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43
443화. 예절을 지키다
육건중이 나갈 채비를 마치자 육소를 포함한 가족들도 황급히 달려왔다. 원랑과 호랑은 졸린 눈으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강씨는 잠에서 깨 시끄럽게 울어대는 역랑을 품에 안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다 우거지상이었다. 육건중은 한숨을 내쉬고 려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육소에게 물었다.
“네 부인은?”
육소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몸이 안 좋다고?! 벌써 출산한 지 한 달도 더 지나지 않았느냐?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은 게냐! 당장 오라고 해!”
육건중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하다 제일 먼저 육소에게 퍼부었다.
송씨가 황급히 말렸다.
“화내지 말아요. 얼른 가요.”
그들은 부랴부랴 영경거로 달려갔다. 노부인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고 육건신과 육건립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육건중이 황급히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 이렇게 일찍 오시다니요. 어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으셔서 이른 아침에는 방해하지 않는 게…….”
육건신이 딱딱한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둘째야! 너한테 뭐라 하려는 건 아니다만, 지켜야 할 예절은 지켜야지!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으실 때야 말로 자식들이 더 각별하게 신경 쓰고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효도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육건신은 뒤에서 려씨가 황급히 달려오는 걸 보고 절로 냉소하며 말했다.
“윗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일 줄 알아야지, 자기도 제대로 못 하면서 아랫사람한테 법도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너나 잘하라고 비웃음이나 당하지!”
육건중은 속으로 오늘 따라 재수도 더럽게 없다고 생각하며 분노했지만 감히 뭐라 대꾸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매섭게 려씨를 노려보았다.
육건중은 한쪽에서 화를 참으며 씩씩거렸고 려씨는 한껏 억울해했다. 육건신은 또 한 사람이 빠진 걸 발견했다.
“다섯째는? 며칠 동안 빈소를 지켰다더니 많이 피곤한가 보지?”
육건중이 포효하였다.
“빨리 가서 그 후레자식을 데려와!”
육건신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어머니께서 깨시면 어쩌려고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난 그냥 아이가 어떤지 물어본 것뿐인데, 그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이야?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피곤해서 신경이 너무 곤두선 것 아니냐?”
송씨가 얼른 말했다.
“예, 큰아주버님, 이 사람이 건강이 안 좋아진 지 꽤 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꾹 참으며 버티고 있는 거예요. 다리에 관절염이 심하게 도졌거든요.”
육건신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육건중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너도 한동안 고생했으니 힘들면 억지로 버티지 말거라. 아무도 널 탓할 사람은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넌 푹 쉬어도 괜찮다.”
육건중이 화를 참으며 점잖은 척했다.
“효를 다하는 것뿐인데요.”
육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육륜이 달려왔다. 그는 대충 눈치를 채고 오자마자 육건신 앞으로 달려가 사죄했다. 그런데 육건신은 그를 많이 나무라지 않고 그저 입에서 나오는 데로 몇 마디만 했다.
육륜은 육함을 툭 건드리며 귓속말을 하려다가 임근용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어젯밤에 한 일을 또 임근용에게 들킨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육륜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지금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어서 눈을 내리깔고 시치미를 뗐다.
육 노부인이 눈을 뜨자마자 사 마마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부인, 대노야와 가족분들께서 문안을 드리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육 노부인이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사 마마는 소심에게 사람들을 들이라고 눈짓하고, 인내심 있게 노부인에게 설명했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와서 계속 기다리셨어요. 대노야는 정말 효심이 지극하신 분인 것 같아요…….”
육 노부인은 그녀의 말을 들었지만, 자기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그런 일까지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노태야가 없어진 지금,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이 이 집안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가족들은 아마 모래알처럼 제각기 흩어질 것이다. 그녀는 장남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하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무리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원랑과 호랑은 추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 들어오자마자 평소처럼 노부인에게 달려들었다. 호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얼어 죽을 뻔했어요. 증조할머니, 왜 이제야 일어나셨어요.”
그러더니 사 마마에게 물었다.
“뭐 먹을 거 있어? 나 배고파 죽겠어.”
노부인은 자애로운 성격인 데다 호랑과 원랑은 또 오랫동안 노부인과 함께 지낸 사이였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에 익숙했고, 지금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어른들이 자애롭게 받아 주는 건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육건신은 여기서 바로 기회를 포착했다. 육건신이 얼굴을 굳히며 소리를 질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 이게 어른께 문안을 드리는 태도냐?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도 구분하지 못하고 장유유서가 뭔지도 모르는구나. 이 무슨 망측한 꼴이란 말이냐? 증조할머니를 모시는 사람을 부르면서 호칭도 붙이지 않고 정말 예의라고는 모르는구나! 벌써 어린 동생을 둘이나 둔 형이 되었으면서, 모범을 보일 생각은 안 하고, 동생들까지 망칠 셈이냐?”
