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시도 (4)
임근음은 묵묵히 손수건을 받고 눈가를 닦으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결국 임근용에게 확답을 주지 않고 옆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여지와 계원에게 담담하게 분부했다.
“넷째 아가씨를 모셔가거라.”
임근용은 아무도 그녀를 믿어 주지 않아 아주 실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언니, 조심히 가. 난 안락거(安乐居)에 가서 할머니께서 주무시는지 봐야겠어. 외숙모와 사촌 오라버니한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면이 좀 서게 됐어.”
임근음은 또 자극을 받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가장 믿는 측근 시녀 비파(枇杷)에게 지시했다.
“네가 가서 좀 알아봐, 그날 청도거에 왔던 외부인이 누구인지.”
비파는 하늘을 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제 와서 뭘 알아볼 수 있겠어요? 제가 볼 땐 한 마디도 함부로 하지 않는 걸 보니 넷째 아가씨께서 진심이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원래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그분이 이러는 건 처음이잖아요. 넷째 아가씨가 모처럼 언니한테 부탁을 하는데 자매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아가씨께서…….”
임근음은 외숙모와 사촌 오라버니가 떠나고 나면 도씨가 노부인에게 대든 일에 대한 후폭풍이 분명히 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철없는 임근용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임근음은 아주 심란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용이가 너무 이상하게 굴어서 내가 마음을 더 못 놓겠어.”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며 왔다 갔다 하다 멈춰 서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됐다, 됐어. 동생이 모처럼 언니한테 부탁을 했잖아. 돈도 한낱 물건인데 동생이 원한다면 줘야지. 만약 잘되면 우리 복이고, 잘 안 돼도 근용이가 이 일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된 거야!”
두 사람은 한참을 묵묵히 걸었다. 임근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파야, 난 넷째가 요즘 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네가 보기엔 어때?”
비파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는 한참 후에 말했다.
“어르신들 말을 들어보면 사람이 너무 놀라면 성격이 변할 수도 있대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임근음은 한숨을 쉬고 눈살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
“그래, 네가 물건을 챙겨서 보내.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 * *
임근용 역시 임 노부인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녀가 응대해야 할 손님이 또 하나 있는데 그 손님이 정말 덫에 빠져 줄까?
안락거는 이미 불이 꺼져 어두웠고 등롱 한 개만이 문 꼭대기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임근용은 노부인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해 여지에게 청리를 찾아오라 지시했다. 그녀는 안락거 문 앞에서 청리를 만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녀는 청리에게 자신이 노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예의를 다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청리는 옆에 서서 임근용이 단정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깊었고 비도 오니 넷째 아가씨는 어서 돌아가세요. 아가씨의 효심은 제가 내일 아침 일찍 노부인에게 전해 드릴게요.”
임근용이 고개를 들고 청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청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지만 임씨 집안에서 청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건 그녀가 인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일부러 여지에게 청리를 찾아오게 해 자신의 효심과 복종하는 마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역시 청리의 눈에 연민이 보였다. 아주 깊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짜로 꾸며낸 감정은 아니었다.
사람은 마음이 있는 존재고 그 마음을 좋은 방향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임근용이 감동하며 말했다.
“청리 언니 고마워요.”
청리는 황송해하며 임근용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막 숙직용 작은 평상에 앉으려는데 노부인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였느냐?”
청리가 얼른 온수를 한 잔 따라 들고 침대에 누워있는 임 노부인을 향해 다가가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넷째 아가씨였어요. 도씨 가문 외숙 부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노부인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었어요. 노부인께서 주무신다 했더니 입구에서 인사만 하고 돌아갔어요.”
노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벽쪽으로 돌아누워 있어 청리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청리가 탐색하며 말했다.
“노부인, 물 드시겠어요?”
“됐다.”
노부인은 그제야 천천히,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 아이 눈에 이 할미가 보이긴 하나 보구나.”
청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보니 노부인은 줄곧 임근용이 감사 인사를 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넷째 아가씨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노부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하더라도 그녀의 잘못을 쉽게 용서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란 이렇게 자존심을 부리길 좋아하는 존재였다.
* * *
임근용이 자신의 작은 정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연달아 두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왔다.
첫 번째는 임근음을 모시는 비파였다.
비파는 임근용이 언니에게 부탁했던 금은괴 한 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계 마마와 다른 사람들의 격려에 힘입어 임근음이 했던 말을 전했다.
“셋째 아가씨께서 넷째 아가씨가 이런 일을 하시는 걸 찬성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재물은 그저 재물일 뿐이고 아가씨는 셋째 아가씨의 유일한 친 여동생이시니 아가씨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잘되면 좋고, 잘 안 되더라도 넷째 아가씨께서 거기서 교훈을 얻으면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실패할 리가 있나? 역시 근음 언니같이 진중한 사람한테는 좀 징징대야 된다니까.’
임근용은 웃으며 임근음의 잔소리를 흘려 넘기고 금은괴가 든 상자를 건네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직접 비파에게 심부름 값을 주었다.
비파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
“노비는 노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가씨께서 상을 주시고 싶으시면 나중에 돈을 벌고 나서 상을 주세요. 그때는 사양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임근용에게 일깨워 주려는 듯 호의를 담아 말했다.
