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평온한 (1)
임옥진은 분노에 차서 육함과 임근용에게 쓴 이 편지에 한참 동안 원망을 쏟아 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이 과정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싸움이 있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임옥진은 육운이 시집을 간 데다 그녀와 육함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지만, 송씨는 아들과 며느리들이 그녀의 곁에서 돕고 있었다. 임옥진 같은 성격은 손해를 안 보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라 송씨에게 무언가 약점을 잡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육 노태야가 그렇게 굴복했을 리가 없었다. 임옥진이 그나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육 노태야의 도움이었을 것이다.
임옥진이 아무리 분개했어도 임근용의 몸과 배 속의 아이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유모를 엄선해 골랐다고 말하며 2월 중순에 임씨 가문에서 최생(*催生: 출산하기 한 달 전에 출산을 축하하고 재촉하는 뜻으로 친정에서 아기 용품 등의 선물을 보내는 것)을 보낼 때 함께 보내겠다고 말했다.
임근용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 육함에게 건네주었다.
“할아버님 병세는 어때요?”
육함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같소.”
집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로 웃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임근용을 안심시켜야 했다.
“당신은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신경 쓰지 마시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어머니를 어떻게 하시지는 못할 거요. 그렇게 오랫동안 어머니 성격을 참아 주신 분들인데 이제 와서 못 참으실 리는 없지 않소.”
임근용이 빙긋 웃었다.
“알았어요.”
그녀는 육씨 가문의 집안일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안 보이니 차라리 속이 편했다. 더구나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설령 임근용이 차남가가 득세하는 꼴이 보기 싫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뭔가를 하려면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임옥진에 대해서는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생에 그녀가 육함과 그 지경에 이르는 동안에 임옥진은 수수방관하기만 했는데 지금 그녀가 뭐 하러 임옥진 걱정까지 해 준단 말인가.
다만 유모는 평주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람이 문랑이든 아니든 임근용이 지금 여기에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일단 사람이 도착한 후에 다시 계획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마친 임근용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춘아를 불러 강씨 쪽에 보낼 만월례(*满月礼: 출생 후 한 달이 되었을 때 하는 선물이나 연회)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그녀가 일사불란하게 거기서 사람을 보내 일을 처리하는 걸 옆에 앉아서 지켜보던 육함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씨는 정말 구제불능의 무능한 인간이었다. 일전에는 임근용에게 맞서 흉악하게 날뛰며 권한을 뺏지 못해 안달이더니, 막상 기회가 주어졌을 땐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망신만 당했다. 그는 육선을 일찌감치 멀리 보내 이런 초라하고 망신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앞으로 삼남가의 미래는 훨씬 더 걱정스러워졌을 것이다.
“아용…….”
지금 집안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고 집안일을 주관할 마땅한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집에서 임근용이 아이를 낳은 후에 아이와 함께 데려가려고 하지는 않을까? 육함은 문득 이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식은땀이 났다.
임근용이 고개를 돌려보니 육함의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 그녀는 자기에게 할 말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 육함을 보고 얼른 손을 흔들어 춘아와 시녀들을 내보낸 뒤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그녀에게 자신과 같은 걱정을 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육함은 점점 더 불러오는 임근용의 배를 보며 결국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했다.
“이제 춘경을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소. 마 장두가 당신 장원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소?”
임근용이 절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그것 때문이었어요? 걱정 마요, 임홍(林洪) 부부가 거기서 지켜보고 있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어머니께서 봐주실 수도 있고요.”
임홍은 임근용이 시집올 때 데려온 시녀로 도씨가 임근용에게 혼수로 떼어 준 장원과 논밭을 관리하고 있었다. 임근용은 육함과 상경하면서 임홍 부부에게 염지의 관리도 맡겼다. 마 장두가 유능한 사람이긴 했지만 주인이 나서야만 해결되는 문제들도 있는 법이었다.
“그럼 문제없겠군.”
육함은 빙긋 웃으며 그 일을 덮어 버렸다.
* * *
화조절이 지나자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졌다. 정원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며 조금씩 푸른 기운이 퍼지더니 이내 온 정원에 가득 찼다. 임근용의 몸은 갈수록 무거워져 이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발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출산할 때 힘이 부족할까 봐 하루에도 몇 바퀴씩 정원을 돌며 운동했다.
3월 하순이 되자 공 마마를 비롯한 사람들이 마침내 경성에 도착했다. 그녀는 일찍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춘아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공 마마는 도씨를 대신해 임근용을 보살피고 그녀에게 최생(*催生: 출산하기 한 달 전에 출산을 축하하는 뜻으로 친정에서 아기용품 등의 선물을 보내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의 피로도 잊고 티 나지 않게 눈을 크게 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공 마마는 정원의 꽃과 나무, 시녀들의 차림새와 언행, 집안의 장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관찰했다. 푸른 기운이 완연한 정원 사이로 연홍색 비단옷을 입고 둥글게 살이 쪄 옥처럼 윤기가 흐르는 임근용이 보였다. 그녀는 두아와 앵두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에 서서 공 마마를 보고 기쁨에 찬 표정으로 웃었다.
“마마 오느라 고생 많았어! 며칠 전부터 계속 기다렸어.”
공 마마는 지금 남들 눈치를 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임근용에게 달려와 눈물을 머금고 절을 하려 했다.
“아가씨, 잘 지내셨어요?”
임근용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그럼, 잘 지냈지, 집안은 평안하고?”
