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06
406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육함은 피하거나 물러서려 하지 않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찻잔은 그의 앞가슴에 부딪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청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방 마마는 그제야 다급하게 달려들며 간곡하게 뜯어말렸다.
“부인, 그만하세요! 이소야, 부인께서는 정말로 그런 뜻이 아니셨어요. 그냥 천천히 오라는 말씀이셨지 꼭 언제까지 오라고 강요하신 건 아니에요. 부인께서도 아기 공자님을 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육함은 말없이 발밑에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응시했다. 그는 방 마마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거기 서라! 이 배은망덕한 놈!”
임옥진이 큰 소리로 화를 내자 육함은 걸음을 더 빨리하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방 안에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임옥진은 화려한 나전 의자에 기대앉아 분노하고 슬퍼했다.
‘배은망덕하고 괘씸한 놈,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더니 겨우 8품 말단 관리 자리 하나 얻었다고 벌써부터 내가 안중에도 없구나. 하인들 앞에서 이렇게 대들다니, 망신스러워서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어?’
임옥진은 절대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임옥진이 뭘 어떻게 할지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시녀 하나가 문발 밑에서 말했다.
“대부인, 노태야께서 즉시 집현각으로 오라셨습니다.”
* * *
임옥진은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육 노태야가 그녀를 왜 부르는 걸까? 문득 방금 전의 육함의 태도가 떠오른 그녀는 절로 제 발 저려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 마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어쨌든 안 갈 수는 없었다. 임옥진은 편지를 보내기 전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지금 상황에 맞게 다시 한 번 고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전하러 온 시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님께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려라.”
시녀가 가고 난 후 방 마마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당부했다.
“부인, 가셔서 절대로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어쨌든 두 모자가…….”
임옥진은 짜증스럽게 그녀를 노려본 뒤 비녀를 바로 잡고 집현각으로 향했다. 집현각 대문 앞에 도착하니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고 원랑과 호랑이 복도에 앉아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은 임옥진이 오는 걸 보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호랑이 얼른 원랑의 뒤로 숨자 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랑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할머니께 인사드립니다.”
임옥진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쳐들며 두 아이의 곁을 지나쳐갔다. 그녀는 방문 앞에 이르러 육 노태야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듣고 한숨을 돌리며 시동에게 들어가 고하라 지시했다.
시동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안에서 송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고정하세요, 큰형님께서도 효도를 하려고 그러신 걸 겁니다. 아버님께서 아이를 보고 싶어 하시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 말씀을 안 하셔서 아랫사람들이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아버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큰 형님과 둘째도 아마 그래서 그랬을 겁니다. 의랑이가 그렇게까지 어리지 않고, 날이 이렇게까지 덥지 않고, 길도 이렇게 멀지만 않았으면, 아버님께서도 지금쯤 아이를 안아 보시지 않았겠습니까?”
저 가식 떠는 것 꼴 좀 보게, 갑자기 웬 착한 척이야? 임옥진은 내심 미웠지만 문 앞에서 비아냥거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거나 그냥 가 버릴 수도 없어서 그저 문발 밖에 서서 육 노태야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렸다.
육 노태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건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 둘째가 오느라 고생을 많이 했고, 아버지 몸도 좋지 않으시니 저녁 연회에서 술은 빼는 게 어떻겠습니까?”
육 노태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연회는 너희들이 알아서 준비해라. 그만 가 봐라.”
방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임옥진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육 노태야가 그녀를 불러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둔 걸 육건중과 송씨가 보면 체면이 얼마나 상하겠는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더욱더 차갑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등을 곧게 펴고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문발이 들리고 육건중과 송씨가 걸어 나왔다. 두 부부는 그녀를 보자마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큰형수님.”
임옥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육건중은 점잖고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으세요. 형수님께서도…….”
송씨가 그를 툭 밀치고 임옥진을 향해 웃었다.
“형님,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그러더니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원랑과 호랑을 불렀다.
“가자.”
얼마 멀리 가지 않아 호랑이 “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육건중이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때리며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왜 이리 버르장머리가 없어! 매를 버는구나!”
분명히 아이를 혼내는 소리인데도 임옥진은 마치 자기한테 하는 소리로 들려 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화가 목구멍에 콱 막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것 같아 분노하며 손수건만 계속 비틀어댔다. 임옥진은 낮게 기침하며 육 노태야에게 자신이 와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티를 냈다.
