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35
335화. 만약에
8월 15일이 되자, 임근용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올해 명절은 전생의 그때와 같았다. 육씨 가문의 온 가족이 전부 정원 서쪽의 함월루(涵月楼)에서 달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고 월병을 먹었다. 달구경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전생의 그때보다는 적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 없었다. 빠진 사람은 송씨, 육소, 육경, 육륜, 육선, 그리고 녕아가 있었다.
임근용도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양주가 몇 순배 돌고 술기운이 오르자 육 노태야 쪽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이에 임옥진, 여씨, 육운 등 몇몇 사람들도 육 노부인을 추켜세웠고, 려씨는 원랑과 호랑을 품에 안고 한쪽에 앉아서 귓속말을 하다가 여지에게 이야기하고 혼자 계단을 짚으며 조용히 내려갔다.
함월루는 육씨 가문 저택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기단이 지면으로부터 거의 8척 높이에 달했고 그 위에 또 3개 층이 올려져 있었으며, 사방에 전부 떼어낼 수 있는 칸막이 창이 달려 있었다. 칸막이 창을 떼어내고 누각에 앉으면 온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달구경을 하며 더위를 식히기에 그만이었다. 임근용은 늘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아 해서 작년에도 병을 핑계로 피했다. 전생의 올해 녕아가 이곳에서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분위기가 떠들썩하긴 하지만, 전생에서는 육씨 가문의 식구들이 전부 다 모여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떠들썩했다. 원랑, 호랑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고, 늘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어린 녕아도 큰 소리로 형님들을 불러댔다. 두 아이들은 녕아가 너무 어리다고 싫어하며 그와 함께 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녕아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혼자 두고 도망가 버려 아이를 울게 만들기 일쑤였다. 마음이 아팠던 임근용은 녕아에게 아래로 내려가 귀뚜라미를 잡자면서 아이를 달랬다. 사실 그녀가 귀뚜라미를 어찌 잡겠는가, 그저 아이가 슬퍼하는 것이 안타까워 달래려고 그랬던 것뿐이었다.
임근용은 함월루 밑의 석대 가장자리에 서서 달빛 아래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영석 가산을 내려다보았다. 그 가산(*假山: 인공으로 만든 산이나 언덕)은 높이가 2, 3척밖에 되지 않아 평소에는 아주 우아해 보였지만, 전생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병기로 변모했다.
전생에 그녀가 녕아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을 때, 임옥진이 위층에서 그녀를 부르며 무언가를 물었다. 임근용은 거기에 서서 임옥진과 몇 마디 나누었는데, 기다리다 지친 녕아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칭얼대자 임근용은 유모인 문랑(文娘)에게 아이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기다리라 말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임옥진의 말에 채 대답도 다 하기 전에 임옥진이 위층에서 가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임근용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녕아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문랑은 멍하니 석대의 가장자리에 서서 입술을 떨며 말했다.
“공자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셨는데 노비가 붙잡지 못했습니다…….”
뒷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그녀는 그저 미친 듯이 아래로 돌진했다. 녕아는 이미 얼굴에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는 석대에서 떨어져 그 영석 가산에 부딪친 것이다. 그 후 이틀을 더 버틴 그의 작은 몸은 결국 임근용의 품에서 차갑게 식었다.
유모 문랑은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임근용은 사랑하는 아이를 영원히 잃었고, 이와 동시에 육함과의 관계도 완전히 깨져 버렸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임근용은 여전히 그 당시 뼈에 사무쳤던 고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고,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수많은 날들을 후회와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책했다. 만약 당시 그녀가 녕아를 유모에게 맡기지 않았더라면, 만약 당시 그녀가 계속 녕아를 품에 안고 있었더라면, 혹은 임옥진과 이야기할 때 녕아를 좀 더 신경 썼더라면, 녕아에게 그런 사고가 안 나지 않았을까?
임근용은 밤바람에 차가워진 뺨을 어루만지며 석대에서 내려와 영석 가산 쪽으로 걸어가 살짝 돌을 짚었다. 손에 닿는 돌의 느낌은 차가웠지만, 그녀는 마치 그 작은 아이의 몸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이의 몸에서 나던 젖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귓가에 어머니라고 속삭이던 부드러운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당시 이 영석 가산은 녕아의 피로 물들었고 후에 육함이 큰 망치를 가지고 가 때려 부수어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 영석 가산은 온전하게 우뚝 솟아 있었고, 오늘 밤에 누군가가 망치를 가져와 산산조각을 낼 일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앞으로 계속 이렇게 조용히 우뚝 솟아 있을지도 모른다.
전생과 현생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경계만큼은 아주 분명했다. 그녀의 녕아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고, 그녀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설령 모든 일이 또 다시 재현된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임근용은 돌에서 손을 떼고 눈가의 눈물을 가볍게 훔치며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이 여기에 오는 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다.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녕아는 그저 그녀의 가슴에 묻어 두고 더는 수시로 꺼내 보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줄 필요가 없었다.
“무슨 일이오?”
육함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점점 야위어 겉옷마저 약간 헐렁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술기운이 올라서 내려와서 좀 걷고 싶어서요.”
임근용이 거기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수천 수 만 가지의 감정이 올라왔다. 육함은 영원히 그런 아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와 그녀가 그런 지경에 이르렀었다는 건 더더욱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녀는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았고, 그도 비탄에 잠겼다. 임근용은 전생에 육함이 그녀에게 그런 가시 돋친 말을 했던 것을 원망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역시 그저 가엾은 한 인간일 뿐이었다. 육함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남을 아프게 했다.
육함은 말없이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울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임근용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도 억지로 들추지 않았다. 육함은 언젠가 그녀가 먼저 그에게 말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21일에 출발할 생각이오.”