“셋째 아가씨께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일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쓸데없이 참견만 하려들 테니까요.”
‘당연하지! 이 아이는 한결같이 사람을 잘 돌보고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정말 보배 같은 아이야. 어쩐지 나중에 도씨 가문의 집안일을 관리하는 시녀가 되더라니.’
임근용은 웃으며 여지에게 비파를 배웅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등불 아래서 먹을 갈아 종이에 도봉당에게 건네 줄 금과 은이 얼마인지를 적어 내려갔다.
임근용이 방금 했던 일을 모르는 계 마마와 계원은 그녀가 한밤중에 먹을 갈고 글씨를 쓰자 의아해했다.
“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계원은 너무 궁금해서 마치 작은 발톱이 가슴을 살살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셋째 아가씨와 넷째 아가씨는 방금 말다툼을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또 이런 상자를 보낸 거지? 그리고 비파는 왜 또 저리 비밀스럽게 구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지?
임근용이 가볍게 웃었다.
“내가 큰 사촌 오라버니에게 각장에서 신기한 장난감을 몇 개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지금 그 목록을 쓰는 중이야.”
그녀들은 둘 다 글자를 몰라 속이기도 쉬웠다.
계원도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 상자 안의 물건은 아마도 셋째 아가씨가 도 사촌 오라버니에게 주는 물건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저 입 밖으로 내기가 쑥스러워서 넷째 아가씨의 손을 빌리려는 것 아니겠는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임근용이 이제 막 목록 작성을 다 했는데 여지가 이상한 표정으로 들어와 말했다.
“아가씨, 아까 임 삼노야께 인사를 드릴 때 아가씨께서 주머니를 떨어뜨리고 가셨다면서 황 이낭이 직접 들고 왔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황 이낭이 시녀를 대동하고 몰래 뭘 하러 온 걸까.
예전에는 황 이낭도 이런 식으로 인정을 베풀며 체면 세우기를 좋아했지만, 임근용은 여태껏 그녀와 쉽게 접촉하지도, 그런 인정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계 마마가 예전에 했던 습관대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걱정 말고 쉬고 계세요. 제가 나가서 황 이낭을 모실게요.”
임근용이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낭이 좋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홀대해서야 되겠어? 들어와서 차나 한잔 마시라고 해.”
계 마마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임근용은 벌써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임근용이 웃음을 머금고 복도로 나가 자신을 등진 채 천장에 걸려 있는 꺼진 풍등을 응시하고 있는 황 이낭을 맞이했다.
“이낭, 주머니가 무슨 금 덩어리라도 돼? 밤이 깊었고 비가 와서 날도 추운데 아무나 시켜서 가져다주든지 다음에 만나서 줘도 되었을 것을. 어서 들어와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몸을 좀 녹여.”
임근용의 시선이 황 이낭을 모시는 시녀 조아(枣儿)의 손에 들려 있는 두 개 층의 검은색 찬합에 가 꽂혔다.
황 이낭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임근용의 시선을 따라 검은색 찬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다정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삼노야께서 계화완자(桂花丸子)를 드시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밤이 깊고 날도 차서 다들 따뜻하게 한 그릇씩 먹고 자면 좋을 것 같길래 좀 많이 만들었어요. 삼부인, 셋째 아가씨, 오공자에게 보냈고 칠공자는 나이가 어려서 소화를 못 시킬 것 같아 안 보냈어요. 넷째 아가씨는 집이 멀기도 하고 사람을 시켜 보내는 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직접 왔어요.”
“고마워, 이낭.”
임근용은 그녀에게 반절하고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황 이낭을 창가에 있는 평상에 앉히고 여지에게 따뜻한 차를 올리라 지시했다.
계원이 조아의 손에 들린 찬합을 받으려 하는데 조아가 흠칫 하더니 황 이낭을 힐끗 쳐다보고 낭랑한 목소리로 조소하며 말했다.
“모처럼 제가 넷째 아가씨를 모실 기회를 얻었는데 제 기회를 뺏지 마세요.”
계원은 화가 치밀었다. 주인이나 노비나 전부 파렴치하기 짝이 없었다. 뻔뻔한 낯짝으로 콧대를 쳐들고 다니면서 주인이란 사람은 남자를 뺏고 그 종년은 아가씨를 뺏으려 했다. 이게 다 뭐 하는 짓들이람!
그녀가 조아에게 한 소리 하려는데 임근용이 말했다.
“계원아, 이낭이 모처럼 여기 왔잖니. 아까 우리 연근떡이 좀 남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가서 좀 데워다가 이낭에게 갖다 줘.”
임근용은 보아하니 그 주머니와 이 계화완자는 전부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두 층의 찬합 아래층에 뭐가 들어있는 걸까? 황 이낭에게 기회를 좀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계원은 화가 났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예의를 차리고 물러갔다. 임근용이 또 계 마마를 불렀다.
“마마, 가서 뜨거운 물 좀 준비해 줘. 아까 찬바람을 쐬고 비를 맞았더니 으슬으슬 추워서 목욕을 해야겠어.”
“예.”
계 마마는 의기소침한 눈빛으로 옆에 서 있는 여지를 한 번 보더니 조용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