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87
287화. 도움을 요청하다
육함이 갑자기 목을 가다듬고 정색하며 말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셋째 외숙모께서 네 새언니가 집안일 하느라 힘들어하는 게 마음 아프셔서 좀 쉬게 해 주려고 그러시는 거야.”
그는 아직도 온 가족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육운의 시선이 육함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임근용의 얼굴로 옮겨졌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셋째 외숙모께서 새언니를 많이 아끼시잖아요.”
임근용도 겸손을 떨지 않고 말했다.
“맞아요, 어머니께서 날 너무 아끼셔서 그런 것 같아요. 도리니 이해득실이니 따져대는 것보다 날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앞서셔서 그런 거겠죠.”
육함은 임근용을 슬쩍 보더니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육운의 집에 도착했다. 육운은 신이 났는지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두 사람에게 음식과 술을 권했다. 그녀는 육함과 어릴 적에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임근용은 한 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한쪽에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육함은 기분이 별로인지 분위기를 맞추듯 억지로 사슴포 두 개와 술 두 잔을 마시고 피곤하다며 일어났다.
육운이 아주 실망한 표정으로 임근용에게 들러붙었다.
“새언니, 새언니가 오라버니 좀 설득해 줘요. 겨우 이렇게 상을 차려서 모여 앉았는데 오라버니가 영 호응을 안 해 주네요. 이렇게 흥을 깨다니.”
임근용이 가만히 앉아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오라버니는 우리 집 가장이에요. 가장이 결정한 일을 내가 뭘 어쩌겠어요?”
육운이 또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육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정말로 더 이상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닌지 사과하며 말했다.
“아운아, 난 내일 할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 친구 댁에 가야 해. 너랑 네 새언니도 내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일을 해야 하잖아. 내가 다음에 날 잡아서 한턱낼게, 응?”
육운이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하면 가요. 나 그렇게까지 철없는 사람 아니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육함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오늘 왜 날 초대했는지, 왜 우는지 다 알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육운은 잠시 멍해졌다가 그가 이런 말을 한 걸 믿을 수 없는지 눈물로 흐릿해진 눈을 들고 육함을 바라보았다. 시녀들은 벌써 눈치껏 밖으로 나가 있었고 임근용도 괜히 눈에 띄어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그녀들을 따라 나가 문밖에 서 있었다.
안에서 육함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진작부터 너한테 말을 하고 싶었지만 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어. 하지만 이 일은 아무래도 너하고 한번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난 네 오라버니이고 우린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잖아. 때론 내가 너한테 해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절대 해 줄 수 없는 말들이 있어.”
육운은 소리를 억누르며 길게 흐느껴 울었다.
“네 새언니가 나한테 너 대신 할아버지께 가서 간청해 보라고 권했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할아버지 성격이 어떤지는 너도 잘 알잖아. 일단 뭔가를 결정하면 쉽게 바꾸시는 분이 아니야. 만약에 너한테 더 좋은 상대가 있는 거라면 나도 기꺼이 널 도왔을 거야. 하지만 너도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했다.
“금씨 가문과의 혼사는 그냥 받아들여. 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너한테 해가 될 일을 하시지는 않을 거야. 네 나이가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니지만, 진사 출신에, 능력 좋고, 집안 형편 좋고, 나이와 용모까지 너와 비슷한 젊고 재능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매년 과거에 응시하는 거자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지만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야. 그리고 합격자 대부분은 나이가 꽤 있어서 이미 혼인을 한 상태지.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꼭 너와 인연이 닿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몇 년 전처럼 네가 아직 어릴 때였다면 천천히 전도유망한 거자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다음번 합격할 진사를 찾으려면 내후년까지 기다려야 해. 그러면 넌 이미 19살이 되고, 그때 가서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 남자한테 제일 중요한 건 인품과 능력이야.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금진우 그 사람은…….”
육함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가 진지하게 쏟아 놓은 한 마디 한 마디는 육운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진실이었다. 임근용은 오래 서 있어서 시큰거리는 허리를 가볍게 펴고 조용히 육운이 화를 내기를 기다렸다.
“그만해요!”
역시나 육운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나같이 도리를 내세우며 똑같은 말을 해대는데 내가 말로 어떻게 당하겠어요. 내가 화가 나는 건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운명, 내 인생, 내 앞날을 다 다른 사람이 손에 쥐고 흔드는 거잖아요. 남이 그렇게 정하면 내가 꼭 그걸 따라야 하는 건가요? 그 사람이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라도 있대요?”
그러더니 소리를 억누르며 애간장이 녹는 듯 구슬프게 울었다.
사방은 눈이 내려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육운의 목소리가 아주 커서 시녀들의 귀에까지 다 들렸다. 주아와 간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뚝처럼 우뚝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지는 오히려 대담하게 임근용에게 눈짓을 했다. 육함이 육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지 않은가?
