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30
330화. 무더운 여름 (2)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천천히 정원을 걸었고, 두 사람을 따르는 하인들도 없었다. 육함은 가는 길에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고, 의원을 만나는 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원에서 임신지와 있었던 사소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고 임근용도 가만히 듣다가 가끔씩 그에게 집안에서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청설각에 도착한 뒤 육함은 위층 창문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임근용은 그를 대신해 촛불을 켜고, 뜨거운 차를 타 준 뒤, 책을 찾아 부채를 들고 한쪽에 앉아서 멍하니 책을 들여다보았다.
육함은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다 임근용이 아주 지루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몇 번이나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삼키고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
임근용은 육함이 책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앵두와 쌍전이 거기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녀들은 등롱을 옆에 두고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온갖 모양이 다 나왔다. 임근용이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한바탕 소란스럽게 무언가 땅으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촛대가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고 육함은 손에 책을 들고 멍하니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어머, 무슨 일이에요?”
임근용은 촛불이 바닥 깔개를 태울까 봐 얼른 가서 촛대부터 주워들었다.
“촛대가 왜 땅에 떨어졌어요?”
육함이 눈을 내리깔았다.
“나방이 귀찮게 날아다녀서.”
임근용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손에 들린 책에 역시나 뭉그러진 나방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구역질 난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더러워 죽겠네. 빨리 닦아요.”
육함이 말했다.
“어떻게 닦지? 깨끗이 닦기는 힘들 것 같소만.”
“일단 종이로 좀 닦아요. 그런 다음에 다시 젖은 천으로 닦아 봐요.”
임근용이 종이를 찾아 건네자 육함이 손을 뻗어 받았다. 두 사람의 손끝이 스치는 순간 임근용은 그의 손끝이 차가운 데다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왜 그래요? 혹시 어디 아파요?”
“아무렇지도 않소.”
육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종이를 받아 책을 꼼꼼히 닦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마침내 책이 깨끗해졌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용, 당신 월경이 언제요?”
임근용이 잠시 멍해졌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왜 물어요?”
육함이 말했다.
“그냥 묻는 거지, 부부끼리 못 물어볼 게 뭐가 있겠소?”
일 년이 넘게 부부로 지냈는데 아직까지도 육함이 그 날짜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굳이 묻고 있었다. 임근용의 심장이 북을 치는 것처럼 뛰었다.
“며칠 전에 끝났어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매월 초엿새였던 것 같은데?”
육함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듣자 하니, 아이가 들어서는 건 동침하는 날짜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군, 오늘이 16일이니 바로 그 날이오.”
육함이 남의 말을 듣는다 라, 임근용은 그가 오늘 그녀에게 했던 말이 전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육함이 이 일에 신경을 쓴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평상시의 그는 그저 그녀를 달래기만 했을 뿐 자발적으로 먼저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꾸 이 주제를 꺼내는 걸까?
임근용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민행이 이번에 집에 와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나 봐요.”
육함의 속눈썹이 꿈틀하더니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는 잠깐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집안에서 자꾸 재촉을 해대서 당신도 마음고생이 심하지 않소. 그냥 한가할 때 좀 알아봤소. 만약에…… 효과가 있으면 좋은 것 아니오.”
임근용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자상하네요.”
“당신은 내 부인이지 않소.”
육함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책상 위의 책과 종이, 먹 등을 정리했다.
임근용은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그냥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만 갑시다.”
육함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불어 껐다.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워져 손을 뻗어도 자기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임근용은 가만히 선 채 눈이 어둠에 적응하길 기다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길을 비추려면 어쨌든 등불 하나는 남겨둬야 하잖아요.”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육함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는 임근용의 폐 안의 공기가 거의 다 빠져나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를 꽉 안았다. 육함의 행동은 아주 격렬했지만 그 이외의 다른 기척은 전혀 없었다. 너무도 당황한 임근용은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민행…….”
임근용의 목소리는 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그녀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어라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임근용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이라 육함을 계속 밀어냈지만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녀가 육함의 입술을 세차게 깨물자 입과 혀가 느껴졌다. 하지만 육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점점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가 또 한 번 힘껏 물어뜯자 피비린내가 점점 더 진해졌다.
임근용이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그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자 그제 서야 육함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창밖에서 흔들리던 등롱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와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밝혔다. 임근용은 숨을 고르며 눈을 들어 육함을 바라보았다. 육함은 한쪽에 그녀를 마주보고 서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지만, 그에게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쪽에 놓여 있던 의자를 짚고 앉았다. 그냥 그렇게 해 주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면 편해지지 않겠는가. 어차피 전생에서도 충분히 경험해본 일들이었다. 임근용은 현재의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다.
