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20
420화. 선수 치다 (2)
임옥진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뭘 더 기다린단 말이야?”
만약 차남가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당장 육건립에게 달려가 유언장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육건립이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나약한 바보였다. 뭐가 어찌 되든 간에 임옥진은 그 유언장을 직접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임옥진이 몸을 일으키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방죽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부인! 대부인!”
곧이어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맨 앞에 있던 육건중이 어두운 표정으로 범포를 지목하며 호통했다.
“은혜를 잊고 주인을 배신한 이 개 같은 놈을 당장 잡아라!”
범포가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바닥에 밀고 입에 마핵(*麻核: 고문이나 처형을 할 때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에 쑤셔 넣는 동그랗고 딱딱한 열매나 물건, 혀를 마비시킨다는 설도 있음)을 쑤셔 넣었다. 그가 몸부림치자 누군가가 그의 가슴을 힘껏 발로 찼다. 범포는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임옥진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임근용의 손을 잡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육건중을 가리켰다.
“이노야! 이게 감히 무슨 짓이에요!”
육건중은 범포가 제압당하는 걸 지켜본 뒤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오더니 임옥진을 향해 절을 하고 말했다.
“형수님, 놀라게 해드려 죄송해요. 이 개만도 못한 노비 놈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어 더 이상 방자하게 굴게 둘 수는 없었어요.”
임옥진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용서 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단 건가요?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범포는 아버님께서 생전에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에요. 아버님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지금 꼭 이렇게 해야겠어요? 남들이 비웃는 것도 두렵지 않은가 보네요!”
육건중이 침착한 얼굴로 또 절을 하며 말했다.
“형수님, 고정하세요, 방금 제가 약을 관리하는 시동과 의원에게 확인해 보았는데 어젯밤에 바로 이놈이 아버지께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게 농간을 부린 거였어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일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 드릴게요.”
육건중이 인사하고 사람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임옥진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그에게 집어던지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교양머리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큰형님과 조카가 없는 틈을 타서 제멋대로 활개를 치며 큰형수에게 불경하게 굴고 함부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어머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네 마음대로 이 집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어!”
임옥진이 이렇게 나올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육건중은 무방비 상태에서 그녀가 던진 찻잔을 맞아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여태껏 장남가에 짓눌려 살며 가진 갖가지 불만과 원한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육건중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험악한 얼굴로 임옥진을 향해 다가갔다.
육 노태야가 죽고 난 후 활개를 치는 것이 어디 차남가뿐이겠는가? 그건 임옥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줄곧 위에서 군림하며 차남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임옥진은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육건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냉소하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치켜들고 육건중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좋아요, 이노야, 한 대 치기라도 하게요? 큰형님을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큰형수를 어머니처럼 공경하라 했는데 감히 때릴 수 있으면 어디 때려 봐요! 형님과 조카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이렇게 부녀자들을 괴롭히고 싶은 거면 어디 해 보라고요! 내가 서방님을 두려워하면 성을 갈겠어요!”
육건중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고모, 둘째 숙부,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좋게 말로 하세요. 가족끼리 풀지 못할 오해가 어디 있겠어요.”
임근용이 다가가 임옥진을 부축하고 밖에 서 있는 방죽에게 눈짓했다. 방죽이 흠칫 놀라더니 뒤돌아 뛰어갔다. 임근용은 그녀가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걸 보고 시선을 돌려 침착한 눈으로 육건중을 바라보았다.
“둘째 숙부, 범 대집사는 평소에 할아버님께서 아주 신임하시던 분이고 행실과 됨됨이가 어떤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어찌 그런 말 한 마디로 죄를 확정하세요. 그러니 우리 어머님께서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요. 아랫사람이 못된 마음을 품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더구나 이런 일이 밖에 새나가기라도 하면 우리 집안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둘째 숙부께서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주세요.”
임근용은 어쨌든 장남가의 사람이었고, 임옥진과 한 배를 탄 처지였다. 육건중이 이번에 선수를 쳐서 범포를 사로잡긴 했지만, 지금 아무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장남가와 완전히 등을 돌리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임근용이 죽을 때까지 장남가와 차남가가 완전히 갈라서는 일은 없었다. 만약 육건중이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길 생각이라면 그녀의 말을 따를 것이고, 만약 그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임근용도 필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육건중의 시선이 임근용의 얼굴로 떨어졌다. 임근용의 표정은 간곡히 부탁하는 듯했지만 눈빛은 아주 의연했다.
육건중은 속으로 수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다 점점 얼굴과 몸의 긴장을 풀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표정까지는 짓지 못했지만 임옥진을 거의 찢어발길 것 같던 방금 전의 표정은 거뒀다. 육건중은 다시 범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입술이 검푸르게 변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눈을 내리깐 채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 범포를 보며 이미 원수지간이 되었으니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더는 범포를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머지는 육건신이 돌아오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육건중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담담하게 말했다.