그의 말에 차남가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육건신의 말은 하나같이 법도에 들어맞는 말이라 무슨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노부인을 제외하면 장남이자, 큰아버지이고, 큰할아버지이기도 한 육건신의 신분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구든 당당하게 훈계할 자격이 있었다.
이제 사리 분별을 조금 할 수 있게 된 원랑이 주변을 살폈다. 그는 자기 집안 어른들이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부인 또한 말없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원랑은 예의바르게 자기 아버지 곁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 무릎을 꿇었다.
“손자가 실수했습니다. 증조할머니께 문안드립니다.”
하지만 호랑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육건신과 임옥진을 보더니 다시 자기 할머니를 보고 육 노부인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증조할머니, 무서워요!”
육건중은 호랑의 이런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살짝 활기가 도는 눈으로 말없이 육 노부인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았다. 육 노부인도 더는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어 두 증손자를 감싸 주려 하는데 육건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큰조카야, 지금 아이를 제대로 가르쳐야지 더 크면 바로잡기가 힘들 게다.”
호명을 받은 육소는 화가 났지만 눈을 딱 감고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와 육 노부인의 품에 있는 호랑을 끌어내 뺨을 때렸다. 호랑이 “와” 하며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육 노부인은 마음이 아파 부들부들 떨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게냐? 아직 어린아이지 않느냐!”
육건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조카야, 아이가 아직 어리지 않느냐. 잘못을 한 건 사실이다만, 네 아이니 데려다 천천히 타이르면 될 것을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난 그저 아이를 잘 가르치기 위해 그런 것인데 이제 보내 내가 잘못 한 것 같구나.”
그러더니 호랑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네 아버지도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란다. 우리 육씨 가문도 어쨌든 문인 가문이고 너도 이제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니 얼마 안 있으면 공부를 시작하게 될 게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육소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는 어디로 분출되지 못한 화가 가슴에 쌓여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려씨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화가 나고 또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이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려씨는 속으로 자기 자식을 때리기까지 해놓고 조롱을 받은 육소를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욕했다.
육건신은 한 차례 공연을 마치고 육 노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다 소자의 잘못이에요. 어머니께 효도하고자 했던 것인데 이른 아침부터 기분만 상하게 만들어 드렸네요.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그가 무릎을 꿇자 임옥진, 육함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육 노부인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다들 일어나라.”
육건신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성스럽게 노부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는 온화한 말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은 육 노부인에게 마음을 편안히 먹고 건강을 잘 돌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집을 비웠음에도 여전히 자상하고 사려 깊었다. 육 노부인은 약간 불만스러웠던 감정마저 이내 풀려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육건중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서 바깥일을 봐야 해요.”
이건 밖에 나가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바탕 울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육건신이 아쉬운 듯 몸을 일으켰다.
“엄마, 이따가 다시 모시러 올게요.”
그의 이 엄마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육륜이 임근용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
“둘째 형수, 나 찾았어요?”
임근용이 말했다.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내 말은 왜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건데요? 정말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육륜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뜻이 있는 법이잖아요. 둘째 형수가 비밀을 지켜 줘서 고맙긴 하지만 더는 날 말릴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도 선악이나 시비는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평소처럼 육선과 이야기를 나눴다. 임근용만 넋이 나간 채로 거기 남겨져 있었다.
* * *
이날 아침, 차남가 사람들은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빈속으로 한참 동안 울며 절을 해야 했다. 이런 실랑이를 점심때까지 계속하자 다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던 육건신은 다정한 목소리로 육건중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장례에 관해서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게 많더구나. 오늘 날씨도 좋고 특별한 일도 없으니, 지금 같이 상의해 보는 게 어떠냐?”
육건중이 지금 그와 논쟁할 기력 따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곧 무릎을 끌어안고 “아이고” 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육건신이 탄식하며 말했다.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래, 그럼 넌 일단 가서 좀 쉬어라. 내가 어머니하고 상의해 보마.”
육건중은 속으로 부장품(陪葬品)외에 돈을 벌 만한 다른 일들은 이미 다 결정해 두었으니 육건신이 지금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그는 마음을 놓고 대담하게 쉬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