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53
453화. 작별 인사
임근용은 내외원이 만나는 길목에 도착해 등불 아래에 서서 머리와 치마를 매만진 뒤 방죽에게 물었다.
“나 괜찮아?”
방죽이 정성껏 그녀의 옷깃을 여며 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날이 어두워서 그늘진 곳에 서 있으면 잘 안 보일 거예요.”
임근용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하늘은 녹지 않은 짙은 먹처럼 아주 어두웠다. 멀리서 스님이 법사를 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며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주견복은 조용히 육륜을 안내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육건신을 모시며 크고 작은 음모와 계략을 많이 봐온 대집사였기 때문에 견식이 넓고 어느 정도 판단력도 있었다. 설령 육건신이 그에게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론 그의 주인이 그에게 모든 걸 다 상세하게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쨌든 주인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 한 마디나 그의 기분 등을 토대로 추측해 보았을 때 육씨 가문에 뭔가 큰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일은 아마도 재난일 것이고 이 새카맣고 건장하며 용맹한 오공자가 그 원인일 것이다.
단순히 사람을 불러다 뭔가 묻고 싶은 거였다면, 왜 이렇게 힘센 장정들을 딸려 보내고 육건중의 심복 집사까지 보내 그를 지키겠는가. 육건신은 눈빛과 말투를 통해 주견복에게 이 일에 착오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
육륜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허리와 등을 곧게 편 채 안정감 있게 걷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주견복에게 어르신들이 그를 부르는 이유나 목적에 대해 물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육륜에게서는 어린 사람이 갑자기 어르신들에게 불려갈 때의 당황스러움이나 미심쩍어하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견복은 육건신이 재임하고 있을 때 육함이 임옥진과 육운을 따라 육건신에게 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 당시 육건신은 늘 갑작스럽게 육함을 불러 학업 상황에 대해 확인하거나 손님을 만나자고 데리고 나갔고, 때로는 불러다 혼을 내기도 했다. 그때는 육함도 아직 어린 나이라 내심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육건신이 무슨 이유로 그를 찾는 것인지 먼저 물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육함은 늘 허리를 곧게 펴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두 형제는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멀리 앞쪽 길목에 두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매가 고운 사람이 한 발짝 앞서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육씨 가문의 여주인임이 분명했다. 누구일까? 주견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지만 날이 너무 어둡고 두 사람이 빛이 어슴푸레한 곳에 서 있어서 누군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양측이 점점 가까워지자 육륜이 큰소리로 외쳤다.
“둘째 형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왜 여기 계세요?”
주견복은 그제야 그 사람이 임근용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르긴요. 어머님 댁에 아침 시중을 들러 가는 중이에요.”
임근용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오공자는 이렇게 일찍 어디 가는 거예요?”
육륜이 임근용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별일 아니에요. 사소한 문제가 좀 생겼는데 내가 가서 처리하면 돼요.”
“그렇군요.”
임근용이 그에게 손짓했다.
“마침 잘 됐네요! 안 그래도 물어 볼 게 있었는데 잠깐 이리 좀 와 봐요.”
주견복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으며 임근용에게 인사했다.
“소인이 이소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대노야와 이소야께서 오공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불빛 아래에서 임근용의 미소가 아주 차가워 보였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주 대집사, 내가 오공자랑 말 한 마디도 하면 안 된다는 건가? 자네를 방해하지 말라 이거야?”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자 주견복도 더는 이 집안의 미래 대부인이 될 사람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그가 공손하게 말했다.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이소부인께서 편할 대로 하십시오.”
주견복은 사람들을 데리고 한쪽으로 비켰다. 육건중의 심복 집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나서서 저지했다.
임근용이 육륜에게 한쪽 옆으로 오라고 눈짓했다.
“오공자, 이리 오세요.”
육륜은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인내심을 발휘하며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에요? 둘째 형수,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는 게 어때요?”
임근용이 그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빨리 도망가요. 시간을 지체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거예요.”
육륜은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눈을 크게 뜨며 임근용을 응시했다. 임근용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말아요.”
순간 임근용은 한 인생의 흥망성쇠를 목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육륜의 눈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천천히 사그라지며 결국 죽음과 같은 황량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허…….”
그는 가볍게 웃으며 평온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날씨가 추워요, 둘째 형수는 얼른 돌아가세요.”
육륜이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걸까? 그는 자기 가족들이 정말로 자기를 독살할 거라는 걸 믿지 못하는 걸까? 설령 육륜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가 떠나 버리고 나면 사람들도 그에게 더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임근용은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내가 잠도 안 자고 여기서 찬바람을 쐬며 오공자를 기다린 게 뭣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육륜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둘째 형수. 둘째 형님한테 잊지 말고 고맙다고 전해 줘요.”
