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54
454화. 암시
육 노부인 역시 화를 냈다.
“철 모르고 날뛰는 짐승 같은 놈, 어찌 그리 세상 모르고 날뛰며 사고만 치고 다닌단 말이냐? 좀 두드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안 갈란다!”
“저도 오공자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임근용이 무릎을 꿇고 육 노부인의 무릎을 껴안으며 애걸복걸했다.
“할머님, 오공자가 백번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오공자가 어떤 성격인지 할머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누구보다 진실하고 충직한 사람이에요. 오공자가 얼마나 효심이 깊은지, 또 그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할머님께서도 아시잖아요. 그저 한두 대 맞고 끝나는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둘째 숙부께서 요즘 계속 오공자를 벼르고 계셔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어제 아침에는 둘째 숙부께서 빗장을 들고 오공자 머리를 깨 버리겠다며 난리를 치셨다니까요. 그때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지금 오공자가 어떻게 됐겠어요? 근데 지금 날도 채 밝기 전에 또 오공자가 불려갔어요. 할머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면 누가 오공자를 구해 주겠어요? 정말로 다급한 일이 아니었으면, 자애로우신 할머님께 손자며느리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달려와 시끄럽게 굴었겠어요? 제발 오공자를 좀 살려 주세요. 오공자한테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저승에 계신 할아버님께서도 틀림없이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그녀가 육 노태야까지 들먹이자 육 노부인은 또 한동안 가슴 아파했다. 육 노부인은 참기 힘든지 그녀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어째 하나같이 다 날 들볶지 못해 안달이란 말이냐! 날 들들 볶아서 죽일 심산이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해치워 버려라!”
이건 전형적인 화풀이였다. 임근용은 감히 뭐라 변명하지 못하고 그녀의 무릎을 안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님, 손자며느리가 불효를 저질렀어요. 하지만 저는 어른들께서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러는 것뿐이에요. 보세요, 요 며칠 할머님께 문안을 드리려고 아침마다 전부 모여 밖에서 기다렸었는데, 오늘은 사람 그림자도 하나 없잖아요.”
육 노부인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마를 준비해라!”
“할머님, 감사합니다.”
임근용은 온몸의 긴장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온몸에서 솟아난 땀에 속옷까지 다 젖어서 마치 방금 물에서 건져낸 사람 같았다.
단정하게 몸단장을 한 사 마마가 안으로 들어와 임근용을 힐끗 보았다. 그녀는 육 노부인에게 두꺼운 외투를 걸쳐 주고, 육 노부인을 부축해 밖으로 나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세요.”
육 노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임근용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눈빛이 약간 이상했다.
임근용은 육 노부인의 눈빛을 보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볼 겨를은 없어서 그저 황급히 육 노부인의 뒤를 따랐다.
* * *
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청설각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몇 개의 초는 이미 반 이상 타서 촛농이 겹겹이 쌓이는 바람에 지저분하고 보기 흉했다. 육건중은 사색이 되어 옆에 앉아 있는 육건신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촛불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과 맥박이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육륜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망할 자식은 어려서부터 사고뭉치여서 출세하는 건 바란 적도 없었다. 그놈은 태어날 때부터 골칫덩이였다. 만약 육적의 말처럼 정말로 비적들과 엮인 거라면 이건 가문을 몰살시킬 수도 있는 대재앙이었다! 이제 그는 육건신 앞에서 더욱더 고개를 들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태어났을 때 익사를 시켜 버릴 것을!
육건중은 혼자서 이를 갈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건신은 오히려 아주 침착했다. 그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전 왕조의 청자 연꽃 찻잔을 손에 들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둡고 입꼬리는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지막이 한 마디 했다.
“이건 가문 전체의 생사존망이 달린 아주 중요한 일이야.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
육건중은 흠칫 놀라며 “아!” 하고 신음을 한 뒤 의아한 눈빛으로 육건신을 바라보았다.
육건신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지만 확고한 힘이 실려 있었다.
“네가 무슨 불만이 있든 간에 그건 우선 제쳐 두고 이 난관부터 함께 해결해야하지 않겠니. 다른 일들은 나중에 천천히 다시 정리하자꾸나.”
만약 육건중이 자기 형의 성격을 몰랐다면 아마 감동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큰형이란 사람이 제일 잘하는 짓이 바로 토사구팽이었다. 육건신은 앞으로 이 일을 가지고 그가 더는 반격할 힘이 없을 때까지 공격해댈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지금은 정말로 힘을 합쳐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 때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누구도 이 문제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고, 그건 육건신도 마찬가지였다.
육건중이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들이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육건신에게 절했다.
“큰형님 말이 맞아요, 우리는 한 가족이고 한 핏줄이잖아요. 이 일은 형님이 맡아서 잘 처리해 주세요. 일단 이 일을 잘 해결해야 후일도 도모할 수 있는 거니까요. 안 그럼 모든 게 다 허사가 되지 않겠어요?”
