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변수 (3)
황 이낭은 임근용의 배척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부인, 이제 점심을 드실 시간이네요. 비첩은 이제 삼노야를 뵈러 가봐야겠어요.”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삼노야를 신경 쓸 겨를이 없구나. 네가 삼노야를 잘 모시며 본분을 다하거라.”
도씨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물러갔다.
임근용은 얼른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싱글벙글하며 도씨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임근음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 주고, 한 손으로는 도씨의 손을 잡았다.
“이낭이 왜 여기에 있어요?”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임근음이 조용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도씨는 임근용을 본 기쁨이 이미 가신 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 여자가 말이야, 요즈음 매일 와서 나에게 문안을 드린단다. 내가 시간이 없다 하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 오공자도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와서 예의를 차리고 있고. 내가 저 여자를 들여 보내 주지 않으면 온 집안사람들이 내가 임신한 유세를 떨며 저 여자를 괴롭힌다고 떠들어대지 않겠니?”
임근음은 임근용이 무엇을 걱정을 하는지 알아채고 얼른 덧붙였다.
“이낭은 아주 단정한 사람이라 함부로 물건을 건드린 적은 없어. 매일 와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맘때쯤 되면 가. 안 그랬으면 매일 여기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말투를 들어보니 임근음 역시 요 며칠 동안 황 이낭의 행동을 꽤나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 이낭이 아무리 그녀들과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분명 뭔가 다른 변고가 생긴 것이다.
임근용의 마음속에 의심이 떠올랐지만 도씨의 면전에서 계속 추궁할 수는 없어 그저 얼굴을 들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방금 청도거에서 임신지가 공부를 하다가 자신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일을 재미있게 묘사하여 도씨를 기쁘게 만들었다.
도씨는 아랫배를 가볍게 받쳐 든 채 잠시 걱정을 잊은 듯 행복해하며 웃었다.
“신지 말로는 이 아이가 남동생이라더구나. 그 말이 정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맞을 거예요.”
두 자매는 그녀와 함께 웃고 있었지만 다들 서로의 눈에서 한 가닥 근심을 볼 수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도씨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임근용이 말했다.
“기왕 나온 김에 아버지한테도 문안을 드리러 가 봐야겠어요.”
황 이낭의 임 삼노야에게 점심을 차려 주러 간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임근음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셔. 이리 와, 우리 얘기 좀 하자.”
두 자매는 창가에 있는 평상에 앉아 서로 어깨를 기대고 따스한 가을 햇살을 즐겼다.
임근용은 본능적으로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임근음의 아름다운 눈이 무기력한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다치신 후에 모임 친구들이 아버지를 자꾸 연회에 초대 하나 봐. 오늘은 이 집에서 초대하고 내일은 저 집에서 초대하는 통에 요즘 좀 바쁘신 것뿐이야. 며칠 전 밤에도 숙취 때문에 집에 안 들어오셨는데 어머니가 우리 남매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셨어. 그래서 황 이낭이랑 좀 가까워지신 거야.”
임근음은 아무래도 자기 아버지의 추태를 들추어내기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만약 정말 숙취일 뿐이라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노태야가 꾸짖으면 그냥 꾸지람을 듣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어머니가 왜 그들 남매의 체면을 생각해 황 이낭과 가깝게 지낸단 말인가?
아마도 임 삼노야가 나중에 들였던 그 미첩이 나타났을 것이다. 임근용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 말고는 도씨와 황 이낭이 이 자리에서 동맹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역시 거의 이즈음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또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것 봐, 황 이낭에 대한 임 삼노야의 진심이라는 것도 고작 이 정도인 거야.’
전생에서 임 삼노야는 황 이낭의 죽음을 핑계로 일부러 미첩을 들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씨가 임신했고, 황 이낭은 편안하게 잘살고 있었으며 두 아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었다. 임 삼노야는 그저 예전처럼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그가 그때 첩을 들인 것이 정말 황 이낭의 죽음이 애통하고 분해서였을까?
황 이낭에 대한 십 수 년 동안의 총애는 정말 그 헛된 ‘사랑’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을까?
아니, 임 삼노야는 그저 자신의 무능과 호색가 기질에 좋은 핑곗거리를 갖다 붙인 것뿐이었다.
임 삼노야의 머릿속에서 부부가 화목하지 못한 건 도씨가 사나워 부부간의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황 이낭처럼 유순하면 얼마나 좋은가. 도씨는 어째서 이렇게 유순하게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인가?
자식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고 장래성이 없는 것은 도씨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었다. 그게 아니면 장남가와 차남가의 자식들만 저리 도리를 잘 알고 능력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그가 출세하지 못하는 것은 운이 좋지 않고 도씨가 내조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임 노태야가 너무 일찍 퇴직을 한 탓도 있었다.
지금 그가 밖으로 돌며 화류계에 빠져 풍류를 즐기는 것은 도씨가 온화하지 않고 또 임신해서 그를 모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황 이낭 역시 늙고 노쇠하여 그를 모실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종류의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지만 사실 여자의 발싸개보다 못한 존재였다.
