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단사(丹砂) (2)
계원은 아직 잔꾀를 부리는 기질이 남아 있긴 했지만 오만함은 거의 사라져 이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꿇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비가 법도도 모르고 설쳤어요, 벌을 내려 주세요.”
임근용은 말없이 탕약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두아에게 지시했다.
“손 씻게 물 좀 가져와.”
두아가 얼른 하던 일을 내려놓고 밖에서 시중을 드는 어린 시녀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직접 물 온도를 확인해 보고 임근용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손을 씻는 걸 도왔다. 임근용은 손을 깨끗이 씻고 나서야 아직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계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흑목 상자에 들어있는 내 고훈을 좀 가져와.”
“네.”
계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손을 씻은 뒤 상자를 열었다. 두아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웃는 얼굴로 떠보듯 말했다.
“아가씨, 노비가 향을 피울까요?”
임근용이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열었다. 창밖은 고요했고 반달이 밝은 빛을 내뿜으며 하늘에 걸려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느릅나무 가지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바닥까지 떨어져 땅바닥은 마치 서리가 내린 것처럼 보였다. 공기는 차갑지만 아주 맑아 그야말로 청풍명월의 밤이었다.
두아가 향을 피우며 말했다.
“역시 여지 언니는 세심하다니까요. 언니가 이 고훈을 챙길 때, 노비는 그걸 뭐 하러 챙기느냐고 했었거든요. 아가씨께서 친정에 몸조리를 하러 가시는 거고 부인들과 이야기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고훈을 불 시간이 어디 있기나 하겠느냐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여지 언니는 사람이 오히려 한가해지면 그 한가함을 누리고 싶어지는 법이라 아가씨께서도 한가하고 심심해지면 불고 싶어하실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께서 이렇게 찾으시네요.”
두아는 평소에 아주 성실하고 말도 적은 아이였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짜내 이런 말을 생각해내느라 괴로울 것이다. 임근용은 그녀의 호의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랫동안 안 불었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잘 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두아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틀림없이 잘 부실 거예요. 첫 곡은 조금 적응이 필요할지 몰라도 그다음부터는 잘 부실 거예요.”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계원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고훈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고훈을 부드러운 비단으로 닦아 입술에 갖다 댄 뒤 살짝 눈을 감고 고훈을 불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친정이 좋았다. 도씨가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도씨가 있는 곳에서 임근용은 사랑받는 딸일 수 있었다. 여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여유롭고 우아한 정취를 즐기지 않는 건 아깝지 않은가. 고훈을 불면 기분이 좀 풀릴 것이다.
* * *
임역지는 육함과 함께 청도거에서 나왔다.
“매부, 그 희귀본은 대체 어디에서 찾은 거야? 보니까 할아버지께서 백 년 묵은 산삼 두 상자를 받으셨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뻐하시던데.”
육함이 빙긋 웃었다.
“사실 몇 년 전에 구해서 보관하고 있던 장서예요.”
임역지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알아내 자기도 몇 권 사다가 임 노태야에게 선물하고 환심을 사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육함의 대답을 듣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가 무언가 다른 화젯거리를 찾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육함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조용히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임역지는 얼른 입을 다물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줄기 바람을 타고 고훈의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시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서 마치 하얀 달빛과 같은 아름다운 고훈의 소리가 들렸다.
육함은 고개를 살짝 들고 조용히 고훈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육함은 몸은 주변의 대나무, 소나무와 함께 달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의 우아한 풍격이 마치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임역지는 미인은 등불 아래에서 보고, 남자는 달빛 아래에서 봐야 한다더니 역시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육함의 자태에 감탄했다. 임역지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넷째가 부는 걸 거야. 집안 식구들 중에서 저걸 불 줄 아는 사람은 넷째밖에 없거든.”
육함은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음악을 듣는 것만 해도 아주 우아한 일인데 하물며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그의 부인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임역지 역시 풍아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닌지라 그를 방해하지 않고 한쪽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고훈의 소리가 멈췄고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육함이 정신을 차리고 미소 지으며 미안해했다.
“괜히 나랑 여기 서서 한참 찬바람을 맞았네요.”
임역지가 얼른 답례하며 살짝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넷째가 아직 잠자리에 든 것 같지 않은데, 혹시 매부가 무슨 전할 말이라도 있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전해 줄게.”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밤이 깊었는데 괜히 사람이 들락날락하면 단잠을 깨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
임역지도 처음부터 농담으로 했던 말인지라 이 말을 듣고 그저 웃으며 그를 대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육함이 말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시중을 드는 장수와 어린 시동에게 당부를 몇 마디 한 뒤 그들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육함이 채찍을 휘둘러 말을 때리려고 하는데 또 그 고훈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갑자기 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육함은 말 위에서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가 장수와 시종들에게 말했다.
“가자.”