임근용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오공자…….”
하지만 육륜은 이미 뒤돌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임근용이 그에게 다가가 막으려 하자 육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아주 작게 한 마디 한 뒤 큰 소리로 주견복을 불렀다.
“가자!”
하늘가가 마침내 물고기 배처럼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임근용은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육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따라 눈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고, 그 눈물이 입술 가에 닿자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울부짖으며 방죽에게 말했다.
“빨리, 이소야를 찾아와! 뭘 하고 있든 무조건 돌아오라고 해!”
임근용은 치마를 들고 영경거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육륜의 목소리가 아주 작긴 했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그녀의 말을 안 믿긴 뭘 안 믿는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하긴 뭘 못 알아들었단 말인가? 육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길을 가려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했던 선택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려 하고 있었다. 육륜이 한 감사와 축복의 말은 육함과 임근용에게 남기는 작별 인사였다.
임근용은 필사적으로 달려 곧 영경거에 도착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난 소심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심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소부인, 어디 갔다 오시는 거예요? 뭐 하시려고요?”
임근용이 옷깃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급한 일이야, 지금 당장 할머님을 뵈어야 해!”
정말 다사다난한 가을이었다. 소심은 하늘색을 한 번 살피고 숨을 헐떡이는 임근용을 얼른 부축했다.
“이소부인, 진정하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노비가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육 노부인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 늘 잠을 얕게 잤다. 그녀는 종종 안정제를 복용해야만 겨우 잠에 들었지만, 잠에서 깨는 건 오히려 쉽지 않았다.
소심이 방안으로 들어가니 당직을 서던 소란(素兰)도 방금 일어났는지 임시 침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두르는 소심을 보고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새벽부터 왜 뛰어다니고 난리야, 개한테 쫓기기라도 했어?”
소심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디다 대고 헛소리야! 개는 역시 개소리밖에 할 줄 모른다니까.”
그러더니 뒤돌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소란은 뭐라 대꾸를 하려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임근용을 보고 얼른 표정을 바꾸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소부인, 노비가 입방정을 떨었네요. 용서해 주세요.”
마음이 다급한 임근용이 지금 그녀와 이런 걸 따지고 있을 겨를이 어디에 있겠는가. 임근용이 재빨리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가서 조모님 가마를 준비해 두라고 좀 전해 줘. 조모님께서 곧 외출하실 거야.”
소란은 약간 의아했지만, 임근용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말을 전하러 나갔다. 소란이 떠나고 나서 임근용은 귀를 쫑긋 세우며 안의 동정을 살폈다.
소심이 계속 낮은 목소리로 노부인을 불렀지만, 노부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한참 만에 “응” 하고 대답하는 것 같더니 또 기척이 없었다. 임근용은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걸 보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문발을 치켜들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노부인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할머님, 일어나 보세요! 오공자 좀 살려 주세요!”
육 노부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손을 덜덜 떨었다. 임근용은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보고 더는 자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할머님, 너무 놀라지 마세요. 오공자가 또 실수를 했어요. 또 한바탕 두드려 맞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절대 쉽게 용서해 주실 것 같지 않아요. 할머님 말고는 오공자를 구해 줄 분이 아무도 없어요.”
“그 말썽쟁이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구나.”
육 노부인은 천천히 탁한 숨을 내뱉으며 임근용의 손을 꼭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좀 일으켜 주렴.”
임근용은 소심과 함께 육 노부인을 얼른 부축했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가벼우면서도 재빠르게 손을 놀리며 육 노부인의 몸단장을 도왔다. 건강을 중시하는 육 노부인은 일단 물부터 한 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한 게냐?”
임근용은 마음이 급해서 애가 다 탔지만, 육륜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유력한 사람은 육 노부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을 너무 심각하게 전해 혹시라도 육 노부인이 놀라 기절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육 노부인까지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근용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할머님, 말씀 드릴 테니까 너무 흥분하시면 안 돼요.”
육 노부인이 버럭 짜증을 냈다.
“빨리 말이나 해라!”
임근용은 거짓말을 반쯤 섞어가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처음 오공자가 집에서 뛰쳐나갔을 때,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공자를 구해 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지금 여기 평주에 와 있다는데 오공자가 보답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 사람을 초대했나 봐요. 어쩌다 보니 결국 술까지 먹게 됐는데, 지금 아버님과 둘째 숙부께서 그 사실을 알고 오공자를 용서할 수 없다며 화를 내고 계세요. 그런 큰 불효를 저지른 놈은 때려죽여서라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