임근음은 임근용의 웃음이 어딘가 기괴하게 느껴졌지만 차마 말은 못 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가볍게 그녀를 밀었다.
“너 왜 그래?”
임근용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우리는 무시당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일이든 남 탓하고 하늘만 원망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눈에 거슬린다고 죽여 버릴 수는 없으니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해버리게 되지.”
임근음은 갑자기 이가 다 아픈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눈에 거슬리지만 죽일 수 없으니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말은 임 삼노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자신들의 아버지였다. 임근용은 어찌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한단 말인가?
역시 전에 너무 놀라서 아직 정신이 흐릿한 모양이었다. 임근음은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임근용의 이마를 짚었다.
임근용은 이마를 그녀의 손바닥 쪽으로 내밀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나 열 안나. 진심으로 한 말이야. 나 어린 애 아니야. 언니가 말 안 해도 사실 난 벌써 다 알고 있어. 그 여자 금씨 가문에서 아버지한테 보낸 거지? 듣자니 용모가 마치 선녀 같다던데. 성격이 온화하고 술도 잘 마시고 다도도 잘하고 글도 잘 짓는다지. 이름은 비홍(飞红)이고, 맞지?”
“어떻게 알았어? 어느 불경한 것이 너한테 함부로 입을 놀렸어?”
임근음이 대경실색했다.
임근용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일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못 숨겨. 위아래를 막론하고 이 집안사람들은 진작부터 다 알고 있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모르실 뿐이지.”
임근용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정말 그랬다.
임근음은 여동생이 이렇게 철이 든 것이 철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서인 것 같아 흐뭇하면서도 서글펐다. 그녀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어, 앞으로는 누굴 죽이네 어쩌네 하는 망나니 같은 소리는 하지 마. 남들이 들으면 좋을 거 없어.”
그녀는 새하얀 이로 입술을 살짝 물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한테는 아무 타격도 없는데 괜히 우리만 힘들어져. 정말 그럴 가치도 없어.”
임근음이 임 삼노야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임근용은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짙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었고 가을 햇살이 벌거벗은 나무 꼭대기를 비춰 금빛처럼 반짝였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마당 벽에서 날아올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또 경쾌했다.
언제쯤 이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 자유롭게 세상을 유람할 수 있을까?
옆에 있던 임근음이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일은 아마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우리 삼남가는 이미 충분히 어수선해서 더 이상 혼란스러워지면 안 돼.”
이 일은 정말 그녀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임 삼노야의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었다. 임씨 가문에서도 아무도 그를 막지 않을 것이다. 신분도 비천한 첩실 하나일 뿐인데 누가 그녀를 문제 삼겠는가?
장남가와 차남가에도 이런 시녀나 첩실은 적지 않았다.
도씨가 조금만 생각을 해 본다면 이 여자가 바로 황 이낭의 적이 될 거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서로를 괴롭혀댈 것이 분명했다. 도씨는 지금 남매들을 데리고 자신만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도씨가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황 이낭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렇대도 우리가 뭘 어쩌겠어? 조부모님들 귀에 들어가도 그냥 사소한 일로 치부해 버리겠지.”
임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문지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건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야. 양을 한 마리를 방목하나 두 마리를 방목하나 한 무리를 방목하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야. 양들이야 자기들끼리 서로 풀을 뜯겠다고 싸워대겠지. 하지만 양들이 싸워대는 게 집 안에 있는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겠어?”
임근용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실언했다고 느꼈다. 이 양을 방목하는 것에 대한 비유는 전생에 그녀가 강신묘에서 육함을 기다릴 때 만났던 친절하고 유쾌했던 한 여자가 했던 말이었다.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해 쓴 것이었지만, 임근음 같은 대갓집 규수가 양을 방목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어찌 알겠는가?
임근용은 내심 후회가 되어 머릿속으로 뭔가 얼버무릴 말을 찾았다. 그런데 임근음이 말했다.
“너 요즘 왜 그래?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 여계에 분명히 그렇게 써져 있긴 하지만 아내로서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누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겠니?”
임근용은 정말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상황과 신분 때문에 시집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녀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노후에 몸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만약 임 삼노야 같은 남자라면 그저 하나의 물건과 같은 존재이니 제 쓰임에 맞게 잘 활용하기만 하면 되지 굳이 마음까지 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가 첩을 좋아하면 몇 명이든 첩을 들여 흥청망청 살게 해 주면 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은 너무 파격적이라 임근음 같은 순진한 여자가 듣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임근음은 앞으로도 이런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임근용이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날 육륜 오라버니가 했던 말을 듣고 마침 딱 들어맞는 것 같아서 아무렇게나 해 본 말이야.”
임근음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육륜 그 녀석은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야. 그 아이와 자주 왕래하지 말고 헛소리는 듣지도 마.”
임근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씨를 안심시키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 미첩이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녀와 임근음이 임 삼노야의 침실 사정까지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걸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