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46
346화. 인사하다
육함이 바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포도 받침상 아래에 앉아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눈빛이 밝아지더니 입꼬리를 치켜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께서는 왜 정자에서 즐기시지 않고 여기 한가롭게 숨어 계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포도 받침상 아래에서 육 노부인에게 큰절을 했다.
육 노부인은 지금 봐도 봐도 육함이 너무 예쁘고 대견해서 그를 끌어다가 이것저것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함은 그녀의 질문에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대답했고, 이따금씩 미소 어린 눈빛으로 임근용을 힐끗거렸다. 임근용은 한쪽에서 비단부채로 육 노부인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있다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묻고 싶은 것을 다 물은 육 노부인이 만족한 듯 서둘러 육함을 쫓아냈다.
“얼른 가서 네 할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라.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다시 나와 밥을 먹어라.”
또 임근용에게 지시했다.
“나랑 같이 있을 필요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둘째가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뜨거운 물과 옷을 준비해 주거라.”
* * *
임근용은 더 이상 전처럼 오로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남편이 오면 다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는 그런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육 노부인이 확실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임근용은 그녀의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손들의 효도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뜨거운 물만 준비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거면 손자며느리가 아무 시녀나 시켜서 말만 전하면 되지요. 할머님께서 이렇게 더운 날 몸까지 편찮으신데 제가 직접 모셔다드리지 않으면 어찌 안심할 수 있겠어요?”
이 말을 들은 육함이 임근용을 몇 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용 말이 맞아요. 손자가 일단 할머니부터 모셔다드리고 돌아와서 인사드릴게요.”
육 노부인은 역시나 아주 흐뭇해하며 허허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모시긴 뭘 모셔! 할미는 널 봤지만, 네 할아버지랑 어머니는 계속 널 기다리고 있잖니. 넌 얼른 가보거라. 난 아용이가 데려다주면 돼.”
임근용이 육 노부인을 부축하고 걸으며 앵두에게 지시했다.
“넌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한테 준비해 놓으라고 해.”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또 분부했다.
“계 마마한테 이소야가 요기할 수 있게 간단히 국수 같은 것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해.”
임근용은 말을 끝내자 육함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육함이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걸 보고 임근용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육함은 한참을 거기에 서서 임근용과 육 노부인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려 정자로 향했다.
임근용은 육 노부인을 영경거로 데려다주고 침상에 눕혔다. 그녀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단 밖에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온몸의 열기와 조급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육함이 오솔길 반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육함이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공교롭군. 난 정자에서 이쪽으로 왔고, 당신은 영경거에서 이쪽으로 왔는데 의외로 얼마 차이가 안 나는구려.”
방죽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소야의 한 걸음이 이소부인의 두 걸음은 족히 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육함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죽이 눈치 빠르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노비는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임근용은 방죽을 불러 세워 진지한 표정으로 몇 가지 일을 지시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었다.
방죽이 떠나자 육함이 다가와 임근용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정말 바쁘구려. 이럴 때도 집안일을 잊지 않다니.”
그녀가 이 집에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그만한 몫을 해야지 이 정도 수고도 없이 어찌 여기서 살겠는가? 임근용은 손에 든 부채를 움켜쥐고 눈을 내리깔며 작게 말했다.
“난 늘 이렇게 바빴어요. 몰랐던 것도 아니고. 더구나 오늘은 명절이라 손님도 많아서…….”
육함이 곁눈질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깐 채 속눈썹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새빨간 상의가 그녀의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 육함이 떠나기 전보다 더 희고 윤기가 도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절로 마음이 동해 임근용이 소매 속에 감춰둔 왼손을 찾아서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용…….”
더위에 온몸이 땀에 절은 임근용은 부채로 힘껏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
임근용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겨를이 없어서 아직 이것도 못 물었네요, 오는 길은 순조로웠어요?”
육함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쁘지 않았소. 오는 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와서 집에 일찍 오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좀 피했소. 하지만 그것도 다 관례라 전부 피하기는 어렵고 앞으로 이틀 정도는 시끌시끌 할 것 같소.”
“영광스럽게 금의환향한 거잖아요. 이건 당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니 앞으로 좀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임근용은 앞에서 두 명의 시녀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그 틈에 손을 빼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왼손으로 들었다.
육함은 다가와 인사하는 두 시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일찍 집에 돌아오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오상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소.”
임근용은 깜짝 놀랐다.
“왜요?”
그녀는 나중에 오상이 당시 정9품 대리평사(*大理评事: 대리사에 속한 평사로 형벌을 판결하는 임무를 담당함) 직을 수여 받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강남으로 파견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육함이 오상을 피해야 한다고 하다니, 또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설마 두 사람 사이가 또 틀어진 건 아니겠지?
