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전에 살던 곳
마차가 가다 서다 하더니 마침내 육씨 저택의 중문 앞에 멈췄다.
나이든 시녀 하나가 푸른색 우산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날이 춥고 눈이 많이 오니 아가씨들은 피풍(*披风: 지금의 망토와 비슷한 여성용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임근용은 여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뒤 눈을 들어 함박눈이 흩날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하고도 낯선 육씨 가문 안마당이 끝도 없이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육씨 가문 저택은 임씨 가문 저택과 마찬가지로 모두 고택에서 점진적으로 증축한 형태였다. 백 년 묵은 오래된 나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꾸며진 이곳에서 그들의 자손들도 번성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근 6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벽돌 하나에도 모두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행복했던 적도 슬펐던 적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행복했던 기억이 슬펐던 기억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과 기쁨을 회상하는 걸 좋아하고, 실패와 슬픔을 회상하는 걸 싫어한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그녀의 모든 실패와 역경을 증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두려움 없이 과거에 직면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건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맨 앞에서 대열을 이끌고 있는 임 삼공자의 부인 문씨가 시중드는 시녀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오니 아가씨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잘 모셔라.”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던 나이든 시녀가 유쾌하게 말했다.
“부인, 걱정 마세요. 어젯밤에 우리 부인께서 날씨를 보고 눈이 올 것 같다며 청설각(听雪阁)의 구들장을 데워 놓으라고 하셨어요. 하룻밤을 데웠더니 지금 아주 따끈따끈 하답니다. 지금은 춥겠지만 들어가시면 아마 털옷을 입고 있는 게 덥다고 느껴지실 거예요.”
임근용의 우산을 받쳐 준 또 다른 나이든 시녀 역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인께서 오늘 난로회를 여시다니 정말 날을 잘 고르셨지요. 때맞춰 눈도 오고 청설각 밖에 있는 납매(*腊梅: 음력 섣달 전후에 피는 매화)도 아주 예쁘게 피었답니다. 향이 정말 좋아요.”
“오.”
임근용은 청설각 밖의 매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납매뿐만 아니라 홍매(*红梅: 매화의 일종)도 있어 초겨울부터 겨울 끝자락까지 계속 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막 시집왔던 해였다. 그들은 한밤중에 눈이 오는 소리를 듣고 육함과 함께 나가 차를 끓이는 데 쓰려고 매화에서 눈을 쓸어 담아 나무 밑에 묻어두었었다.
하지만 이듬해 눈 녹은 물이 가득 담긴 그 항아리는 잊혔다.
임근지가 갑자기 임근용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넷째 언니, 향이 정말 좋아요. 지난번에 육함 오라버니가 날 데리고 납매의 눈을 쓸러 갔었어요. 눈에서 향기가 나더라고요. 오라버니가 그걸로 내년에 차를 끓여 주겠다고 했어요.”
임근용은 임근지를 힐끗 쳐다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도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했을지도 모르지만 육함을 두고는 결코 경쟁할 생각이 없었다. 환심을 살 생각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 그녀는 임옥진과 육운이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 짓을 해야만 했다.
임근지는 자신의 옹졸한 마음이 임근용의 맑고 투명한 눈빛에 그대로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는 임근용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갑자기 뒤에 있던 임근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매화에서 쓸어내린 눈으로 끓인 차를 마셔보고 싶네……. 넷째 언니, 언니도 차를 좋아하잖아요. 혹시 언니한테도 그런 물이 있어요?”
임근주가 말했다.
“됐어, 언니한테 있어도 고모네 집 거랑은 맛이 다를 거야.”
임근옥이 말했다.
“그럼 고모님께 육함 오라버니가 다섯째 언니한테 차를 끓여줄 때 우리도 불러달라고 말씀드려봐야겠어.”
임근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 계집애야, 눈 녹인 물로 끓인 차 한 잔을 구걸하다니, 너 정말 우리 임씨 가문 아가씨 맞아? 아주 부끄러워 죽겠어. 어디 가서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하지 마!”