안은 잠시 침묵이 흘렀고 한참 후에 육함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신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도 나도 다 마찬가지야.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건 운명이지만 난 운명이 내 인생의 모든 걸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운명에 맞서 싸울 거야. 반드시 싸워서 이겨낼 거야. 네가 정말로 네 운명에 맞서 싸울 생각이 있고 그럴 용기가 있다면 누구도 널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우리가 널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이미 다 해 줬어.”
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육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볼게, 너도 잘 생각해 봐.”
육운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오라버니, 만약에 내가 단식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겠다고 하면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여지와 두아의 얼굴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간아와 주아가 눈을 들어 임근용을 몰래 훔쳐보았지만 임근용은 그저 조용히 거기에 서 있었다. 그건 뼛속 깊이 새겨져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임근용은 자신이 결국 육함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일을 잊어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헛된 바람일 뿐이지 않겠는가?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육함이 한 마디씩 힘주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지금 너무 상심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가 보구나.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지 마! 어르신들 귀에도 들어가게 하지 말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육함이 어두운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딱딱한 말투로 주아와 간아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은 아가씨를 잘 모시고 한시도 떨어지지 말거라. 만약에 너희 아가씨가 털끝 하나라도 상하면 너희들이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주아와 간아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대답한 뒤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군자는 소인의 잘못을 눈감아 준다고 하잖아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요! 내가 너무 상심해서 정신이 흐려졌었나 봐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오라버니는 내 가족이잖아요.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육운은 주아와 간아를 밀치고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와 육함의 소매를 꽉 잡은 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아무리 오만하게 잘난 척을 해대도 결국 16~7세의 소녀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처럼 일단 끊어져 버리고 나면 속수무책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육함도 더는 참기 힘든지 이를 악물고 냉담하게 말했다.
“난 지금까지 내가 했던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물론 널 버릴 생각도 없고. 하지만 지금 네가 너무 제멋대로 굴잖아!”
저렇게 무르게 굴다니 육운이 계속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 둘 생각인 건가?
임근용이 앞으로 나가 육운을 부축했다.
“아가씨, 그만 울어요. 할아버님과 어머님도 다 아가씨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오라버니도 입장이 난처해요.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자식 된 도리로 항상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야 해요. 그게 바로 효도인 거잖아요. 어르신들께서 우리한테 해가 될 일을 하시겠어요?”
육운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옛 원한과 새로운 원한이 한꺼번에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육함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육운은 임근용의 손목을 꽉 잡고 마치 모든 원망을 거기에 푸는 것처럼 손톱에 힘을 실어 임근용의 살갗을 세게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새언니, 제발 도와줘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오라버니를 좀 설득해 줘요. 할아버지께서 오라버니를 가장 아끼시고 오라버니 부탁은 잘 들어 주시잖아요. 오라버니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도와주겠어요?”
사실 임근용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육운을 보면서 자신이 혼사를 거부했던 그 겨울이 떠올랐다. 하지만 손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이 이것이 육운의 인생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육함의 말대로 정말로 싫다면 투쟁할 수도, 가서 빌어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심지어 육 노태야 앞에 가서 울며 빌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육운은 그저 여기에서 육함에게 화를 내고, 임근용의 과거를 들추고, 그녀의 손목을 꼬집고,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며느리인 그녀에게 울면서 부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무엇하러 도와준단 말인가? 임근용이 말했다.
“아가씨, 미안해요. 나도 정말 아가씨를 도와줄 방법이 없어요…….”
육운이 꼬집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주자 임근용은 이쯤이면 됐다 싶어 아픈 내색을 했다.
“아가씨, 이 손 놔요, 아파요.”
육운이 얼른 손을 놓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육함을 바라보고 뭔가 말을 하려는데 여지가 얼른 달려와 임근용의 손목에 등불을 비췄다. 임근용의 새하얀 살갗은 꼬집혀서 피부가 벗겨졌고, 손가락 자국 또한 선명하게 남아 나중에 분명히 멍이 들 것 같았다. 여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소매를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왜 울어? 울지 마.”
육함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을 열려는데 육운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새언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간아야, 빨리 가서 약 좀 가져 와…….”
임근용이 담담하게 웃었다.
“필요 없어요, 아가씨는 그만 쉬어요. 난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육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문으로 걸어간 다음 고개를 돌리고 육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내가 일부러 아가씨를 안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나도 방법이 없는 것뿐이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손찌검하지 말아요.”
그리고는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을 맞으며 밖으로 나갔다.
여지와 두아는 분노한 눈빛으로 육운을 한 번 보고 우산과 등롱을 든 채 임근용의 뒤를 쫓았다. 육함이 급히 간아에게 지시했다.
“너희 아가씨가 말을 안 들으면 대부인께 가서 말씀드려.”
그는 이 말을 끝내고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육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보라 속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