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8
28화. 고훈 (1)
날이 밝을 무렵까지 비가 그치지 않아 집안은 평소보다 한층 어두웠다.
여지는 평소처럼 임근용이 일어나면 시중들 준비를 하려고 뜨거운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그런데 임근용이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창가에 앉아 어둑어둑한 창문 밖에 피어오른 물안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나셨어요? 왜 아무도 안 부르셨어요?”
여지는 구리 대야를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듯 임근용 곁으로 달려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임근용의 눈 밑이 파란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밤에 또 악몽을 꾸신 거예요?!”
임근용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일 외숙모와 사촌 오라버니가 떠나잖아. 이번에 가면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배웅하고 싶은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곤란해지실까 봐 걱정이야.”
여지가 중얼거렸다.
“지금 삼부인께서 아가씨를 위해 부탁을 하시는 건 좀 곤란하실 거예요.”
임 노태야가 단단히 화가 나는 바람에 임역지와 쌍둥이, 임근용은 벌을 받고 이노야와 삼노야까지 꾸중을 들었다. 이 일로 임신지는 청도거에서 임 노태야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나 도씨가 그날 노부인에게 대든 일도 아직 누군가의 마음에는 남아있었다.
단지 오씨가 꾸물거리며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잠시 묻어두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분명 이 빚을 갚으러 올 날이 있을 것이다.
삼남가는 지금 몸을 낮추고 있어야 했다. 임근용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방에 틀어박혀 책을 베껴 쓰고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순종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설령 곧 떠날 외숙모와 사촌 오라버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게 도리상 당연한 일일지라도 삼부인과 임근음이 지금 같은 상황에 어찌 그녀를 대신해 간청을 한단 말인가!
임근용은 새하얀 손을 놋대야에 넣고 무의식적으로 물을 건드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내 고훈(*古埙: 중국 고대 악기) 하나만 가져다가 예쁜 상자에 넣어서 근지한테 갖다 줘. 그리고 외숙모가 이번에 오시면서 나한테 최고급 용봉단차(龙凤团茶)를 가져다주셨는데 혼자만 즐기기 아쉬우니 와서 같이 한잔 하자고 해.”
차야 그냥 마셔 버리면 그만이니 그렇다 치지만 고훈은 그렇지 않았다.
여지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가씨, 그 고훈은 아가씨 보물이잖아요. 외숙께서 아가씨를 위해 백방으로 찾아서 열두 살 생일 선물로 주신 건데 이렇게 다섯째 아가씨에게 주시다니요. 그 아가씨를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건 좋은 물건을 낭비하는 거잖아요…….”
아가씨들은 모두 조금씩 우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금(琴) 연주, 바둑, 글씨, 그림, 원예, 조향, 다도 등등이 있었다.
임근용은 다도를 좋아했지만 유달리 구슬픈 소리를 내는 고훈을 부는 것도 좋아했다.
임근지는 원래 고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도순흠이 임근용에게 준 고훈을 보고 누군가 수수하면서도 우아하다고 말하는 걸 듣고 난 이후부터 어떻게 해서든 임근용에게서 그 고훈을 뺏어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임근지가 진심으로 고훈을 좋아하지도 않고, 고훈을 불 줄도 몰랐기 때문에 임근용은 절대 그녀에게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자진해서 그걸 바치게 될 줄이야!
임근용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나중에 방법을 생각해서 다시 찾아오면 돼. 외숙께서도 자초지종을 알면 실망하지 않으실 거야.”
임근지가 고훈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임근지에게도 이 신선함을 느껴볼 수 있게 해 줄 생각이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다른 귀중한 물건을 갖다 주고 다시 바꿔오면 그만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도씨 가문 모자를 만나는 것이다.
지금은 장남가에다 중간에서 중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지는 한숨을 내쉬고 벽에 기대있는 책장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자단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비단을 들어 올리니 소박하고 우아하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훈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아가씨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서 남겨두세요.”
임근용은 손가락으로 고훈을 가볍게 만졌다 다시 거두고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거나 괜찮아.”
전생에 이 고훈은 혼수로 육씨 가문에 가져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었다.
그날 육함은 그녀에게 고훈을 꺼내 연주하게 했다. 연주하며 잠시 가지고 놀다 보니 어느샌가 한 개가 사라져 버렸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육함은 마치 그녀가 일부러 그를 속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고훈이 날개가 있어서 날아갔나 보다며 비꼬았다. 그녀는 철저히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고 고훈의 행방은 결국 미궁에 빠졌다.
왜 또 옛날 일을 생각하는 거야? 임근용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여지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평소에 관찰했던 걸 토대로 임근용이 자주 연주하던 것 한 개를 빼놓았다. 그리고 작고 정교한 비단상자를 찾아 또 다른 고훈을 담았다. 여지는 우산을 쓰고 끊임없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푸른 돌이 깔린 길로 걸어갔다.
“아가씨, 정말 섭섭하시겠어요.”
