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바보 아니에요
육함과 범포는 집현각 밖의 그늘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그들이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육 노태야와 육건중이 방 안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육건중은 축 처진 모양새로 문으로 걸어 나오다가 문지방에 부딪혀 크게 넘어졌고 땅에 엎드린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육 노태야는 사람들에게 그를 부축해 주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고 이에 범포와 육함도 가만히 서 있었다. 천천히 일어난 육건중은 기둥을 붙잡고 두어 번 숨을 헐떡이고 소매로 이마를 닦더니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이때 범포가 말했다.
“이소야,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육함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육 노태야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육 노태야는 그를 등진 채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는 것 같은 행동을 했다. 그는 잠시 뒤에 고개를 돌리며 육함을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앉아라.”
육함은 자리에 앉지 않고 일단 땅바닥에 깨져 있는 문진을 치우고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한잔 따른 뒤 두 손으로 육 노태야에게 바쳤다.
“할아버지, 차 한 잔 드세요.”
육 노태야는 그가 준 차를 받아 가볍게 한 모금 홀짝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다 들었지?”
육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육 노태야가 말했다.
“아용이는 좀 어떠냐?”
육함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많이 놀라고 상심했어요. 하지만 바보는 아닌지라…….”
임근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것도, 화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정세를 살피며 자신의 억울함을 어른들이 어떻게 풀어 줄지 일단 기다려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육 노태야도 당연히 육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반쯤 눈을 감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육함이 혹시 그가 잠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육 노태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둘째야, 절대적인 실력 앞에서는 어떤 음모와 속임수도 의미가 없다는 걸 명심 하거라!”
육함이 얼른 똑바로 서며 말했다.
“예,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게 손자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육 노태야가 약간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너희 할머니도 몸이 안 좋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내가 죽으면 이 집안이 산산조각 나지 않겠느냐. 난 그저 네가 그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자립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육함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는 육 노태야에게 다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분명히 장수하실 거예요. 부디 손자가 과거에 합격해 조상을 빛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할아버지…….”
육함이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만큼 저를 아껴주시는 분은 없을 거예요. 아직 손자가 할아버지께 효도도 못 했잖아요.”
육 노태야도 살짝 감동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야, 네가 좀 더 노력해주려무나. 이 육씨 가문은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해. 내일 모레 셋째와 다섯째, 여섯째를 서원으로 보낼 생각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나마 남은 정마저 다 떨어질까 걱정이 되는구나.”
육함은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숙모께서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마음을 먹으시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네 둘째 숙모는 한동안 시골에 내려 보낼 생각이다.”
육 노태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랑 아용이는 요즘 어떠니?”
그가 명확하게 말한 건 아니었지만 육함은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절로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요.”
육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가 한동안 손자며느리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봤는데 아주 잘 하더구나. 네가 아용이한테 잘해 주거라, 진심을 다해서 잘해 줘야 해. 그럼 앞으로 뒷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질 게다.”
그가 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작은 가게를 하나 물려 주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육함은 뜻밖의 제안에 무의식적으로 거절했다. 육노태야가 탄식하며 말했다.
“뭘 사양하는 게냐? 할아버지가 주면 그냥 받는 거란다. 그 가게는 범포와 나만 알고 있고 가게 주인도 내 사람이야. 네가 나이가 들면 문중의 공금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는 부족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을 게다. 그렇다고 손자며느리한테 혼수를 내놓으라고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그리고 너도 스스로 경영하는 법을 좀 배워 두어야지. 종이와 붓을 들었다고 두 눈마저 어두워지면 안 되는 거란다.”
육함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육 노태야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육 노태야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만 가 보거라, 앞으로 네 형제들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사람을 뽑아 쓸 때는 절대 선대의 원한까지 결부시키지 말거라.”
* * *
사람을 찾기 쉽도록 각 집의 시녀들을 모두 한곳에 집합시켜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육륜은 장정 무리를 이끌고 횃불을 든 채 사방을 수색했다. 오후부터 지금까지 북쪽 연화지에서부터 남쪽으로 수색해 내려와 벌써 몇 시진이나 지났지만 그는 전혀 피곤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멀리서 육소가 다가오는 걸 보고 별생각 없이 얼른 앞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큰형, 도와주러 왔어요?”
육소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육륜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순진하게 웃었다.
