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널브러지다
집현각에는 이때까지도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육 노태야 앞에는 장부가 높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 장부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담담한 눈길로 앞에 있는 육건중만 응시하고 있었다.
육 노태야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계속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석에 앉아 있던 육건중은 속옷 안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이 이미 송씨를 훈계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제 안사람이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저도 부주의한 안사람과 며느리 때문에 이 일에 말려들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사람들 앞에서 얼굴도 들 수 없었을 거고 형님을 뵐 면목도 없었을 겁니다.”
육 노태야가 앞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넌 그게 정말로 전부 둘째 며느리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집을 잠시 비웠다 돌아온 후에 집안이 상황이 이렇게 변했는데 아무 생각도 없는 게야?”
이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완전히 부정해버리면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거짓말을 한다는 건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육건중은 다소 불안해하며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버지, 큰형님이 안 계시니 다음에 아버지께서 둘째한테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서신으로 보내거나 장수가 직접 와서 말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소식을 전하다가 중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한 노비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송씨가 나쁜 마음을 먹고 고의로 육함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아 장남가와 삼남가를 이간질해 원한이 생기게 만들고 이소야 부부의 마음을 갈라놓으려 했다고 소곤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 이건 이소야 부부의 속임수일 수도 있었다. 진짜로 병이 났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일일뿐더러 정말로 소식을 전할 사람을 보냈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정말로 의심스러웠다.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 빨리 사람을 쫓아냈단 말인가?
육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구나. 내가 둘째 손자한테 말을 하마.”
육건중은 육 노태야가 화를 내거나 혹은 이 일들을 전부 엮어서 육함을 보호하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육함을 칭찬했다.
“사실 둘째가 참 총명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만들고 있는 쟁기와 앙마는 사실 저도 몇 년 전에 육소와 식량을 배달하러 가던 도중에 사람들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우리 집에서도 진작에 쓰고 있었을 텐데요.”
“그래, 넌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느냐? 본디 네게 주어진 것이 아니면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지척에서 놓칠 수밖에 없다는 뜻인 게다.”
육 노태야가 말했다.
“둘째는 말이 적지만 아주 세심한 아이야.”
육 노태야는 심장 쪽을 가리키며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여기, 그 아이는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아두지.”
육건중은 잠시 침묵했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아버지, 장부를 전부 가져 왔는데 사람을 불러서 대조해보시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둘째 며느리가 그리 오래 집안일을 맡았는데 설마 장부 하나 제대로 못 맞춰 놨겠느냐? 그럼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지.”
육 노태야가 장부를 살짝 밀자 장부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자단목 책상을 타고 미끄러져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육건중은 마음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주 괴로웠다. 육 노태야가 장부를 대조할 필요 없다고 하며 송씨를 믿는다고 말했으니 그는 기뻐해야 마땅했다. 이걸 보면 노태야는 여전히 차남가를 마음에 두고 여지를 남겨 두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태야의 말과 행동을 보면 분명히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저 자신들과 일일이 따져대는 게 귀찮을 뿐인 것 같았다. 육건중은 억지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힘겹게 쪼그리고 앉아 느릿느릿 땅에 떨어진 장부를 주웠다.
육 노태야는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관절염이 또 도진 게냐?”
육건중은 고개를 들고 육 노태야를 바라보며 어수룩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근래에 묵었던 곳이 습기가 좀 많았는데, 고약까지 다 써 버려서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무릎을 드러내더니 육 노태야에게 보여 주었다.
“방금 고약을 붙였습니다. 이제 약효가 돌아서 따끈따끈해지고 있으니 이틀 정도 지나면 분명히 좋아질 겁니다.”
육 노태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줍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라. 며칠 동안은 외출하지 말고 집에서 요양하거라.”
육건중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땅에 널브러져 있는 장부를 주웠다. 전부 다 주운 그는 장부를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놓고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보시지 않더라도 장부를 대조할 때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 노태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일찍 쉬십시오. 아들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육 노태야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육건중이 문 앞에 이르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일 온 가족이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집안일을 분배할 게다. 그리고 이번 달이 지나고 나면, 셋째, 다섯째, 여섯째를 함께 태명부로 보내 공부시킬 생각이야. 요 며칠 형제간에 정 좀 들라고 아이들끼리 이리저리 놀러 다니게 풀어 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야 둘째 손자가 앞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자기 사촌 형제들을 잊지 않겠지. 그러니 너도 아이들을 구속하지 말거라.”
