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55
355화. 스님
임근용이 한숨을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도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왜 또 네 잘못이야? 다 그 못된 노비가 은혜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탓이지. 그 계집을 나한테 보내렴! 내가 그 못된 마음씨를 제대로 고쳐 줘야겠다.”
공 마마가 도씨를 설득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오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남들 눈에 흉하지 않게 그것들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필요하다면 벙어리 약을 한 첩 써서 깨끗하게 정리하면 될 것이다.
도씨는 화를 내며 자책하다가 또 임근용의 수중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떠올리며 자신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춘아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춘아 부부를 너한테 주마.”
춘아는 일찍이 소관리인과 혼인해 지금 두 부부가 이미 도씨의 유능한 심복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도씨 또한 안팎으로 그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근용이 처음에 생각했던 건 하엽이여서 도씨가 갑자기 춘아를 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어찌 또 도씨의 오른팔을 빼앗겠는가.
“됐어요, 어머니도 춘아 언니가 필요하시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민행이 할머님께 사 마마를 달라고 했어요. 사 마마가 도와주면 괜찮을 거예요. 할아버님께서도 두 식구를 준다고 하셨으니 쓸 사람은 충분해요.”
도씨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해 본 뒤 임근용에게 하엽을 주기로 결심했다.
“사 마마는 나이도 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육씨 가문 편을 들지 않겠니. 하엽이는 오랫동안 날 모신 아이이고 침착한 성격이니 그 집 내외를 너한테 주마. 큰 도움은 못 돼도 필요할 때 조언을 해주고 도와줄 수 있을 테니 마음이 놓일 게다. 그리고 너같이 젊은 부인이 외출을 할 때도 두아나 다른 어린 시녀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는 더 편할 거야.”
정든 고향을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근용은 하엽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하엽의 의사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하엽은 의외로 아주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계속 이 집에 있으면 무탈하게 지낼 수야 있겠지만 춘아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임근용을 따라가 세상을 경험해 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도씨도 그들을 신임해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고 자신에게도 좋은 일인데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종 8품의 말단 관리가 의기양양하게 10명이 넘는 노복을 데리고 상경하면 너무 눈에 띄어서 괜한 사달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임근용은 육씨 가문 쪽에서 따라가는 사람의 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말을 육함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임씨 가문 저택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이경(*二更: 밤 10시 무렵)이 다 되어 있었다. 임근용이 세수를 마치고 병풍 뒤에서 나왔지만 육함은 여전히 겉옷을 입은 채로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낮은 탁자 위에는 그릇 하나와 깨끗하게 씻은 두 개의 쌍알이 놓여 있었다.
너무 진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임근용은 난감해져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뭘 하려고요?”
육함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랑 같이 쌍알을 보려고, 한 번도 본 적 없다 하지 않았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달걀을 들어 그릇에 부딪쳐 깬 뒤 그릇에 담았다.
임근용은 이걸 보고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 두 마리가 되는 거 아니에요?”
육함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쌍알은 알을 부화시킬 수 없는 알이라 병아리가 안 나올 거요.”
“또 책에서 봤어요?”
임근용은 어이가 없었다. 쌍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건 또 어찌 안단 말인가?
육함이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건드리며 말했다.
“아니, 예전에 장모님 장원에 있을 때 철 마마한테 들었소.”
그 당시 육함은 임세전으로부터 임근용이 염지를 개간하는 일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녀가 자주 농업과 양잠업에 대해 묻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임근용이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걸 보고 소년의 치기 어린 마음에 그녀에게 지고 싶지 않아 열심히 ≪제민요술≫을 찾아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자신이 어린 소녀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들을 절대 임근용에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임근용이 육함의 이런 깊은 속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그저 하엽에 관해서만 말했다.
“어머니의 호의인데 거절하면 슬퍼하실 거예요.”
육함이 웃으며 그녀에게 의논조로 말했다.
“당신이 데리고 있는 시녀 넷에 사 마마까지 더하면 벌써 다섯이오. 내 쪽에는 장수와 장녕 두 명이 있고, 할아버지께서 주신 육량(陆良)과 육송(陆松)네 두 내외를 포함하면 벌써 열 몇 명이지 않소. 거기 도착하면 문지기, 요리사, 마부, 하급 시녀들을 또 고용할 텐데 정말 하엽이네 내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임근용이 육함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벌써 어머니한테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도씨의 말처럼 두아를 비롯한 그녀의 시녀들은 바깥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하엽 부부마저 없다면 경성에 간 다음부터 임근용은 모든 일을 육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마치 문을 닫아걸고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처럼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근용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임근용은 역시나 그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육함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임근용을 한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할아버지께 가서 육송네는 빼달라고 말씀드리겠소.”
