다.
“같이 갑시다. 나도 처가에 다녀온 지 오래된 것 같군. 어제 일곱째를 배웅하러 갔을 때 잠시 들르긴 했지만 따로 가서 어르신들께 문안을 드려야 할 것 같소.”
그가 잠시 멈칫했다가 물었다.
“아용, 좀 전에 오상이 또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오라버니 성격 잘 알잖아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골동품들을 꼭 나한테 빌려 주고 싶다면서 고집을 부렸어요. 내가 싫다고 했더니 나한테 고지식하고 옹졸하다고 하는 거 있죠. 그러더니 우리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뭐라 하길래 사정 안 봐주고 호되게 욕해 줬지요.”
육함이 손가락으로 낮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는 걸 보니 아마도 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그 친구 그런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몰라요. 당신은 오상이 경성에서 무슨 짓을 해서 큰일을 그르쳤는지 아시오?”
임근용이 말했다.
“몰라요. 자기가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을 물어보긴 좀 그렇잖아요. 당신은 알아요?”
육함이 말했다.
“오상이랑 같이 시험을 보러 갔던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역시나 그 입이 문제였더군. 우리 태명부에 영로학사(荣老学士)가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원래 고향 사람들을 잘 돌봐 주신다오. 어느 날 그분이 풍락루(丰乐楼)에 사람들을 초대해 한턱내셨는데 다른 손님들에게 오상을 소개하려고 일부러 자리를 마련하셨다고 하더군.
좌중에 무태사(武太师)의 무슨 질손(*侄孙: 형이나 아우의 손자)인가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변에서 그 사람을 좀 치켜세워 줬나 보더오. 오상이 그게 못마땅했는지 술 취한 척하며 헛소리를 해서 그 사람한테 미움을 샀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 화를 입게 된 거요. 영로께서 감싸 준 덕분에 그 정도에 그쳤지 안 그랬으면 훨씬 더 큰 고초를 당해 평생 인생을 망칠 뻔했소.”
임근용은 일이 그렇게까지 심각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상은 전혀 후회하거나 고민하는 기색 없이 전처럼 여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오상의 이런 성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좌절을 경험하면 그만큼 현명해진다고 하던데 오상 오라버니는 그 일에서 별로 교훈을 얻은 것 같지가 않네요.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내가 볼 때 오라버니의 그런 기질은 고치기 힘들 것 같아요.”
육함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우린 그저 그 친구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아껴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삶이 순조롭게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지.”
임근용은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육함을 한 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친구이긴 했지만 지금껏 둘 중 누구도 진심으로 상대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육함은 줄곧 오상을 뛰어넘고 싶어 했고, 오상도 육함이 자신을 능가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의 우정은 서로에게 지려 하지 않는 마음과 경쟁심에서 시작되어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육함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좀 의외였다. 그럼 나중에 이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게 되는 이유는 뭘까? 육함이 결국 오상의 그런 자유분방한 성격을 참아 주기 힘들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상이 지나치게 진지하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육함의 성격을 더 이상 보아 넘기기 힘들어졌기 때문일까?
육함은 임근용의 이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약간 불쾌해하며 말했다.
“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오.”
육함이 오상을 진심으로 이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 이기는 것이지 오상의 불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임근용은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민행, 무슨 말이 그래요? 내가 당신을 뭘 어떻게 생각한다는 건데요?”
육함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말이 안 통할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육함은 마침 한쪽 구석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계원을 보고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계원은 영문을 몰라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대체 육함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육씨 가문에 들어온 이래로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계원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 아마도 육함의 이 눈빛은 그녀가 좀 전에 오상에게 맞장구를 쳐 거짓말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계원은 또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신발 끝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고 얼마 안 있어 목과 등이 뻣뻣해지고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임근용은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계원아, 이리 와서 부채 좀 부쳐 줘.”
계원은 그제야 크게 안도하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 낫고, 쓸모가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임근용에게 다가가 적당한 속도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계원은 임근용만 잘 모시면 자신의 처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임근용이야말로 그녀의 생사와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 *
육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와 중문 안으로 들어서니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앵두가 이제 막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시녀들과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구슬치기를 하며 재잘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죽이 웃으며 말했다.
“앵두가 아직 어리잖아요. 이소부인께서 안 계실 땐 이렇게 잠깐씩 놀 수 있게 해 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계원이 조심스럽게 임근용을 칭찬했다.
“다 우리 이소부인께서 너그러우시니까 가능한 일이죠. 안 그랬으면 저 계집애가 감히 저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었겠어요?”
방죽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얼른 임근용을 치켜세웠다.
“맞아요, 이소부인께서는 정말 마음이 보살 같으시다니까요. 전 지금껏 이소부인께서 사람들한테 모질게 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육함이 임근용을 힐끗 보았지만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근용은 그를 못 본 척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앵두 좀 불러 봐.”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미 임근용을 발견한 앵두가 부리나케 달려와 인사했다.
“이소야, 이소부인 돌아오셨어요? 대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돌아오시자마자 바로 영경거로 오라고 하셨어요. 지금 대부인, 이부인, 삼부인, 대소부인, 육운 아가씨 전부 다 거기에 계시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시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앵두는 임근용에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이부인이 노부인께 사죄하셨어요.”
육함은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앵두는 놀면서도 일을 하는가 보구나.”
앵두가 이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이다 활짝 웃었다.
“이소야 말씀이 맞아요. 노비는 여기서 이소야와 이소부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 일이 남아 있는데 노비가 어찌 감히 꾀를 부리겠어요?”
그녀는 키가 크고 손발이 길었다. 뼈대가 가늘고, 둥그스름한 두 눈은 반짝거려 아주 순진하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육함은 잠시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소부인이 상을 내리실 거야. 뭐 원하는 거 있느냐?”
그가 이렇게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건 드문 일이라 앵두의 눈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노비는 이소부인께서 기뻐하시는 걸로 충분해요.”
“앵두 넌 일단 여지한테 가서 우리는 돌아와서 바로 영경거로 갔으니 우리 기다리지 말고 저녁을 먹으라고 해.”
임근용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수하의 사람을 기르려는 5년여 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앵두가 대답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임근용이 길을 걸으며 육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숙모님께서 할머님께 사죄를 드렸다고 하네요.”
육함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만간 얘기가 나오겠군.”
송씨는 자신의 사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녀는 절대 이렇게 쉽게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죄를 전부 하인들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실수를 되돌릴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