“예. 아버지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육건중은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육 노태야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장부 한 권을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뒤적거리다가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 * *
여씨는 오늘이 아마도 자신이 육함을 낳아 일거에 득남을 했던 날 이후로 가장 기세등등한 하루가 되리라 생각했다.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가 와서 오늘 점심에 온 가족이 함께 점심을 먹고 차남가에서 장부를 제출한 뒤 노태야가 집안일을 분배할 것이라 전했다.
그녀는 이미 옷을 다 갖춰 입은 상태였는데, 다시 보니 옅은 진홍색 옷은 자신의 용모와 기질을 돋보이게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만든 살구색 비단 상의를 꺼내 다림질하고 훈향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막상 입을 때가 되니 또 너무 애써 차려입으면 사람들이 자신이 긴장한 걸 쉽게 알아차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또 옷을 내팽개치고 옷궤 안을 한참 뒤적이다가 마침내 옅은 주홍색 비단 상의를 꺼내 입었다. 화장함을 열자마자 그녀는 오늘 같은 자리에 하고 갈만한 귀한 장신구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씨는 시무룩하게 화장대 앞에 앉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육 삼노야는 연청색 상의를 입고 가슴을 편 채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책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왜 그러시오?”
그는 아내에게 아주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죄책감은 대단한 아버지와 능력 있는 두 형들에 비해 자신은 별로 능력이 없다는 걸 아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열등감을 느꼈지만 육함을 빼앗긴 이후부터는 그것이 서서히 죄책감으로 변했다. 그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느꼈고 이런 죄책감은 처자식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양보로 변했다.
여씨가 고개를 돌리며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너무 초라하게 하고 가면 안 되는데 변변한 장신구도 하나 없잖아요.”
육 삼노야는 그녀의 이 말이 마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그는 여씨가 자신에게 남편으로서 무능하다고 따져 묻는 것 같아 살짝 기운이 빠졌다. 육 삼노야는 시력이 좋지 않은 눈을 가늘게 떠 여씨가 들고 있는 장신구함 안을 대충 훑어보며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내려 애썼다.
“내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이렇게 금빛 찬란하고 꽉 차 있지 않소. 당신은 예쁘게 생겨서 아무거나 해도 예쁘오. 사람이 중요하지 장신구가 중요한 게 아니잖소.”
여씨는 그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찢어진 삼베옷을 입고 있으면 그냥 거지일 뿐이지 않은가. 그녀는 장신구함을 꺼내 화장대 위에 겹겹이 쌓기 시작했다.
육 삼노야의 심장은 이 소리를 따라 격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고심한 끝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설날에 어머니께서 당신한테 준 그 보석 팔찌를 차면 되지 않소! 그때 내가 당신한테 선물한 옥패와도 잘 어울리고 말이오.”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 말로 인해 여씨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 건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까짓 옥패 하나, 당신 나하고 이렇게 오래 같이 살면서 그거 말고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큰 형님이나 둘째 형님을 좀 봐요.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들 중에 집에서 만들어준 게 있는 줄 알아요? 난 둘째 며느리랑도 비교가 안 된다고요!”
육 삼노야는 그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사실 요 몇 년 동안 개인 돈을 모아서 여씨에게 장신구를 사준 적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친정에서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제일 먼저 그런 물건들을 가져다가 팔아 여씨 가문을 도왔다. 그런 물건들은 장부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래서 시댁에서 준 물건으로 친정을 도와준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서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씨는 더욱더 분노할 것이다. 그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씨는 노기등등해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뭘 더 바라겠어? 자기 아들도 못 지키는 사람한테.”
육 삼노야가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몹시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에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여씨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육 삼노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수염을 잡아 힘껏 잡아당기며 몇 가닥 뽑았다. 타는 듯한 통증이 그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그는 육함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당신한테 중요한 자리를 맡기지는 않을 것 같소. 당신은 지금껏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아니오. 설령 당신에게 맡긴다 해도 그 사람들이 안심하겠소?”
여씨가 아주 불쾌해하며 말했다.
“아버님께 가서 말씀드리기 싫은 거면 안 하면 그만이지 왜 당신까지 날 무시하고 그래요! 나도 당신처럼 못났다고 사람들한테 무시나 당하길 바라서 이러는 거예요?”
육 삼노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들고 있던 책에 얼굴을 파묻으며 다시 책 속 세계로 빠져들었다.
여씨는 맥없이 장신구함을 한참 뒤적이다가 결국 육 삼노야가 했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육 노부인이 그녀에게 준 보석 팔지와 신혼 때 육 삼노야가 준 옥패를 찼다.
어쨌든 그 팔찌는 상등품이었고 옥패 역시 순도가 아주 높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연지를 바르며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려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