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21
321화. 흩날리는 눈
육 노태야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집의 가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나라면 절대 그런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의 가주가 편애를 할 수도 있고, 집안의 평화를 중시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백한 사람이 박해를 받아 이유 없이 죽는 걸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느냐. 그 여자는 아직 시도도 해보지 않았으면서 어찌 그리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게냐? 세상이 무섭다지만 그래도 도리라는 건 있는 법이야.”
임근용은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비록 전생의 그녀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었지만, 그녀가 육씨 가문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이 집안 사람들 중에서 임근용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여 준 사람은 오직 육륜뿐이었고,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설사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전혀 도와주지도 않고 냉담하게 방관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임근용이 그들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임근용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임근용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경쾌하게 말했다.
“할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늘의 도리는 명백한 법이지요. 누군가가 악행을 저지르는 걸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해치는 걸 방임한다면, 설령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 악행의 절반은 방임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그 여자에게 가서 시댁을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겠습니다.”
육 노태야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근용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고 작별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막 뒤돌아 나가려는데 육 노태야가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기침을 하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임근용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다 뒤를 돌아 육 노태야가 기침을 하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알게 된 후부터 임근용의 가슴속에는 늘 원한,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이 맴돌았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때로는 너무 화가 나 육씨 가문에서 그녀에게 해코지를 했던 사람 하나하나가 전부 괴롭게 살길 빌기도 했다. 하지만 육 노태야가 임근용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임근용은 황급히 되돌아가 육 노태야를 부축하고, 그의 등을 힘껏 쓸어내렸다. 그녀는 뜨거운 차를 건네주며 진심을 다해 그를 위로했다. 임근용은 육 노태야의 기침이 멎고 숨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의원을 불러올까요?”
육 노태야는 그녀가 건네준 잔을 꼭 쥐고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은 부를 필요 없다, 둘째 손자가 돌아오면 나한테 들르라고 해라.”
임근용은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육 노태야가 있는 여기에서 그녀가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할 수 있는 일도 다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밖에는 어느새 함박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하늘가에 한줄기 햇빛이 비치며 마침 임근용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녀가 실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두꺼운 구름 사이에 뚫린 구멍 사이로 햇빛이 거침없이 내리꽂혀 사방에 싸늘한 흰 빛이 반짝였다.
“눈 내리는 기세를 보니, 이번 폭설은 며칠은 기다려야 그치겠소.”
육함은 복도에 서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송이가 끊임없이 처마 밑으로 날아 들어와 육함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졌고 조금씩 쌓이며 영롱한 빛을 반짝였다. 그 역시 굳이 눈을 털어내지 않고 쌓이게 내버려두었다. 쌓인 눈에서 반사된 빛이 육함의 얼굴을 비춰 그의 흰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빛났고 그의 눈동자는 그와 대비되어 마치 흑옥처럼 까맣게 빛났다.
“아용, 아무도 당신을 믿어 주지 않아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은 앞으로 영원히 없을 거요.”
“다 들었어요?”
흩날리던 눈송이가 마침 임근용의 속눈썹 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털어내기도 전에 그 눈은 녹아서 투명한 물방울로 변했다. 임근용이 가볍게 눈을 깜빡이자 물방울은 마치 차가운 눈물처럼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육함이 손가락을 뻗어 물방울 가볍게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영경거로 가 보시오, 다섯째가 당신 주려고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며 와서 보라고 했소.”
임근용은 이미 그에게서 한참 멀어졌음에도 코끝에 아직도 육함에게서 나는 묵향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옷깃을 여몄다. 그가 앞으로 그런 일이 영원히 없을 거라고 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 * *
영경거는 육함의 말처럼 그렇게 즐겁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육륜과 육선 두 사람이 육 노부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육선은 갈 때보다 머리 반 정도가 더 컸고 몸도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그는 임근용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육륜처럼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예의를 지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무래도 모직 사건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육 노부인은 기운 없는 모습으로 억지로 웃고 있었다.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기분 좋은 척하는 육륜의 눈빛에도 걱정이 보였다.
“둘째 형수, 이것 좀 봐요, 다 내가 태명부에서 사온 물건들이에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골라 가요.”
육륜이 낮은 탁자 위에 놓인 군것질거리, 인형, 붓, 장난감, 장신구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샀어요. 어제랑 그제는 바빠서 주러 올 시간이 없었고 오늘에야 시간이 좀 났네요.”
임근용이 앞으로 나가 아무거나 몇 가지를 골랐고 한쪽에서 보고 있던 육 노부인이 말했다.
“아용, 아까는 어딜 다녀온 게냐?”