쌍둥이는 서로 빈정대며 시끄럽게 굴었다. 임근지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근주랑 근옥이가 아주 재밌는 말을 하네…….”
임근주와 임근옥은 동시에 하하 웃으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지 않아요?”
문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행을 삼가하세요!”
아가씨들은 화가 나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납매 특유의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는 청설각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근용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패의 수술을 만지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 덩어리 하나가 쉭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와 우산을 받쳐 주던 나이든 시녀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시녀가 “아이고” 하며 고개를 돌리자 뒤이어서 날아온 또 다른 눈 덩어리가 그녀의 가슴에 부딪혔다.
이 정원에서 감히 이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사람은 육륜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시녀가 옷에 묻은 눈을 털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오공자, 장난치지 마세요. 손님들이 놀라시잖아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덩어리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얼른 손에 들고 있는 우산으로 눈을 막았다.
느슨하게 뭉쳐있던 눈덩이가 우산에 부딪혀 사방으로 튀며 임근용의 목에도 묻었다. 그녀는 차가워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지와 계원이 다급히 다가와 임근용을 대신해 목에 묻은 눈을 털었다.
그 시녀가 서둘러 사죄했다.
“아가씨, 노비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더니 불평하며 말했다.
“오공자께서 장난이 너무 심하세요!”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전생에서도 그랬다. 만약 육륜이 눈을 던지지 않았으면 아마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터였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청수(冬青树) 뒤에 파란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보였다. 육륜은 털이 부숭부숭한 귀마개를 차고 나무 뒤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발밑에 눈덩이가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일찌감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들이 와서 같이 눈을 던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육륜은 의기양양하게 임근용을 향해 눈을 찡그리더니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 두 덩어리가 윙윙거리며 날아왔다. 이번에는 임근용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전생에 임근용은 이 정도를 모르는 바보 같은 놈이 던진 눈에 맞아 얼굴이 부어 온갖 조롱을 당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해 서둘러 그 시녀가 들고 있던 우산을 뺏어 막았다.
임근주와 임근옥이 하하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 웃겨, 진짜 재미있네!”
그녀들은 웃으며 허리를 굽히고 옆의 작은 나무에 쌓인 눈을 뭉쳐 눈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눈덩이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던졌다.
임근지도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사람들에게 숙녀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우리가 똑같이 멍청하게 굴어서야 되겠어! 남들이 보면 비웃을 거야!”
그러나 임근주와 임근옥은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을 뭉치면서 시녀들에게도 도우라고 지시했다.
문씨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동글동글하게 뭉쳐진 눈덩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육륜 쪽으로 날아갔다. 육륜은 한동안 저항했지만 그녀들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정확히 조준도 하지 않은 채 미친 사람처럼 눈뭉치를 마구 던지며 크게 소리쳤다.
“너네들 숫자도 많으면서 이렇게 파렴치하게 굴 거야! 시녀들한테 도와달라는 건 반칙이지!”
“그럼 오라버니도 하인을 불러서 도와 달라 하든지요!”
임근옥이 던진 눈덩이가 “퍽” 하며 육륜의 이마를 맞혔다. 그녀가 우쭐해하며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이 까만 뚱보, 어디 또 욕해 봐요! 내가 벌받은 건 다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육륜은 사실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화도 내지 않고 그저 눈 뭉치 하나를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임근옥 이 쩨째한 계집애! 그게 언제 적 얘긴데 넌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냐.”
“그래서 또 사고치는 거야? 지난번에 무릎 꿇은 건 다 까먹었어?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야지 안 되겠네!”
동청목 뒤에서 갑자기 몇 명의 소년이 튀어 나왔다. 육함, 오상, 육경이었다.
이 말을 한 것은 육경이었는데, 그는 말하는 동안 한 손으로 벌써 육륜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얀 뚱보! 이 고자질쟁이!”