옆에서 전부 보고 있던 계 마마가 말했다. 그녀는 은비녀로 도자기 상자에서 정성스럽게 조제한 향설 기름을 조금 떠내 임근용의 얼굴과 목, 손 등에 꼼꼼히 발라주고 그녀 대신 가볍게 문지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마마, 나 많이 큰 것 같지 않아?”
“아가씨가 많이 자라시긴 했지요.”
계 마마는 복잡한 표정으로 예쁜 얼굴로 애교 있게 웃고 있는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기만의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일이 있을 때도 예전처럼 자신과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여지를 끌고 가서 뒤에서 몰래 상의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은 여지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계원이 그 소갈머리 없는 계집애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아가씨에게 그 금은상자 열쇠를 달라고 물어보면 안 되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만약 계원이 자신의 딸만 아니었다면, 그녀도 아가씨에게 대갓집 아가씨들 중에 직접 열쇠 꾸러미를 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타일러 보겠지만, 자신의 친딸이라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가씨가 계원이라는 버릇없는 계집애를 이만큼이나 너그럽게 봐주고 참아주는 건 자신의 젖을 먹고 큰 아가씨가 최선을 다해 그녀의 체면을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욕심을 부리는 건 양심 없는 짓이었다.
계 마마는 하고 있던 일이 끝나자 바로 말했다.
“노비가 나가서 좀 확인해봐야겠어요. 계원이 이 계집애가 한참 전에 아침밥을 가지러 갔는데 어찌 이리 안 오는 건지, 아직 돌아온 걸 못 보셨지요?”
임근용은 미소를 지었고 계 마마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계 마마가 문발 아래 서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원이 우산을 받치고 찬합을 든 채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계원은 돌계단에 올라서서 먼저 물을 털고 우산을 두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신발의 물기를 깔개에 닦고 나서 계 마마를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아가씨랑 얘기해봤어요?”
계 마마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찬합을 건네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몰래 계원을 꼬집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너 입도 뻥끗 하지 마. 안 그러면 이 어미한테 몽둥이찜질 당할 줄 알아!”
계원은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감히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계원은 기분이 상해 침울해진 얼굴로 계 마마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계 마마와 함께 그릇과 젓가락을 놓으며 머리를 빼꼼 내밀어 안방을 엿보고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여지를 만났는데, 급히 어딜 가는 거예요?”
계 마마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임근용이 나오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근지한테 차를 마시자고 초대를 넣으라 했어. 오늘 저녁에 외숙모랑 저녁 먹으면서 작별 인사를 할까 해서.”
계원은 바로 입을 쭉 내밀었다. 전에는 심부름 값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은 전부 그녀가 했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점점 여지에게로 넘어가는 걸까?
계원의 얼굴에 또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계 마마가 재빨리 가볍게 기침을 했다.
“아가씨 손 닦으시게 얼른 뜨거운 손수건 드려!”
계 마마는 이렇게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나가 계원의 얼굴을 가리고 임근용이 보지 못하게 했다.
사실 임근용은 처음부터 두 모녀의 표정과 행동을 모두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밥 먹는 데만 집중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여지를 제외하고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 중에 누가 또 특별할까?
적어도 계 마마는 그녀에게 진심이었고 분수도 지킬 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지가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 돌아와 말했다.
“아가씨, 근지 아가씨께서 고훈을 받고 매우 기뻐하여 곧 오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런데 아가씨 방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짐을 싸고 있는 게 아마 어디 외출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한발 늦은 건 아니겠지요?”
“무슨 일인지 물어봤어?”
임근용이 창밖을 바라보니 가을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임씨 가문의 아가씨가 외출을 한다면 틀림없이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지가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대공자께서 동쪽 교외의 평제사(平济寺)로 단풍 구경을 가자면서 육씨 가문 남매를 초대하신 것 같아요. 신아가 이 사실을 숨기려는 것 같아서 아가씨께서는 도 부인과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시는 거라고 설명했어요.”
임근용은 여지가 이렇게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육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역시 이미 간파당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임근용은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추려는 듯 그녀를 가볍게 꼬집으며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괜히 놀라게 하고 있어!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분명 오겠구나!”
여지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듣자니 요 며칠 육함이 평주에서 몇 명의 유명한 문인 선비를 만난 후에 명성이 높아져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장남가는 넷째, 여섯째, 일곱째 아가씨가 모두 발이 묶인 틈을 타 온 힘을 다해 임옥진에게 부탁해 육씨 가문 남매를 초대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대공자가 나서서 육함에게 단풍을 구경하러 가자고 청했다. 육함이 가면 육운도 분명 그 기회를 틈타 따라 올 것이고 그럼 다섯째 아가씨도 자연스럽게 그 사촌 여동생을 대접한다는 핑계로 따갈 수 있었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다고 장남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옥진, 노부인, 그리고 노태야가 반대하지 않으니 아무도 감히 뭐라 할 수 없었다.
이부인 역시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아랫사람들에게 오만 성질을 부릴 뿐이었다.
분명 임근용이 서열상 앞 순위고 성격도 임근지보다 부드럽고 후덕하여 훨씬 출중했지만 노부인의 편애는 여전했다!
여지는 또 한숨이 나오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