임근용이 막 대답하려는데 시녀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 아가씨 안녕하세요.”
곧이어 육운이 찬바람을 머금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임근용을 있는 힘껏 노려보더니 뒤돌아 육 노부인에게 안부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 천진난만한 척하며 임근용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언니, 주아를 어디다 숨겼어요?”
임근용이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 아이가 날 건드렸어요.”
육운은 얼굴색이 확 변하더니 갑자기 불쾌해하며 말했다.
“정말 간도 크네요! 새언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내가 그 아이를 가르치면 되는데요!”
그녀 수하의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녀가 스스로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말도 없이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근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복잡해서 아가씨한테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었어요. 이 일은 아가씨 오라버니도 알고 있는 일이고, 오라버니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 이따가 아가씨 오라버니가 와서 자세하게 말할 거예요.”
임근용은 이렇게 말하고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육륜에게 태명부에서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육운은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사람들 앞에서 단아하고 온화한 아가씨라는 인상을 깨 버릴 수는 없어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런데 바깥에서 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려씨가 원랑과 호랑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세 모자가 육 노부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려씨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할머님, 제발 이번 한 번만 대소야를 용서해 주세요. 날씨가 추워서 땅이 얼어붙을 지경인데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더는 버티기 힘들 거예요!”
“증조할머니, 제발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제 아버지께서도 잘못을 깨달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조금 철이 든 원랑이 자기 어머니를 따라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호랑은 입을 벌리고 아버지를 찾으며 큰 소리로 울었다.
육 노부인이 괴로운 듯 이마를 짚고 신음하며 말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이러지들 말고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말을 해. 큰 손자가 뭐가 어쨌다는 게냐?”
려씨가 한 손으로는 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짚으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님, 대소야도 모직 사건 때문에 진심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심신이 극도로 피로한 상태에서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사당에서 하룻밤 내내 무릎을 꿇는 바람에 지금은 기절했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효도를 게을리하지 않은 대소야와 우리 원랑이, 호랑이, 그리고 손자며느리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 할머님께서 할아버님께 대소야가 의원의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육경이 조용히 앞으로 나가더니 육륜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할머니, 큰형도 일부러 잘못을 저지르려고 그런 게 아니니 무슨 잘못을 했는지만 깨달으면 되잖아요. 앞으로는 절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거예요. 곧 명절도 보내야 하는데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께 그만 용서해달라고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육선도 그를 따라 입을 열었고, 상황을 보고 있던 육운도 일어나 사정했다. 온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사정하는 가운데 임근용은 군계일학처럼 우뚝 서서 홀로 사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로써 그녀는 차남가와 완전히 등을 돌린 셈이었다. 임근용은 외부인들 앞에서는 몰라도 이 사람들 앞에서는 굳이 굽히고 싶지 않았다.
“큰 형님, 몸을 생각하셔야지요. 큰 형님 몸은 둘째 친다 하더라도 배 속의 아이는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바닥이 차서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면 아이한테 좋지 않을 거예요.”
사 마마가 앞으로 나가 려씨를 부축하며 말했다.
“대소부인, 하실 말씀이 있으면 잘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몸을 상하게 하는 것도 죄 아니겠어요? 노부인께서는 손자를 아주 아끼는 분이시잖아요. 앉아서 천천히 말씀하셔도 어차피 똑같아요.”
하지만 려씨는 고집을 부리며 일어나려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렸다.
“새해가 다가오는데 대소야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 모자도 평안하게 보낼 수 없을 거예요. 할머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려씨가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자 육 노부인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국가에는 국법이 있고, 집안에는 가규가 있는 법이다. 손자가 잘못을 저질러서 너희 할아버지께서 벌을 주셨고, 그 아이에게 무슨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 설령 손자가 병이 났더라도 와서 좋게 말을 해야지, 집에서 의원을 불러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와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건 날 협박하려는 속셈인 게냐? 이제 곧 새해가 다가오는데 불길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
“큰 손자며느리가 임신 중이라 사려 깊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여봐라,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 난로를 쬐게 하고 과일을 좀 먹이거라.”
문발이 들리며 육함이 육 노태야를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육 노태야는 눈으로 천천히 여러 사람들을 훑으며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위엄을 충분히 드러냈다.
일찍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려씨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육 노태야를 한 번 보고, 육함을 보고, 육경을 본 뒤 마지막으로 임근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임근용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두 눈을 얼음처럼 차갑게 빛냈다. 려씨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랑을 껴안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더니 다시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배가 아파요.”
호랑과 원랑은 깜짝 놀라 그녀를 안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영경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누군가는 위로하고, 누군가는 부축하고, 누군가는 그들을 부축해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