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31
331화. 비가 올 것 같아요
임근용의 눈이 시큰거리나 싶더니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커다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꼬리를 타고 흘러들어온 눈물은 짜고 떫은맛이 났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침묵을 택했다.
육함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낸 뒤 뒤돌아 창가로 가서 그녀를 등지고 섰다.
임근용은 의자에 앉아서 한참만에야 눈물을 거두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불을 붙이기 위해 창밖에서 들어오는 약한 불빛에 의지하며 책상으로 다가가 더듬더듬 부싯돌을 찾았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육함이 그녀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켤 필요 없소, 아용,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오?”
임근용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육함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육함은 그녀가 무슨 단약 같은 건 복용한 적이 없다고 말하거나, 그런 일에 대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거나 혹은 해명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그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한 마디를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육함은 지금 임근용에게 기회를 주고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늘 육함 같은 사람들 손에 좌지우지되어야만 하는 걸까? 전생의 그녀는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살았고, 현생의 그녀는 제대로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육함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모든 권한은 그에게 주어졌고 그녀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감정적인 동물일 때가 더 많았다. 임근용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가 되어 화를 발산할 수도, 누그러트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냉소하며 말했다.
“정말 도저히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네. 늑대소굴도 이 집보다는 낫겠어.”
육함은 잠시 멍해졌다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창문에서 광풍이 불어 들어오더니 바깥의 매화림에서 솨솨 하는 소리가 들리며 공기 중 습도가 더욱 높아졌다. 청설각 안은 이 바람으로 인해 시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더워졌다.
임근용은 육함과 이렇게 서서 서로 물러서려 하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심지어 날이 밝을 때까지도 계속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으면 그도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앵두가 아래층에서 소리쳤다.
“아가씨,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만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더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불이 왜 꺼졌지?”
임근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육함이 입을 열었다.
“돌아갈 것이니 등롱을 가지고 오너라.”
“아이고!”
계단에서 쿵쿵 하며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계단 입구에서부터 불빛이 올라오며 점점 밝아졌다. 임근용은 긴장한 듯 손수건을 꺼내 힘껏 얼굴을 닦고 다시 옷자락을 다듬었다.
육함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 돌아서서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임근용은 계단에서 그가 앵두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듣고 앵두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잠깐 더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막 두 걸음 정도 내디뎠을 때 육함이 혼자서 등롱을 들고 올라오더니 말없이 계단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앞을 지나쳐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몇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야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앵두와 쌍전은 이미 아래층에 없었다. 임근용은 아마 육함이 그녀들을 돌려보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임근용이 지금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육함이었다. 그녀는 치마를 들어 올리고 바깥의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임근용은 채 두 발자국도 못가서 육함에게 소매를 붙잡혔다.
또 한 차례 바람이 세게 불어와 임근용의 얼굴에 모래가 확 뿌려졌다. 그녀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요?”
육함은 들고 있던 등롱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임근용의 얼굴을 가린 소매를 잡아당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임근용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했지만, 육함은 마치 그녀의 소매에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당신 지금 찔려서 내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거 아니오?”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확연했음에도 임근용은 지려 하지 않았다.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소매가 그런 힘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소매는 두세 번만에 찌익 하고 찢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멍해졌고, 육함은 손에 쥐어진 소매에 약간 망연자실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임근용은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육함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청설각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커다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고, 공기 중에 흙비린내가 짙어졌다. 얼굴이 다 젖은 임근용은 지금 흘러내리는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육함의 손에서 벗어나려 미친 사람처럼 있는 힘껏 손을 빼고 발로 찼다. 육함은 말없이 없이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꽉 붙잡기만 했다.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솨 하며 내리는 빗소리에 온 세상이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바람이 몰고 온 비와 안개에 두 사람의 옷은 흠뻑 젖었다. 임근용은 결국 육함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청설각으로 끌려 들어갔다.
육함은 온몸으로 문을 막아서며 얼굴의 빗물조차 닦지 못하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늘 제대로 얘기를 해봅시다!”
임근용은 팔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고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온몸이 춥고 시큰거렸다. 그녀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해 윗니와 아랫니가 덜덜거리며 부딪쳤고, 도저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청설각 안은 밤에 켜 두는 등롱밖에 켜져 있지 않아 불빛이 어슴푸레하고 적막했지만 사람을 제대로 보기에는 충분했다. 육함은 문에 기대 지친 표정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발끝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임근용은 두 손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지만, 허리와 등은 꼿꼿하게 펴고 있었고, 두 다리에도 힘을 주며 곧게 뻗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반쯤 풀려 몇 가닥 늘어진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에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옷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육함은 그녀가 불쌍하면서도 원망스러웠고 또 미웠다.