육건신이 냉랭한 눈빛으로 육건중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멍청한 놈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자신을 협박하려 든단 말인가. 전부 한 배를 탔으니 자기가 도망칠 수 없으면 장남가도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인가?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일 때문에 목숨이라도 잃게 된다면, 그와 육함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육건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오므리며 평온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랫동안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해 이 일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 주는 것뿐이야. 화거아의 죽음은 단순 사고로 처리될 게다. 그 녀석은 수고비를 받고 홍등가에 가서 즐기려다가 강도들한테 돈을 가지고 있는 걸 들킨 게지. 강도들이 어린 녀석이라고 깔보고 돈을 뺏은 다음에 죽인 것이다. 일단 관청에는 그렇게 신고하고 가족들한테는 보상금을 좀 쥐여 주면 될 거야.
그 기녀는 목이 졸려 죽었다고 하던데 아마 손님과 돈 때문에 말다툼을 하다가 손님이 실수로 죽였을 게다. 그런 일은 아주 흔한 일이지. 우리 가문 사람들 중에 그런 홍등가에 간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어. 그럼 그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 포주의 입을 막아 함부로 사람을 물어뜯지 못하게 만들면 될 게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우리가 돈이 부족한 집안은 아니니까. 다만!”
육건중은 육건신이 조리 있게 말하는 걸 듣고 내심 감탄하며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육건신이 말머리를 돌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다만!” 이라고 외치는 순간 겨우 진정되었던 마음이 또 다시 펄쩍 하고 뛰어올랐다. 그가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다만 뭐요? 큰형님?”
육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육건중이 다급해서 돌아가실 지경이 되었을 때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뿌리를 뽑아야 가지를 휘감은 넝쿨을 제거할 수 있는 법이지. 뿌리가 남아 있으면 아무리 넝쿨을 쳐내도 소용없어. 계속 다시 자라날 테니까.”
육건중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육건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육건신은 자기 동생 쪽은 바라보지 않고 계속 천천히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찻잔에는 이미 차가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약간 짜증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찻주전자에 물을 따랐다.
이런 일은 본래 동생이 해야 마땅했지만, 육건중은 지금 머릿속이 너무도 혼란스러워 그저 멍하니 육건신의 움직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육건신을 대신해 물을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했다. 육건중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형…….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육건중은 육건신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은지 오래였고, 늘 복잡한 심정을 담아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형이라는 호칭은 큰형님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육건신은 마치 어릴 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살짝 손이 떨렸다. 그는 하마터면 찻주전자의 물을 쏟을 뻔했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찻잔에 안정적으로 물을 따르며 눈을 내리깐 채 나지막이 말했다.
“별 뜻 없어. 그냥 네가 알아서 하란 소리야.”
방 안은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사방이 밝았지만 육건중은 오히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손과 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고, 그와 동시에 손과 발이 신경질적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육건중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진정하려 애썼지만 어떻게 해도 진정이 되지가 않았다. 그는 마치 어떤 손이 그의 가슴속으로 헤집고 들어와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육건중은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넓디넓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건 육건중과 육건신 두 사람뿐이었다. 육건중은 그런데도 마치 방 안이 꽉 차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는 힘없이 눈을 들어 육건신을 바라보았다. 육건신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그 청자 연화 무늬 찻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감상하고 있었다. 유약이 잘 발린 찻잔은 청자색(*千峰翠色: 코발트 그린)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촛불이 비추자 마치 얼음이나 옥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찻잔이고 또 얼마나 지독한 인간이란 말인가!
육건신을 바라보는 육건중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그렇다, 육건신은 그에게 은근히 암시만 했을 뿐 실제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건 육건중 자신이었다. 설사 그렇대도 육건신은 어찌 저리 홀가분해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이 모든 일은 육건중 혼자서 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육건신은 하늘을 원망하며 슬퍼할 수 있겠지만, 그는 손에 친아들의 피를 묻혀야 했다. 육건중은 순간 육건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바로 업보일까?
육건신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이 육건중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둘째야, 내가 밉니? 원망스러워?”
육건중이 어찌 감히 그렇다고 대답을 하겠는가? 그는 심지어 육건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육건중이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딜요, 그냥…….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육건신이 호통 쳤다.
“아들을 잘못 키워 함부로 날뛰며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대역무도한 인간으로 만들어 놨으면 당연히 마음 아파해야지. 넌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어! 오히려 남들이 널 원망해야 마땅하지. 너랑 난 앞으로 우리 육씨 가문 자손들을 아주 잘 관리해야 해. 우리 육씨 가문은 사람도 재산도 많은 큰 가문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여러 대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낸 것들을 그 불초한 자손 하나가 전부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