* * *
날이 밝기도 전에 눈을 뜬 임근용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어제 도씨가 했던 당부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왔으니 마음 놓고 푹 쉬어. 다들 네가 쉬러 온 걸 알고 있으니 너한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괜히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올 필요 없으니까 자고 싶을 때까지 자면서 편하게 쉬다가 오고 싶을 때 와.”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뒤척이다가 이불을 안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자다가 류아가 물총새의 깃털로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크게 재채기를 하며 잠에서 깼다. 도씨가 아이를 아주 엄격하게 교육하고 있긴 했지만 아이의 본성까지 구속하지는 않았다. 류아는 임근용이 재채기를 하며 깨어나는 것을 보고 킥킥 웃더니 침상 밑으로 내려가 물총새 깃털을 등 뒤로 숨겼다.
“자면서도 재채기를 하다니, 언니는 정말 이상해요.”
임근용은 산발이 된 머리로 일어나 앉으며 그녀를 잡으려 했다.
“요 못된 계집애, 네가 그런 거 모를 줄 알아?!”
류아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더니 유계의 뒤에 숨었다. 그녀는 머리를 빼꼼 내밀며 자기는 무고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넷째 언니, 사실 숙모께서 언니를 깨워서 약을 먹이라고 했어요. 언니, 약 먹어요.”
그녀는 임근용이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넷째 언니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어른이면서 이렇게까지 늦잠을 자다니.”
임근용이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두아가 바친 탕약을 받아들고 일부러 말했다.
“이 많은 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마시라고? 류아야, 와서 두 모금만 마셔 줘.”
류아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안 먹을래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임근용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난 숙모님께 보고 드리러 가야 해서 언니랑 같이 있기 힘들 것 같아요.”
류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쏜살같이 달아났다.
* * *
임근용은 약을 다 먹고 도씨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먹은 뒤 그녀에게 갔다.
도씨가 그녀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혈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그렇게 빠를 리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임신을 한 뒤 배짱이 좀 생기고 성격도 명랑해진 평씨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친정에 와서 친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 편히 잘 먹고 잘 자니 혈색이 좋아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임근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새언니, 제 방을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 같지 않게 방이 따뜻하고 산뜻해서 아주 편하고 좋아요.”
“당연한 일인걸요.”
평씨가 수줍게 웃으며 답례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씨가 얼른 시녀들에게 부축하라고 하며 꾸짖었다.
“넌 임신한 몸이잖니, 큰 올케인 네가 근용이를 위해서 고생을 했으니 근용이가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넌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어서 앉아.”
임근용이 평씨를 부축하며 말석에 앉히자 평씨가 또 입을 열었다.
“오소야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매부가 할아버님과 할머님께 오래된 산삼을 선물하고 청도거에서 할아버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하더라고요. 청도거에서 나올 때 마침 아가씨가 고훈을 부는 소리를 들었는데, 추운데도 미동도 없이 서서 한참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대요.”
도씨가 살짝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정말 그랬다더냐? 아침에 다섯째가 문안하러 왔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던데.”
도씨는 육함이 그러는 걸 보면 이 어린 부부가 서로 애정이 넘치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임근용을 보며 물었다.
“설마 사위가 네 고훈 부는 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겠지?”
“그냥 갑자기 흥이 났나 보죠.”
임근용은 잠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나가서 가게를 좀 둘러보고 싶어요.”
도씨가 화를 냈다.
“아주 사서 고생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구나? 겨우 반나절밖에 안 쉬고 또 무슨 가게를 둘러보겠다는 게야? 세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관리할까, 대체 뭐가 못 미더워서 그래?”
임근용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류아에게 눈짓했다. 류아가 앞으로 나가 도씨의 허벅지를 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숙모님, 류아가 오라버니를 보러 가고 싶어서 그래요.”
도씨는 아이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지 당연히 잘 알고 있었지만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시중들 사람과 마치를 준비해 줄 테니까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와. 내일은 또 평제사에 가야 해서 일찍 일어나야 해.”
임근용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너울을 쓴 다음 류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 * *
임세전은 가게에 있지 않았다. 임근용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임세전이 반년 전쯤에 고용한 젊은 관리인이었다. 그의 성은 묘(卯)였고 이름은 중(仲)이었다. 나이는 22~23 정도 되어 보였는데 붉은 얼굴에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웃음 띤 얼굴이 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친절하고 세심하게 그녀를 뒤에 있는 방으로 안내한 다음 직접 뜨거운 차와 과일을 내오며 임세전의 행방을 말했다.
“셋째 공자께서는 이렇게 주인께서 오실 줄 모르고 찻집에 가셨습니다. 소인이 공자를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임세전이 간 찻집은 임근용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남북을 오가는 행상들이 모여 있는 길가의 일반적인 찻집이었다. 정보를 모으고 행상들과 친분을 쌓으려면 그런 곳으로 가야 했다. 임근용이 묘중을 저지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좀 둘러보러 온 것뿐이야. 그동안 너무 바빠서 셋째 오라버니랑 장사가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할 틈도 없었어. 네가 아는 대로 전부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