“짐은 거의 다 싸 뒀어요.”
임근용의 마음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우리 어머니하고 고모님께서 내일 같이 평제사에 가서 당신의 평안을 빌자고 하셨어요. 당신도 가고 싶으면 짬을 내서 같이 가서 향을 피워요.”
“하루쯤 시간 내는 건 어렵지 않소.”
육함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몸이 불편한 거라면, 내가 집으로 데려다주겠소. 어르신들한테는 내가 말씀드리면 되오.”
임근용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이 밑에서 잠깐 쉬다가 들어갈게요.”
그녀는 웃으며 한쪽 돌의자에 가서 앉았다.
“작년에는 병이 나서 오지 못했는데, 올해도 또 중간에 자리를 비우면 어르신들께서 나랑 중추절이랑 무슨 원수라도 졌냐고 하실 것 아니에요? 그런 말 들어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육함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와 나란히 돌의자에 앉아 작게 말했다.
“아용, 만약에 이번에 내가 합격해 당신을 데려갈 수 있게 된다면, 앞으로는 우리 둘이서만 지내야 할 텐데, 당신……. 그럴 수 있겠소?”
달빛이 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계수나무 꽃의 달콤한 향기를 은은하게 퍼트렸다. 사방은 조용했고 이름 모를 작은 벌레들만이 풀숲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임근용은 조용히 하늘가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분명히 합격할 거예요. 그저 시험을 좀 더 잘 보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죠.”
전생에 육함은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리 좋은 등수로 합격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때 그가 아들을 잃은 고통을 겪지 않았더라면 시험도 좀 더 잘 보지 않았을까?
육함은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는 걸 보고 실망한 듯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을 믿어 보겠소. 내 생각에도 합격은 할 것 같소.”
“분명히 합격할 거예요.”
임근용이 허리를 굽혀 발치에서 등심초 몇 개를 뽑더니 달빛에 의지해 풀을 엮기 시작했다.
“뭘 만드는 거요?”
육함은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하며 절로 호기심이 이는지 가까이 다가와 관찰했다.
임근용이 빙긋 웃었다.
“작은 짚신을 엮고 있어요. 예전에 장원에서 묘아가 가르쳐줬어요.”
“묘아는 이제 시집가지 않았소?”
육함은 그녀가 들고 있던 등심초가 곧 바닥나려 하자 얼른 하나를 꺾어 건네주었다.
“맞아요, 시집을 아주 잘 갔어요. 어머니께서 그 아이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셨지요.”
육함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그녀에게 느릿느릿 농담을 건넸다.
“근데 당신은 그 장원에 있었을 때 왜 그리 거칠게 굴었던 거요? 어찌나 담이 크고 제멋대로던지, 난 당신 같은 아가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아마 외숙모께서 당신을 너무 예뻐하셔서 오냐오냐 키우신 탓이겠지. 그때 당신은 정말 얌전하고 현숙한 아가씨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소.”
임근용도 가만히 있지 않고 되받아쳤다.
“그때 당신은 고루한 샌님 같았어요. 딱딱한 표정으로 늙은이같이 거드름을 피우며 잔소리나 해댔잖아요. 난 당신처럼 꽉 막히고 밉살스럽고 흥을 깨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생기는 하나도 없고 쩨쩨하기는 또 얼마나 쩨쩨한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열대여섯밖에 안 된 소년 공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육함이 웃었다.
“둘 다 피장파장이었군, 누가 더 나았다고 하기도 힘들겠소.”
임근용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짚신을 엮는 데 집중했다. 짚신이 반 정도 만들어지자 여지가 함월루에서 내려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노부인께서 찾으세요.”
임근용은 반쯤 만든 짚신을 내려놓고 일어나 치마를 정리하고 육함에게 물었다.
“민행, 당신도 올라갈 거예요?”
육함이 미소 지었다.
“아까 많이 마셔서 좀 취한 것 같소. 난 여기서 쉴 테니 당신 먼저 올라가요.”
“그럼 먼저 갈게요.”
임근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떼는데 갑자기 뒤에서 육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용, 내가 전에 한 말을 잊지 마시오.”
임근용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석대 위로 올라가 뒤를 돌아보니 육함은 온몸에 달빛이 가득한 채로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 * *
새벽의 봉시산은 아침노을과 가을빛으로 물든 산의 경치가 서로 조화를 이뤄 겹겹으로 물든 수많은 단풍잎의 알록달록한 빛깔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산바람이 불어오자 단풍 숲에서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솨솨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숲속 깊은 곳에서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라 고개를 쳐들고 아침 해를 향해 솟구쳐 날아갔다.
육함은 전망대에서 울타리를 잡은 채 날아가는 새를 열심히 눈으로 좇았다. 그의 겉옷이 산바람에 날리며 펄럭거렸고, 자칫하면 바람에 날려 날아갈 것 같았다.
임근용은 혼자 돌계단을 하나씩 걸어 올라가 전망대에 도착해 그의 곁에 멈춰 섰다.
“왔소?”
육함의 말투는 아주 온화하고 평온해서 평소 잡담을 나눌 때와 다름이 없었다.
“산속은 아침 바람이 차니 너무 오래 있지 마시오. 지금은 중요한 때이니 병이 나면 안 돼요.”
임근용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하늘가를 향해 날아가던 그 새는 이미 작은 검은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육함이 시선을 거두며 미소 지었다.
“역시 아름답구려. 몇 년 전에 여기 와서 향을 피웠을 때만 해도 언젠가 내가 당신과 이 전망대에서 이렇게 가을 경치를 구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임근용은 육운이 오씨 가문에 혼담을 꺼냈다가 거절당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인생무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