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29
429화. 시작
법사가 한 차례 끝나고, 사람들이 잠시 쉬러 밖으로 나가자 임근용은 임옥진에게 다가가 부축하며 속삭였다.
“범 대집사를 보러 갈까요?”
임옥진은 기쁜 듯 눈을 반짝이면서도 입으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제야 머리가 좀 굴러가는 모양이구나, 여태껏 나 혼자만 노심초사하는 줄 알았다.”
임근용은 그녀와 길게 말하기도 귀찮아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따 범 대집사를 만나면 고모께서 말씀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말을 할까요?”
임옥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영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네가 말해라.”
임근용이 그녀를 떠보았다.
“그럼……. 고모께서도 잘 협조해 주실 거죠?”
임옥진은 약간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러 일을 망칠까 봐 걱정했지만, 그녀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옥진은 임근용이 최선을 다해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근용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고모께서 못 하시겠으면 괜히 사람들 힘을 낭비할 필요 없어요. 일이 제대로 안 되면 할머님의 반감만 사게 될 거예요. 어쨌든 범 대집사가 아직 죄인 신분이잖아요.”
임옥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
“제대로 못 하기만 해 봐!”
“예.”
임근용이 이렇게 임옥진과 동행하는 건 그저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 * *
범포는 차갑고 딱딱한 나무 침상에 앉아 좁은 창문을 통해 금색 하늘에 떠 있는 붉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 밖은 분명 아름답고 편안한 저녁 시간일 것이다. 정수리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가 아무리 장남가와 삼남가의 동정과 지지를 받았어도 여전히 잡혀있는 죄수의 신세이고,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그는 육 노태야가 살아있었을 때가 떠올라 절로 가슴이 아팠다. 문밖에서 여자가 걸을 때 치맛자락이 마찰하며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긴장하며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 * *
임근용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협소했고 사방의 벽은 깨끗했다. 한쪽 벽에는 너비가 3척 정도 되는 초라한 나무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낡고 얇은 이불이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한쪽 다리가 기운 나무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물을 담은 낡은 도자기 항아리와 조악한 도자기 그릇이 하나 놓여 있을 뿐 그 밖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범포의 머리에 난 상처는 이미 깔끔하게 치료가 되어 있었고 옷도 두툼해 다행히 기력은 있는 것 같았다.
범포가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한쪽에 서서 임근용에게 말했다.
“이소부인, 앉으세요.”
그러더니 살짝 자조하듯 초라한 나무 침대를 보며 말했다.
“물론, 이소부인께서 더러운 걸 참으실 수 있으시다면요.”
임근용은 앉지 않았다.
“범 대집사,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대집사는 지금 환자잖아, 그러니 편하게 해. 난 여기 서서 몇 마디만 하고 갈게. 어머님께서 나한테 대집사가 괜찮은지 보고 오라고 하셨어, 몸은 좀 괜찮아?”
범포가 시선을 피하며 처량한 눈빛으로 말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노비의 목숨은 대부인과 이소부인께서 살려주신 거나 다름없으니 시키실 일 있으면 분부만 하세요.”
노비는 정말 비참한 신분이었다. 주인이 용납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자유롭게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슬픔과 분노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임근용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네.”
범포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에요, 노비가 지금 이렇게 잘 입고 잘 먹고 부족하지 않게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건 다 대부인과 이소부인께서 덕이 많으신 덕분인걸요.”
어떤 일들은 한 번 일어나면 용서하기 쉽지 않은 일도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육씨 가문 사람들을 대신해 범포에게 사과하거나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임근용과 범포 사이에 여태껏 아무런 친분도 없었기 때문에 범포를 움직이려면 이해관계를 들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범 대집사는 지금껏 할아버님의 가장 유능한 오른팔이었으니 육씨 가문 장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집사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또 대집사도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그 사람이 어떻게 수작을 부리는지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지금껏 대집사가 처리한 일이 아주 많잖아. 설령 대집사가 억울하다는 걸 모두가 안다 하더라도, 뭔가 효과적인 수단으로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면 아마 우리 아버님과 이소야가 돌아와도 대집사를 구해 주기는 힘들 거야.”
“대노야와 이소야께서도 노비를 구하실 수 없다면, 이소부인께서도 노비를 돕기는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범포는 기운이 쭉 빠졌다. 상대를 공격해서 제거하는 전략은 꼭 상대의 잘못을 찾아냈을 때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잘못이 없으면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없던 잘못을 만들어 내거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꾸미는 건 별로 어려울 일도 없었다. 육건중은 그가 육 노태야를 죽였다고 비난했고, 절대 말을 바꿀 리 없었다. 잠시 미뤄둔 상태이긴 하지만 육건중의 성격을 고려해 보면 후환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육씨 가문의 가게들은 지금 대부분 육건중의 명의로 넘어간 상태였다. 일찍이 육 노태야와 범 대집사에게 충성했던 사람들도 이제 주인이 바뀐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총명한 자라는 말이 있듯 육건중이 그에게 돈을 횡령하고 주인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면 분명 나서서 그를 지목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증거가 확실하면 그가 뭘 더 어쩔 수 있을까? 임근용이 돕는다고 과연 어디까지 도울 수 있을까?