임근용의 눈길이 공 마마의 몸을 스쳐 지나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젊은 부인에게 가 멈췄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월백색 치마에 비취색 상의를 입은 젊은 여자는 바로 문랑이지 않은가?
“다들 평안하게 잘 계세요.”
사 마마가 긴 복도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걸 본 공 마마는 재빨리 눈가의 눈물을 닦고 더없이 기뻐하며 웃었다.
“노태야, 노부인, 대노야, 대부인, 이노야, 이부인, 삼노야, 삼부인까지 모두들 이소야와 이부인을 걱정하고 계세요. 그리고 육 대부인께서 당부하시길 육 대소야와 대소부인 쪽에서…….”
친정 쪽 사람들과 시댁 쪽 사람들이 한시도 눈을 돌리지 않고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임근용은 공 마마의 이 모든 행동이 사 마마에게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눈치채고 문랑에게서 눈을 돌려 웃는 얼굴로 공 마마의 말을 잘랐다.
“어르신들과 형제자매들이 계속 그렇게 걱정을 하셔서 마음이 이렇게 불안한 거였구나! 덕분에 난 잘 지내고 있어. 마마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먼 길을 달려 왔을 테니 일단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숨을 돌리고 밥도 좀 먹어. 아이들이 짐을 다 정리하고 나면 가서 쉬어.”
공 마마도 눈치껏 말을 멈추고 앞으로 나와 사 마마에게 인사를 한 뒤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임근용을 에워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공 마마는 그녀가 떠나온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후 뒤에 서 있던 문랑을 불렀다.
“아가씨, 육 대부인께서 이소부인을 위해 특별히 보내신 유모예요. 문랑, 어서 이소부인께 인사드려.”
문랑은 얼른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임근용에게 큰절을 했다.
임근용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말투로 그녀에게 몇 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쌍복에게 문랑을 데려가 쉬게 하라고 지시한 다음 공 마마와 잡담을 나눴다. 잠시 곁에 있던 사 마마는 부엌에 가서 음식을 살펴야 한다고 말하며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임근용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보고 곧바로 두아에게 나가서 문을 지키라고 눈짓한 다음 공 마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마마, 저 문랑은 이력이 어떻게 돼?”
공 마마도 깊이 아는 건 아니라서 자기가 아는 선에서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임신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온 집안사람들이 전부 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어요. 동지를 전후로 육 대부인께서 친정에 오셨는데 그때 임 삼부인과 이 일에 대해 상의하셨어요. 육 대부인께서 계속 알아보고는 있는데 집안 노비의 자식들 중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친척에게 부탁해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어요. 육 대부인께서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계시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월에 육 대부인 쪽에서 사람이 와서 유모를 찾았고 지금 성격과 행동이 괜찮은지 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요. 2월이 되니 그 유모가 괜찮은 것 같다면서 노비더러 상경할 때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오면서 노비도 사람을 시켜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문랑은 육씨 가문의 친척 집에서 데려온 아이래요. 이소야의 작은 할머니인가 하는 분이 시집올 때 데려온 노비의 며느리라고 하더라고요.”
대략적인 상황은 임근용이 전생에 알고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임근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마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듣고 너무 놀라지 마.”
공 마마가 온후하게 말했다.
“넷째 아가씨, 노비가 아가씨 앞에서 거들먹거리려는 건 아니지만 노비는 아가씨가 자라는 모습까지 다 본 사람이에요. 저한테 아가씨는 남이 아니에요. 삼부인께서 아가씨 곁에 안 계시지만 아가씨 친정에서 온 노비가 있잖아요. 남한테는 못하는 말도 노비한테는 하셔도 돼요.”
임근용이 탄식하며 말했다.
“마마가 나한테 늘 잘해 주는 거야 나도 잘 알지. 근데 이 일은 좀 상식적이지가 않아서 말이야. 내가 섣달 그믐날에 밤을 새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꿈을 꿨거든, 근데 꿈에서 저 문랑을 봤어…….”
임근용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살짝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체적인 꿈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문랑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불안해졌는지 몰라. 난 저 아이가 시중드는 게 싫어.”
공 마마는 역시나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어찌 그런 일이.”
임근용의 표정을 본 그녀는 좋은 꿈이 아닐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더 이상 묻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그런 거라면 저 아이를 아가씨 곁에 둘 수는 없죠. 계속 거슬리실 거 아니에요.”
임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고모께서 마음 써서 보내 준 아이잖아. 주변에 보는 눈도 많은데 자칫 잘못하면 괜히 꼬투리를 잡혀 미움만 사게 될 거야.”
공 마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싱긋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별일 아니니까 아가씨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노비와 같이 온 아이이니 당연히 노비랑 같이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임근용이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한테 일을 맡기면 내가 마음이 놓여.”
공 마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노비가 여기 온 건 아가씨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서인걸요. 그럼 유모는 따로 구하실 생각이세요?”
임근용은 그녀에게 당씨와 반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친구가 보내준 아이들이야.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며칠 관찰해 봤는데 큰 문제는 없어. 경성 출신이라 나중에 따라가려 하지 않을까 봐 일부러 물어봤는데 둘 다 전 주인이 날 잘 모시라고 당부했다면서 뭐든 다 괜찮고 상관없다고 하더라고. 다만 내가 평소에 그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서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가 없어. 마침 마마가 왔으니까 마마가 이 일도 좀 맡아 줘!”
공 마마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노비가 책임지고 잘 처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