육함은 마치 그대로 계속 서 있을 작정인 듯 한참 동안 거기에 서 있었다. 임근용은 목청을 가다듬고 옷을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애쓰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봐야겠어요. 공부를 더 할 생각이면 불을 켜요. 이러고 서서 뭐 하는 거람?”
육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소.”
그의 잠긴 목소리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한테 물어볼 것과 해야 할 말이 있소. 당신도 솔직하게 말해 줘요.”
“알았어요.”
임근용은 육함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필사적으로 분노를 참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방금 전에 육함이 움켜쥐었던 손목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두려움이 밀려왔다.
“얼마 전에 육소 형님이 나한테 상자를 하나 주었소. 그 안에는 약 찌꺼기와 약방문 한 장이 들어 있었소……. 형님이 나한테 그걸로 당신 병의 원인을 알아내면 어른들의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했소.”
육함은 한 음절 한 음절씩 말했다.
“사실 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이 계속 핍박받는 것도 싫었고, 당신과 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소. 그래서 참지 못하고 열어 보고 말았소.”
임근용은 계속 침을 삼켰다. 그녀는 그 약 찌꺼기와 약방문이 어떻게 육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반고일격(*反戈一击: 창끝을 돌려 반격하다)할 생각뿐이었다. 임근용은 일단 철저히 부인하며 모든 일을 육소에게 떠넘기고 다시 육함을 몰아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약 찌꺼기 한 무더기와 약방문 한 장이 무엇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걸 믿는 사람이 바보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말들은 목구멍에 콱 걸린 것처럼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수 의원이 당신을 진료하고 써 주었던 약방문은 나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이 약방문은 그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가지 약재가 더 들어가 있더군.”
육함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한참만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약방문이 수 의원이 처음에 줬던 것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효과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소. 어쨌든 당신이 수 의원이 처방한 약을 그렇게 많이 먹었지만 별로 효과를 못 보았지 않소. 난 형님을 믿지 않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소. 그래서 이 약방문과 약 찌꺼기를 가지고 가서 의원들에게 보여 주었소. 대부분은 뭔지 몰랐지만, 비교적 명성이 높은 몇몇이 의원이 나한테 묻더군. 혹시 집안에 단약(丹药)을 복용해서 해독해야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이오…….”
임근용은 침묵했다.
육함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당신은 몸이 안 좋아서 몸조리를 해야 하는 사람인데 큰형님이 어찌 나한테 이런 약방문을 준단 말이요. 역시 좋은 의도가 아니었던 것 아니겠소. 안 그렇소, 아용?”
“응.”
임근용은 억지로 힘을 짜내 거의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콧소리를 냈다.
육함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자 한층 더 정상적인 목소리로 들렸다.
“당신은 그 약방문이랑 약 찌꺼기를 확인해 보고 싶지 않소? 그 형님이 또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것 같소?”
그는 그 뒤의 일을 임근용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육함이 상자를 받은 지 거의 20일 가까이 지난 후에야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묻는 걸 보면, 이미 일의 경과를 거의 다 파악했음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청주에도 한 번 다녀왔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그녀와 합방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참고 넘겨보려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대도 상관없었다. 임근용은 죽어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육함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하면 뭘 어쩌고, 보기 싫다고 하면 또 뭘 어쩔 거란 말인가? 그래서 모든 걸 알았으면 그가 또 뭘 어쩌겠는가? 그녀가 육함이 너무 밉고 싫어서 그와 같이 살고 싶지도 않고, 그와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고, 그의 아이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하면 그는 또 어쩔 거란 말인가?
“아용, 당신 떨고 있소.”
육함은 임근용의 손을 들어 자기 얼굴에 갖다 댔다. 그의 얼굴은 차가웠다.
“화내지 마시오, 우린 속지 않을 거요.”
그가 임근용에게 떨고 있다고 말하자 임근용도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육함의 목소리와 말투는 그녀에게 질문하고 상의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거짓말로 두려움을 감추려는 것처럼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임근용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힌 것 같았고 입술과 혀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육함에게 시원하게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맴돌았지만 어째서인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절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다행히 요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죽는 날까지 아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그녀가 그 재난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아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어 버린다면, 그 아이를 어쩐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 아이는 낳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