육함은 온 마음이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모든 걸 쏟아내고 싶었다. 그는 임근용에게 대체 자신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큰 소리로 묻고 싶었다. 무엇 때문의 그의 진심을 이렇게 짓밟는 걸까? 무슨 말이든 할 말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하라고 해서 한 것뿐인데 왜 이러는 걸까? 그는 요 며칠 잔뜩 긴장해 걱정했던 것만 생각하면 스스로가 너무 우습게 느껴졌다. 육함은 죽어라 임근용을 노려보았다. 그는 눈이 시큰거리고 눈꺼풀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고집스럽게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임근용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육함이 죽어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꼿꼿하게 서 있는 것 외에는 달리 뭘 어째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대처할 방법은 더더욱 생각이 안 나서 그저 육함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바람이 불어 제대로 닫지 않은 창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임근용은 화들짝 놀랐다. 훅 불어 들어온 바람이 어둑어둑하게 비추던 등불마저 꺼 버리자 소스라치게 놀란 임근용은 재채기가 다 나왔다.
육함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시큰거리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왜 이러는 거요?”
임근용은 찬바람을 맞고 점점 냉정을 되찾았다. 이유야 많지만 뭐라고 대답을 한단 말인가? 그에게 전생에 하나밖에 없던 아이를 잃었으니 이번에도 또 잃을지도 모른다고 말할까? 전생에 차가운 강에서 홀로 외롭게 익사했다고 말할까? 그녀가 육함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는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고 말할까? 언젠가 그녀가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고 말할까?
아니면, 그녀가 환생한 이래로 꼬박 반년이 넘도록 매일 죽을 때의 꿈을 꾸었다고 말할까? 육함을 생각할 때마다 날카로운 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고 말할까? 수없이 많은 자기 부정 속에서도 또 수없이 많이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막 새로운 삶이 시작되려 할 때 가족들이 그녀를 이런 수렁으로 밀어 넣은 거라고 말할까? 인생을 살면서 결말을 알아서 최선을 다해 발버둥을 치는데도 결국에는 스스로가 조금씩 함락되어가는 모습을 뻔히 지켜 봐야 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임근용은 최선을 다해 노력한 끝에 잠시 전생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한시도 전생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알게 된 것들을 이용해 현생의 재앙과 고통을 피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생에서와 똑같이 처량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수 의원이 그녀에게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했고, 그녀 또한 다른 일이나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육함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해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임근용은 때가 되어 결국 죽게 되든 살게 되든 간에 앞으로 5년간은 육함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일은 그녀가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역시나 그와 멀어져야 할 운명인 모양이었다. 고훈이 향낭으로 바뀌고, 녕아의 죽음이 단약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어차피 이 일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앞당겨지든 미뤄지든 이 고비는 반드시 겪고 지나가야 했고 어쨌든 피할 수 없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요?”
육함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그녀를 압박했다. 임근용이 건성으로라도 대답하려 하지 않자 육함은 오늘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근용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죠. 당신이 거짓말을 듣고 싶은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창밖에서 바람 소리와 빗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렸다. 그녀는 육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 말을 이었다.
“대를 잇는 건 부인으로서 마땅한 의무죠. 내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당신이 날 버린대도 상관없어요. 절대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쯤 되니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순간 바람 소리와 빗소리도 멈춘 듯했다. 육함의 숨소리 역시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 육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는 거요? 내가 뭘 잘못했소?”
뭘 잘못했냐고? 임근용은 심하게 현기증이 느껴져,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이유는 없어요.”
육함은 갑자기 폭발했다. 그는 감각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 정확하게 임근용을 찾아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목소리를 죽이고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마음속에 담아 두지 말라고 해서 난 그렇게 했는데, 당신은 왜 말 안 하는 거요? 나한테 똑똑히 말해 봐요! 제대로 말해보라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도대체 왜? 내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소? 내가 당신이 만족할 만큼 잘해 주지 않았소?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 대체 뭘 어쩌려는 거요?”
임근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독한 말을 쏟아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