육함은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걷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마음이 편치 않을 거요. 오상은 수주(秀州) 화정(华亭)의 현승(*县丞: 현의 부지사)으로 부임했소. 내가 그 친구보다 좀 더 앞 등수이긴 해도 별로 많이 앞서지는 못했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경성에 남게 되었소……. 듣자 하니 내가 그 친구보다 글씨를 더 예쁘게 썼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오는 내내 뭘 하든 사람들이 계속 나한테 잘 보이려고 들러붙었소. 원래 그런 대접에 익숙한 건 오상 그 친구이지 않소. 오상도 겉으로는 아무 내색 안 하고 전처럼 해맑게 굴었지만 그 친구가 나한테 진 건 처음이니 속으로는 얼마나 괴롭겠소.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그 친구를 좀 피했소. 일단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지 않겠소.”
임근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심 오상이 아주 안타까우면서도 육함의 곤란한 상황도 이해가 갔다. 지난번에 오상이 비록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돌아오긴 했어도, 재능 있는 사람이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했다가 모함을 당했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상이 정말로 졌다.
어릴 때부터 명성을 얻은 그는 자부심이 강해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도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리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육함도 오상을 이기고 싶다는 일념하에 이날만을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그가 결국 이렇게 뜻을 이루긴 했지만 마치 그가 무슨 부정한 방법이라도 쓴 것처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육함도 당연히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뭐라 변명을 할 방법도 없었다.
임근용이 육함을 위로했다.
“당신도 너무 마음에 둘 필요는 없어요. 비록 그런 일에 개인적인 선호도가 영향을 미치긴 해도, 누군가가 글씨를 좀 더 잘 썼다고 그 사람을 파격적으로 훨씬 더 앞세울 수는 없었을 거예요. 기껏해야 실력이 엇비슷할 때 조금 유리한 정도였겠죠. 사실, 글자는 서생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아니면 선생님들이 왜 아이들을 계척으로 그렇게 무섭게 때려가며 글자를 잘 쓰게 가르치겠어요. 그것 또한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연습해서 얻은 거지 꽁으로 얻은 게 아니잖아요. 오상 오라버니가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절대 당신이 미워서는 아닐 거예요. 그냥 스스로에게 실망해서겠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예요.”
육함은 그녀의 말을 듣고 또 살짝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
“아용,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졌소.”
임근용이 말했다.
“세상사가 다 그런 거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잖아요?”
육함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무심한 듯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또 빠르게 반 보 물러서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집에 없는 바람에 당신 열아홉 살 생일 축하도 못 해 줬군.”
임근용 그저 그의 걸음이 빠르다고만 생각할 뿐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당신도 작년 동지 때 경성에서 혼자 생일을 보냈잖아요?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요?”
육함이 웃으며 품속에서 비단함을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경성에 있을 때 당신 생일 선물로 사 뒀던 거요.”
임근용이 궁금해하며 말했다.
“이게 뭔데요?”
“당가 금은방에서 만든 향구(*香球: 향을 넣어둘 수 있는 구 모양의 장신구)요. 지난번에 내가 당신 은어 향구를 가져가면서 더 좋은 걸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육함은 그녀가 다른 손에 부채를 들고 있어서 열지 못하는 걸 보고, 얼른 비단함을 가져와 그녀가 볼 수 있게 열어 주었다. 그 속에는 호두알 크기 정도 되고 백합 모양의 조각에 보석이 박힌 순금 향구가 들어 있었는데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라 햇빛이 비치니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은 물건이네요, 비싼 거죠? 민행, 신경써 줘서 고마워요.”
육함은 계속 임근용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녀의 감사 인사를 듣고 절로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당신 마음에 들면 됐소. 그때는 나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고 너무 멀리 있는 터라 인편에 물건을 보내기도 곤란했소.”
임근용은 비단함을 받고 다소 난감해하며 말했다.
“난 작년 동지에 너무 바빴어요……. 그때 오공자가 도망가고, 할아버님도 아프셔서 집안이 엉망진창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 말은 그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육함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것 가지고 삐지겠소.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지 않아요.”
그는 임근용에게 그와 함께 경성으로 가는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임근용도 그것에 대해 자발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오의 햇빛이 정수리로 내리쬐어 두 사람은 빨리 걷기 힘들었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둘 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문지기 장씨를 비롯한 시녀들은 이미 앵두로부터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황급히 뛰어나와 마중했다. 그녀들이 축하 인사를 하자 육함은 친절하게 한 명 한 명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가 정원 여기저기에 책이 널려져 있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책을 좀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들이 벌써 이렇게 말리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