방 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저녁 빛이 점점 내려앉으며 노을마저 사라져가자 하인들은 복도를 오가며 등불을 밝혔다. 이에 임옥진의 궁색한 모양새가 더욱 확연히 보였다. 임옥진은 사람들 앞에서 따귀를 맞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며느리가 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방 안에서 쨍하며 무언가 땅에 떨어져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임옥진은 몸을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소야!”
누군가가 대문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임옥진은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문어귀를 스치는 청색 옷자락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육함이 왔다가 상황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얼른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임옥진은 그래도 정면으로 마주치지는 않아 체면을 구기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와라.”
육 노태야가 영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육 노태야는 불이 환하게 켜진 방 안에서 자단목 탁자에 꼿꼿하게 앉아 엄중한 눈빛으로 임옥진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아주 위엄이 넘쳤다. 임옥진은 확 기가 죽어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을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옷깃을 여미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버님!”
육 노태야가 냉소하며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네 시아버지라는 걸 기억은 하나 보구나.”
임옥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느리가…….”
“내가 언제 너더러 일어나라 했느냐?”
그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지만 큰 힘이 담겨 있었다.
임옥진이 억울해하며 다시 절했다.
“꿇어라.”
임옥진은 다리에 힘을 풀며 온순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굴욕적인 기분에 얼굴 가득 눈물을 쏟았다.
육 노태야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15살이 되자마자 이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육 노태야는 그녀가 옅은 분홍색 비단옷을 입은 채 활짝 핀 연꽃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그와 육 노부인의 방으로 찾아왔던 때가 떠올랐다. 임옥진은 다정하게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며 애교를 부렸고, 전혀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그녀보다 나중에 시집온 송씨와 여씨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늘 굳어 있는 그녀들과 임옥진은 당연히 비교할 수 없었다.
부부는 딸이 없어서 그런지 대대로 친분을 맺고 있는 집안의 이 딸이 결점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 식구인 것처럼 편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임옥진이 까탈을 부려도 웬만해선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임옥진은 하루도 편하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 그녀는 지금과는 달라서 그의 장남 역시 이 혼사에 아주 만족해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이렇게 연거푸 요절을 하면 아무리 강한 여자라도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 노태야는 임옥진이 한동안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장에서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옥진이 지금 그를 건너뛰고 멍청한 짓을 하며 그의 귀한 자식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육 노태야의 마음은 차갑게 굳어, 그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멍청한 것!”
임옥진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집온 지 한참 됐지만, 육 노태야나 육 노부인이 그녀를 꾸짖을 때는 늘 좋은 말로 돌려 했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육 노태야가 차갑게 말했다.
“아마도 내가 갑자기 죽어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을 게야. 너 혼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길 수 없을 테니, 결국 남들이 이익을 다 차지할까 봐 걱정이 됐겠지.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빨리 네 친조카딸을 데려와 널 도와 네가 좀 더 많이 차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려 했던 것 아니겠느냐!”
임옥진이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아버님, 며느리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육 노태야가 사늘하게 웃었다.
“네 혼수가 꽤 많지만 대부분 아운이한테 주었지 않느냐. 네 조카딸의 혼수는 훨씬 더 많지만 그 아이의 혼수는 결국 그 아이의 것이니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넌 총명한 둘째가 혹시라도 너한테 원한을 품지는 않을까 두려웠을 게야. 그래서 그 아이들이 널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집안사람들이 절대로 널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게지. 안 그러냐?”
임옥진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닙니다! 전 그저…….”
육 노태야는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네가 둘째 손자며느리한테 의랑이를 집으로 데려오라 한 건, 널 대신해서 둘째 손자며느리가 방법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 말고도 네가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냐? 네가 길러서 아이가 너만 따르게 만들려고? 내가 한 마디 충고하자면 네 그런 성질머리로는 누굴 데려다 키워도 널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네 그런 성질을 오랫동안 참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임옥진이 눈을 번쩍 뜨고 창백해진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닙니다, 그것들이 절 골탕 먹인 겁니다!”
육 노태야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다, 아둔한 것. 너랑은 말이 안 통하는구나.”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임옥진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며느리는 아버님께서 안 계시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육 노태야가 여태껏 그녀를 보호해주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육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축하러 온 시동에게 기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계속 이러면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을 게다. 둘째는 우리 육씨 가문의 희망이라는 걸 명심해라. 네가 그 아이를 건드는 건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만 다음번은 없어. 만약 너 때문에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땐 누구도 널 보호해 주지 못할 게다.”
임옥진의 등 뒤로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모든 소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사방은 텅 비어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임옥진은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남한테 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