임근용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해 보지 않은 일이라 누구도 결말을 장담할 수는 없어. 내가 마음대로 넘겨짚을 생각은 없지만, 내가 볼 때 지금 대부인과 삼노야는 두 분 다 범 대집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아.”
범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부인, 노비가 어리석게 살긴 했어도 절친한 지기 몇 명은 두고 있어요.”
임근용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날 돕는다면, 일이 잘 되든 안 되든 그 사람들의 체면과 안전은 내가 보장할게.”
범포가 웃으며 말했다.
“육씨 가문에서 내쳐지더라도 이소부인의 가게에서 몇 명 더 거둬주실 수는 있겠지요.”
* * *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며 하늘가의 구름과 노을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임옥진은 잎이 다 떨어진 오동나무 아래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나더러 꾀병을 부리며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야?”
임근용이 눈을 내리깔았다.
“예.”
임옥진이 말했다.
“정말로 잘 처리할 자신 있어?”
임근용이 고개를 저었다.
“확신은 못 해요.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잖아요.”
임옥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뒤돌아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때가 되면 나한테 말해.”
사방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임근용은 앵두의 부축을 받으며 영경거로 발걸음을 옮겼다. 앵두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임근용이 고개를 들자 육소가 뒷짐을 지고 영경거의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등롱의 하얀 빛이 비쳐서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육소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둘째 제수씨, 오랜만이네요. 둘째가 과거에 급제했다던데 여태껏 축하 인사도 못 했군요.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이 벌써 떠나고 없더라고요.”
임근용이 무릎을 굽혀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큰아주버님, 별말씀을요.”
육소가 웃으며 말했다.
“둘째 제수씨는 여전히 예의가 참 바르시네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훌쩍 가 버렸다.
앵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또 무슨 못된 꿍꿍이 속이기에 저리 괴상하게 구는 걸까요?”
임근용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마 질까 봐 겁나서 일부러 겁주러 온 걸 거야. 감히 우리한테 뭘 어쩌겠어.”
아직 젊은 육소는 육건중과 송씨처럼 침착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이런 악취미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 * *
실내는 밝고 따뜻했다. 의랑은 두아가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을 해 주자 다소 흥분하며 의기양양한 기세로 침상 위에 두 발로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임근용이 다가오는 걸 보더니 즉시 크게 소리 지르며 두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임근용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 그를 안고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은 누가 왔다 갔느냐?”
두아가 말했다.
“여섯째 공자께서 오셔서 30분 정도 계시다 가셨어요. 선물로 도자기 인형을 주셨어요.”
예쁜 포장지로 포장된 상자 안에 총 12개의 도자기 인형이 들어 있었다. 하나 같이 고운 비단옷을 입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랑이 가지고 놀기에는 아직 일렀지만 그래도 꽤 귀여운 선물이었다. 임근용은 미소 지으며 이 정도면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 * *
이튿날, 임근용은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평소처럼 육 노부인의 세면, 밥, 약을 챙긴 뒤 빈소에 가서 효를 다했다. 시간이 절반쯤 지났을 때 방죽이 들어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소부인, 임 삼부인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세요, 임 칠공자께서 밖에서 이소부인을 기다리고 계세요.”
임근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임옥진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육 노부인에게 가서 친정에 잠시 다녀와도 되겠냐며 허락을 구했다. 육 노부인은 임 이노부인과 함께 있었지만 아무 의심도 없이 말했다.
“네가 집에 돌아온 후로 아직 친정에 인사도 못 드렸구나, 이왕 가는 김에 의랑이도 데려가서 저녁까지 먹고 오너라.”
임근용은 감사 인사를 하고 선물을 한 보따리 싸서 의랑과 함께 친정집으로 향했다.
* * *
이제 13살이 된 임신지는 옅은 남색의 장포를 입고 단정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중문 밖에 서서 수시로 안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임근용이 의랑을 안고 나오자 그의 눈에 기쁜 기색이 스치더니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임신지는 애써 감정을 누르고 애어른 행세를 하며 임근용에게 다가가 엄숙하게 인사했다.
“넷째 누나 잘 지냈어? 어머니께서 나한테 가서 누나를 데려오라 하셨어.”
임근용이 집으로 돌아온 후로 두 사람은 이제야 처음 만난 것이라 서로 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임근용은 그가 벌써 반쯤은 어른이 되어 있는 걸 보고 내심 기쁘고 감격스러워 말없이 의랑이를 임신지에게 안겨 주었다.
임신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이건 임근용이 그에게 아이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자는 걸 돌려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신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임근용을 따라 마차에 오르더니 의랑의 찐빵 같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낮게 말했다.
“넷째 누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사실 2년 정도 있다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누나가 있는 경성에 가서 한 2년 정도 여행하며 견문을 좀 넓히면 어떨까 했었거든. 근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