임근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행, 고마워요.”
육함이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부부끼리 이런 일로 기분 상할 필요는 없지 않소. 그냥 노비들을 바꾸는 일일 뿐이니 이렇게 해서 당신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걸로 된 거요.”
이 일로 인해 방금 전까지의 편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됐다. 두 사람은 이내 흥미를 잃고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침상에 올라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둘 다 잠이 든 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이런 일로 서로 서먹해져서 좋을 것이 없고, 어쨌든 육함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 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당신이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평제사에 가서 소원을 비셨는데, 당신이 합격해서 돌아왔으니 가서 감사 인사를 올려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신더러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보라 하셨어요.”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까 장모님께서 말씀하셨소. 일단 고택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다음에 가면 될 것 같소. 당신도 갈 거요?”
임근용이 말했다.
“나도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으니 가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그녀가 분위기를 풀려하자 육함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경쾌하게 말했다.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었소?”
그건 별로 숨길 것도 없었다. 임근용이 말했다.
“당신이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게 보우해달라고 빌었고, 과거에 급제하게 해달라고 빌었고, 온 집안이 평안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전생의 녕아를 보살펴 주시어 아이가 좋은 가정에서 환생해 평안하게 부귀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기분이 좋아진 육함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다.
“난 만약에 내가 과거에 급제해서 당신을 데리고 경성으로 떠나면, 당신의 마음속에 영원히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소. 당신이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아이도 낳고 백년해로하게 해달라고 말이오.”
임근용이 한참 만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건 절대로 당신이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은 아닐 거예요. 세상에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보통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나야 훨씬 더 좋지.”
육함은 몸을 뒤척이다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낮게 웃으며 떠보듯 말했다.
“아용, 난 아무래도 평제사에 가면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야 할 것 같소.”
임근용은 마치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육함의 마음이 조금씩 식어가며 임근용의 허리에 올려 져 있던 손도 점점 굳었다. 그는 마치 수백 개의 날카로운 가시 방석에 누운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육함은 숨을 쉴 때마다 폐가 몹시 아팠고, 뭔가 묵직한 것이 목구멍에 단단히 낀 것 같은 느낌에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는 힘겹게 임근용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몸을 뒤척이며 침상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근용은 마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한참 후에 육함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며 침상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가 막 휘장을 걷는데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가 황급히 사라졌다.
육함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임근용이 몸을 뒤척이며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육함은 갑자기 몸을 찌르던 가시가 싹 사라지고 목구멍에 얹혀있던 거대한 돌덩이도 내려간 것 같았다. 그는 믿기지가 않아서 조용히 손을 뻗어 침상을 더듬으며 방금 임근용이 누워있던 곳을 만져 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고 그녀의 온기만 남아 있었다. 임근용이 안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를 잡아당긴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왜 안으로 들어갔겠는가? 육함은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떠보듯 말했다.
“아용, 방금 당신이 잡아당겼소?”
임근용은 대답 없이 조금 더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아니오? 그럼 큰일이군. 뭔가가 날 잡아당겼는데 빨리 불을 켜고 확인해 봐야겠소. 당신 겁먹지 말아요.”
임근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만진 건 아니지만, 겁은 안 나요.”
임근용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육함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었다. 육함은 날아갈 듯 기뻐하며 난데없이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아용, 아용.”
육함은 아무리 기뻐도 고작 이런 말이 전부였고 듣기 좋은 말들은 할 줄 몰랐다. 임근용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육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육함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임근용은 얼마 남지 않은 몇 년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일단 청춘의 맛을 즐기고 싶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육함은 살짝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지만 곧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임근용의 얼굴을 받치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왜 우는 거요? 어디가 불편하오?”
임근용이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해요. 너무 아파요. 그렇게 세게 하지 말아요.”
육함은 마치 풋내기 소년처럼 당황하며 살짝 허둥댔지만 마음만은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더 흥분했다. 육함은 잠시 멈추고 눈물에 젖은 임근용의 귀밑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
“미안하오,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