“형님,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내 얼굴에 뭐 흙이라도 묻었어요?”
육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찾을 필요 없어, 그 사람 찾았어.”
육륜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어, 어디서 찾았어요? 내가 오늘 반나절이나 뒤졌는데도 못 찾았는데 형님이 찾았다고요?”
“연화지 안에서 찾았어.”
육소는 그에게 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 피곤한 기색으로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사람을 찾았으니 다들 그만 가 보거라.”
“그럴 리가요? 분명 연화지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는데. 그 여자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데요?”
육륜이 그에게 귀찮게 들러붙었다.
“내가 가 봐야겠어요. 가서 그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숨어 있었는지, 왜 사람을 해치려고 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육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 여자는 벌써 죽었어.”
그가 강조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연화지에 빠져 죽었어. 정자 부근에 사람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움푹 파인 홈이 하나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곳이야. 아마 너희들을 피해서 물 밑에서 너무 오래 숨을 참고 있다가 숨이 막혀 죽은 것 같아.”
육소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와 함께 온 두 장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곳에 사람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곳은 육륜이 이미 여러 번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었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육소를 바라보았다. 육륜의 티 없이 맑은 눈빛에 살짝 제 발이 저린 육소는 애써 침착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다섯째가 벌써 이렇게 다 커서 집안일을 돕는구나.”
“그저 작게 힘을 보태는 것뿐이죠.”
육륜이 마지못해 웃었다.
“그래도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육소가 뒤돌며 말했다.
“밤에 악몽을 꾸는 게 무섭지 않다면 따라와.”
육륜은 죽은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담력이 센 그 역시 안색이 변하지 않도록 억지로 버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시체가 놓인 나뭇간(*柴房: 땔나무를 쌓아두는 곳간)에서 나오자 육륜은 아랫사람들을 물리고 육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큰형,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육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
“어찌 되긴 뭐가 어찌 돼?”
육륜이 미간을 찡그리며 약간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나 바보 아니에요.”
육소도 눈살을 찌푸리며 매서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가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라고요.”
육륜은 한참 동안 육소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뒤돌아 가버렸다.
육소는 잠시 침묵하며 가만히 서 있다가 뒤돌아 송씨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송씨의 집은 온 사방에 등불이 켜져 있었지만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정원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방문 앞에 이르자 려씨가 손수건을 꽉 쥐고 있다가 마치 화살에 놀란 새처럼 깜짝 놀라더니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초 마마가…….”
육소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턱짓을 하자 려씨가 조용히 길을 비켜 주었다.
육소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송씨와 육건중이 서로 마주앉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둘 다 얼굴색이 아주 안 좋았다. 그가 들어오는 걸 본 육건중이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정리했느냐?”
“예.”
육소는 자리에 앉아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육건중이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는 며칠 고택에 가 계실 거다. 내일모레 네 셋째 동생과 다른 동생들이 태명부로 갈 예정이니 그 아이들이 떠난 후에 사람을 데리고 고택에 가서 정리를 좀 해 두거라.”
송씨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 시끄럽게 울어대려 하자 육건중이 짜증을 냈다.
“울긴 왜 우는 거요? 멍청하긴! 능력이 안 되면 그냥 꼬리를 말고 도망이나 칠 것이지 왜 쓸데없는 수작을 부려서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거요?”
육건중의 말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조함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의 음험한 눈빛에는 방금 전에 육 노태야의 면전에서 욕을 먹을 때의 불쌍하고 무기력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원래 빈틈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교롭게도 풀처럼 키만 크고 머리는 자라지 않은 장난꾸러기 육륜 그 녀석한테 들키는 바람에 다 망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육 노태야의 생각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육 노태야는 역시 육함 부부를 보배로 여기고 있었다. 절대로 그들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달갑지 않더라도 사건이 이미 다 드러났으니 송씨는 감히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송씨가 입을 열었다.
“아들아, 초 마마를 팔 때 그래도 네가 좋은 주인을 찾아주었더구나. 그나마도 오랜 시간 나랑 함께한 정이 아주 헛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육건중이 눈을 들고 육소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치켜올렸고 눈빛에 독기가 반짝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을 이해한 육소는 눈을 내리깐 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육건중은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오늘부터는 납작 엎드려서 처신을 똑바로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