육륜은 가볍게 피하며 그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여섯째야, 우리 이제 가자!”
동청목 뒤에서 마치 새끼 곰처럼 외투로 둘둘 몸을 감싼 남자아이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대략 여덟 아홉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쭈뼛거리며 소녀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육륜을 따라 멀리 뛰어갔다.
임근용은 그 소년이 바로 육씨 가문 삼남가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이며 육함의 친동생인 육선(陆缮)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병을 달고 살았는데 매년 보약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유난히 응석받이로 자라서 친형제인 육함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마왕 같은 육륜과 친하게 지냈다.
육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육륜, 너 또 선이한테 못된 걸 가르쳤구나! 몸이 약한 동생한테 눈 장난을 시키다니, 셋째 숙모께서 아시면……!”
육함이 갑자기 그의 말을 끊었다.
“셋째야, 그런 말 하지 마. 어린애가 장난치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래? 사촌 동생들도 화내지 않을 거야. 여섯째가 몸이 좋지 않은데 더 많이 움직일수록 좋지.”
그러고 나서 그는 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주먹을 말아 쥐고 공수하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청설각에서 사촌 형수님과 여동생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다들 이제 그만 가요.”
모두들 웃으며 답례한 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쌍둥이가 눈을 돌려 임근지를 보았다. 그녀가 자꾸만 육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쌍둥이들이 키득거리며 비웃었다. 임근지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밖에 눈꽃이 흩날리는 것과 달리 청설각은 안은 시끌벅적하고 따뜻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창가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분장한 여자 예인이 호협 장의전(张义传)을 설창(*说唱 운문과 산문으로 꾸며진 민간 문예)하고 있었다.
임옥진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여러 부인들과 둘러앉아 설창을 들으면서 낮은 소리로 웃었다.
육운도 비슷한 또래의 소녀 몇 명을 데리고 다른 한쪽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끊임없이 재잘재잘 떠들어 대고 있었다.
문씨가 임 씨 자매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옥진, 육운이 잇따라 그녀들을 불러 앉혔다.
임옥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녀들에게 오는 길이 춥지 않았냐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임근용에게 도씨의 몸이 좋아졌냐고 묻고 또 임근음은 왜 안 왔냐고 물었다.
“외숙부 댁에서 동지 선물(冬至礼)을 주러 와서 언니는 나오기가 곤란했어요. 저더러 대신 고모와 사촌 동생에게 사과의 말을 전해 달라 했어요.”
임근용은 방 안 가득한 사람들을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 오늘의 주빈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임옥진의 왼쪽에는 평주(平洲) 지주의 부인 송 씨(宋氏)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은족제비 가죽을 덫 댄 단색 좁은 소매 옷에 울금향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옅게 그린 눈썹에 머리는 크게 쪽을 틀어 올려 금비녀를 꽂았고 체구가 왜소했다.
오른쪽에는 앉아 있는 사람은 오씨 가문의 대부인이자 오상의 어머니인 양씨(杨氏)였다. 그녀는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얼굴에 머리는 봉황 쪽을 틀었으며 은족제비 가죽을 두른 보라색 좁은 소매 옷과 청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육운에게 바짝 붙어 예쁘게 웃고 있는 아이는 오상의 사촌 여동생이자 양씨의 조카인 양미(杨媚)였다. 그녀는 정향색 사향쥐 가죽 옷을 입고 뿔처럼 둥글게 올린 머리에 금구슬을 꽂고, 귀에는 홍옥 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이때 이 육운과 양미는 겨우 7, 8살 정도의 하얗고 뚱뚱한 여자아이를 돌보느라 바빴는데 그 아이가 바로 평주 지주댁의 소저 소진진(苏真真)이었다. 아이는 빨간 옷에 머리를 양쪽으로 뿔처럼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친숙한 아가씨들이 있었지만 임근용은 그저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지금 이 광경은 전생의 그 날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틀림없이 조금 이따 임옥진이 육운의 다도 기술을 선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