“둘째 며느리 네 말이 맞구나. 이런 개만도 못한 천한 노비 하나 때문에 우리 두 집안이 서로 의 상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다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고 그건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 밝힐 것이다. 이건 외원의 일이고 여자들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조카며느리 네가 큰형수님을 좀 설득해 주렴. 이런 놈한테 속아서 큰일을 망치면 안 되지 않겠느냐.”
‘여자들은 외원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임옥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비웃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난 임씨 집안에서 정식으로 시집온 이 집안의 맏며느리이고 봉호를 받은 안인(*安人: 송(宋)대는 랑(郎)이상 관리의 아내를 ‘안인’에 봉했고, 청(淸)대에는 6품관의 아내를 안인이라 칭했음)이에요! 그런데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요? 아버님께서는 생전에 올바른 도리로 사람을 설득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관아에서도 세 번의 재판을 거쳐 증거를 모두 갖추어야 유죄 판결을 내리는데, 범포가 정말로 무슨 잘못을 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건 말도 안 되죠. 이노야가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뭔가 떳떳하지 못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네요.”
“무슨 의도가 있다는 겁니까?! 형수님이라 그나마 이 정도로 참는 것이니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육건중은 이렇게 말하며 마음속으로 임옥진처럼 제멋대로 구는 인간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녀와 말씨름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뭘 꾸물대고 있어? 어서 저 놈을 잡아서 끌고 가지 않고!”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그녀 또한 오늘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임옥진이 얼굴을 붉히며 크게 소리쳤다.
“누가 감히? 너희는 가만히 서서 뭣들 하고 있느냐? 이렇게 내 체면을 짓밟는데 빤히 보고만 있을 게냐? 오늘은 범포가 이런 꼴을 당하지만 내일은 바로 너희들이 이 꼴이 될 것이다!”
육건중이 자기 사람들을 한 무리 데려온 건 사실이었지만 임옥진에게도 자기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가 시집올 때 임씨 가문에서 데려온 사람들과 강남에서 데려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임근용의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노태야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성질을 누르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좁은 길목에서 적을 맞닥뜨리면 더 용감한 쪽이 이기는 법이니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임옥진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한 무리의 시녀들이 즉시 대답하며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양쪽으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했다. 만약 노태야가 이 꼴을 보았다면 화가 나서 다시 벌떡 일어났을 것이고, 노부인이 보았다면 노발대발하며 다시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임옥진이 냉소했다.
“이노야, 소란을 피우고 싶은 거면 얼마든지 피우세요. 제가 끝까지 상대해 드릴게요. 아용, 넌 가서 셋째 숙부와 숙모를 모셔오고, 밖에 계신 가문 어르신들도 전부 다 모셔오너라. 그분들에게 우리 온화한 이노야께서 어떻게 노복들을 핍박하고 우리 같은 부녀자를 괴롭히는지 보여드려야겠다.”
육건중이 비웃었다.
“형수님, 소란은 제가 아니라 형수님이 피우고 있지요. 전 이런 근본적인 옳고 그름과 관련된 문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아요. 형수께서도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기 전에 큰형님과 둘째 조카의 평판도 생각을 하셔야지요. 봉호를 받은 부인께서 부도덕하다는 소리나 들으시면 안 되지 않겠어요? 형수님께서 악랄한 노비를 이렇게까지 싸고도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것도 없는 법이다. 지금 차남가에는 관직에 나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명성을 잃는 것이 더 두려운 건 장남가가 아니겠는가?
“어디 한 마디만 더 해 보시지?”
임옥진은 펄쩍펄쩍 뛰며 육건중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
임근용은 격노한 임옥진을 덥석 안고 육건중을 향해 ‘간절하게’ 말했다.
“둘째 숙부,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희 친정 할아버지께서 아침 일찍 부고를 들으셨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외원에 도착하셨을 거예요.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 보기 좋지 않으니 너무 심한 말들은 하지 마세요. 하늘의 도리는 명백해서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했어요. 진실이 거짓이 될 수 없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잠시 한 발짝씩만 물러나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육건중은 임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이 추태를 보는 것도, 앞으로 장남가와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아서 그들이 오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육건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임근용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젯밤 할아버님께서 셋째 숙부께 돌아가신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하는 유언장을 주셨다고 해요. 아마 거기에 분명히 범 대집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적혀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둘째 숙부께서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조카며느리가 셋째 숙부를 모셔오라고 했으니 모두 앞에서 정확하게 해명하고 이 오해를 푸시는 게 어떨까요? 싸워서 양쪽 다 다치면 좋을 게 없잖아요.”
만약 육건중이 정말로 육 노태야의 그 유언장 때문에 범포에게 손을 댄 것이라면, 임근용은 지금 그 일을 이렇게 폭로함으로써 이미 범포의 입을 막기는 늦었다는 걸 일깨워 줄 생각이었다. 기왕에 막지 못했다면 괜히 힘 빼지 말고 범포의 목숨을 살려 주고 협상의 여지를 남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이 말이 정말일까? 노인네가 정말 그런 수작을 부렸을까? 육건중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임근용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