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72
471화. 억울함 (2)
육 노부인이 영경거로 돌아오자 사 마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부인, 대부인께서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다고 해요. 열흘에서 보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약재를 좀 챙겨서 보러 가시겠어요?”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육 노부인은 소심이 건네주는 탕약을 받아 마신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사 마마 또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씨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작별을 고했다.
“할머님, 곧 식사시간이라 손자며느리는 주방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육 노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 마마가 강씨를 향해 얼른 손을 흔들었다. 강 씨는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온 뒤 참지 못하고 얼굴 가득 눈물을 쏟았다. 그녀를 모시는 시녀가 황급히 다가와 위로했다.
“삼소부인, 왜 그리 슬퍼하세요? 이 일은 삼소부인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강 씨는 눈물을 훔쳤지만 억울하고 치욕스러운 감정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운이 나쁘기에 이런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오늘 육건중과 함께 장남가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했던 것만 생각하면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강씨는 의식적으로 그런 일들과 거리를 두며 피했지만, 치욕은 함께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는 가는 길에 우연히 려씨를 마주쳤는데 그녀는 표정이 아주 차분해 보였다. 려씨는 강씨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방금 울었다는 걸 눈치채고 손을 흔들며 불러 세웠다.
“셋째 동서, 어디 가는 길이야?”
강씨가 살짝 싫은 티를 내며 말했다.
“주방이요.”
려씨가 빙긋 웃었다.
“뭘 그렇게 힘들어하고 그래? 싸우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동서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우리랑 같이 이런 치욕을 당한 게 억울해서 그래? 동서 내 말 새겨들어. 우리는 한 배를 탄 처지라 영광이든 치욕이든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거야. 뭔 말인지 알겠어?”
강씨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려씨가 계속 말했다.
“아까도 봐, 동서가 평소에 그 임씨랑 잘 지냈고, 할머님과 큰어머님, 셋째 숙모께도 정말 잘 했는데 그럴 때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준 사람 있어?”
그녀는 강씨가 또 눈시울을 붉히자 손을 뻗어 강씨를 끌어당겼다.
“이런 일로 뭘 울고 그래? 내가 말했잖아, 처음부터 그 둘째 동서랑…….”
강 씨가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담담하게 말했다.
“식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주방에 가 봐야 해요. 큰형님의 가르침은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네요. 먼저 가 볼게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 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뒤돌아 걸음을 재촉했다.
려씨는 잠시 멍해졌다가 화를 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고상한 척하기는……. 나중에 얼마나 처절하게 울게 될지 두고 보자!”
* * *
육 노부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영경거 안은 정적이 흘렀다. 시녀들은 걸을 때나 일을 할 때 각별하게 조심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곁방에서 아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꺄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고요한 영경거에 메아리쳐 유난히 귀에 꽂혀 들었다.
저 아이도 참, 웃으려면 좀 더 일찍 웃든지 아님 한 발짝 늦게 웃든지 하지 하필이면 왜 딱 지금 웃고 난리람. 사 마마는 육 노부인이 화를 낼까 봐 재빨리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아이라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당해도 싸지!”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육 노부인이 마침내 한 마디 던졌다.
“아?”
사 마마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그녀의 말뜻을 알아챘다. 이건 임옥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 마마는 어쨌든 육 노부인이 아까처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말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노비 신분인 그녀가 상전들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건 곤란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노부인, 피곤하지 않으세요? 좀 쉬시겠어요?”
육 노부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가서 의랑이가 뭐하고 있는지 좀 보고 와라. 뭐가 저리 즐겁단 말이냐?”
소심이 재빠르게 확인하러 갔다 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노부인, 쌍복이가 웃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의랑 공자가 웃으셨는데 웃음을 멈추지 못하시더라고요. 의랑 공자는 울 때는 크게 울고, 웃을 때는 크게 웃으시는 것 같아요.”
“그 아이 성격이 그런 거겠지.”
육 노부인이 말했다.
“아이를 데려오너라.”
사 마마가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노부인, 안 피곤하세요?”
육 노부인이 말했다.
“너무 한가해서 심심하구나.”
좀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육 노부인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사 마마가 소심에게 눈짓하자 소심이 얼른 나가 노부인의 말을 전했다. 반씨와 두아가 재빨리 의랑을 데리고 들어왔다. 의랑은 호랑이 모양의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가장자리에는 하얀 토끼털이 둘러져 있었다.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했고 피부는 아주 보드라웠다. 의랑은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사 마마를 보고 활짝 웃었다.
사 마마가 의랑에게 장난을 치자 아이는 의외로 수줍은 듯 작은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돌리며 반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가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돌리며 ‘아까 그거 다시 한 번 해 봐’ 하는 표정으로 사 마마를 바라보았다. 육 노부인이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이지 않느냐.”
사 마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예, 육공자께서도 의랑 공자를 아주 예뻐하셔서 시간이 날 때마다 보러 오시더라고요.”
육 노부인이 말했다.
“핏줄이 당겨서 그런 게지.”
육 노부인은 기분이 한결 나아져 사 마마에게 지시했다.
“가서 역랑이가 깨어 있는지 확인 해 보거라. 안 자면 형제가 같이 놀 수 있게 데려오너라.”
* * *
강씨는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송씨가 언제 임옥진에게 가서 사과를 할지, 임옥진이 또 이걸 빌미로 얼마나 사람을 괴롭힐지 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강씨는 너무 억울했다.
갑자기 그녀의 시녀가 들어와 말했다.
“삼소부인, 노부인께서 삼공자를 데려오라 하셨어요.”
강씨가 깜작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설마 벌을 주려는 건가? 차남가에서 아이를 키우면 안 될 것 같다는 핑계로 역랑이를 빼앗아가려는 걸까?’
그녀의 안색이 돌변하자 시녀가 얼른 해명했다.
“말을 전하러 온 언니 말로는 노부인께서 삼공자와 사공자가 비슷한 또래이니 두 아이가 같이 놀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대요. 지금 노부인께서 사공자도 데리고 계세요.”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또 이소부인을 모시는 앵두가 와서 이소부인께서 지금 당장은 자리를 비울 수 없지만 나중에 삼소부인을 만나러 오실 거라고 전해 달라 했어요.”
강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 그녀를 모시는 마마에게 지시했다.
“큰어머님 식사는 각별히 유의해서 챙겨.”
남들이야 뭘 어떻게 하든 그녀는 그녀가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 * *
하늘가에 걸려있던 마지막 한 점의 노을빛마저 사라지고 나자 하늘은 먹물을 뿌린 듯 새카매졌다. 임근용은 피로에 찌든 몸으로 임옥진의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어두컴컴한 마당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하나는 미모의 하 이낭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당연히 소성과 아유였다. 그녀들은 임근용이 나오는 걸 보고 얼른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이소부인, 대부인께서는 좀 괜찮으신가요? 크게 다치신 건 아니죠?”
세 사람의 행색을 보니 벌써 한참 전부터 여기에 이렇게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왔으면 안에다 고할 것이지 왜 말도 안 하고 이 추운 정원에 서 있고 난리란 말인가. 그녀들은 법도를 지키며 임옥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 겉치레를 하려는 것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면 임옥진이 그녀들을 구박하려고 병문안을 온 그녀들을 일부러 밖에 세워두고 찬바람을 맞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임근용은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님은 약을 먹고 잠드셨어. 이낭들은 언제 온 거야? 왜 안에 고하지 않았어? 추운데 계속 밖에 서서 뭘 어쩌려고?”
하 이낭이 온화하게 말했다.
“이소부인, 저희는 그저 본분을 다하려는 것뿐이에요. 소란스럽게 굴면 대부인께 폐가 될 것 같아 감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부인께서 크게 다치신 건 아니라니 저희도 마음이 놓이네요.”
임근용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낭들이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해 주다니 참 고맙네. 근데 하인들은 일을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와서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말이야, 괘씸한 것들.”
그녀가 굳은 얼굴로 앵두에게 지시했다.
“가서 방 마마를 불러와.”
앵두의 말을 전해 들은 방 마마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이소부인, 무슨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세요?”
임근용이 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세 사람이 이렇게 와 있었다면, 설령 하 이낭이 안에 고하지 말라 했다 하더라도 방 마마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녀들을 골탕 먹이고 싶대도, 이런 방법은 곤란했다. 하지만 그녀는 방 마마에게 대놓고 지적하지는 않고 그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낭들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왔는데, 아무도 안에 보고를 안 하네…….”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챈 방 마마가 살짝 겸연쩍어하며 얼른 앞으로 나와 하 이낭에게 사과했다.
“대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노비가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다 노비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니 이낭들도 너무 화내지 마세요.”
“괜찮아, 내가 알리지 말라고 한 거야.”
하 이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마마가 물었다.
“당직이 누구냐.”
복도에 있던 한 시녀가 전전긍긍하며 다가오자 방 마마가 그녀를 끌어당겨 따귀를 때리고 꾸짖었다.
“누가 너한테 이리 방자한 짓을 하라 했느냐! 감히 이낭들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그 시녀는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잘못을 빌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부인이 아픈데 이렇게 소란스럽게 굴면 되겠느냐!”
육건신이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고, 그 뒤로 육함도 천천히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자 하 이낭도 따라서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육건신을 바라보았다.
“대노야, 이소부인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육건신이 엄한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지만 임근용은 눈을 내리깐 채 하 이낭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하 이낭이 또박또박 말했다.
“비첩들이 대부인을 뵈러 왔는데, 안에 의원이 진료를 보고 있고 다들 바빠 보이더라고요. 혹시라도 시끄럽게 굴어서 부인 쉬시는 걸 방해하지는 않을까 싶어 안에 통보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소부인께서 나오셔서 시녀들이 저희를 홀대한 거라 생각하시고…….”
그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비첩이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한 탓이에요.”
육건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해라면 다행이고. 시끄럽게 굴어서 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지. 다들 그만 가 봐라.”
하 이낭이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히고 절을 했다.
“예.”
그러더니 임근용에게 사정했다.
“이소부인, 저 아이를 용서해 주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이낭은 참 자애롭네.”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그 시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자기 직무를 다하지 않았어. 안에 통보는 하지 않더라도 날이 이렇게 추운데 세 이낭을 곁방으로 안내해 난로를 쬐게 하고 차도 내주었어야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해. 데리고 가서 감봉을 하든 다른 벌을 주든 알아서 해.”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하는 말이었다.
방 마마가 숙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