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79
478화. 복숭아나무 가지 (2)
임근용이 백옥같이 수수한 얼굴을 들어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육함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임근용이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심장 부근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임근용은 육함을 미워했었다. 진심으로 그를 미워했었다. 그녀는 당시 또 다시 죽는 한이 있어도 육함에게 시집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육함도 앞일에 대해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임근용의 체온과 향기가 옷감을 뚫고 그의 손바닥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핏줄을 타고 그의 심장으로 전해지는 걸 느꼈다. 육함은 두근두근 뛰고 있는 것이 누구의 심장박동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심장박동은 뛰는 듯 마는 듯 아주 미약했다. 육함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연약해 보이는 임근용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슨 대답이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알 수 있소.”
아니,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임근용은 가슴이 아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육륜 오라버니가 어떻게 갔는지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말하지 말아달란 뜻이었다. 죽음의 맛을 너무 깊게 음미하다 보면 슬픔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갉아먹기 마련이었다.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 말했다.
“다섯째가 편히 쉴 수 있게 좋은 곳을 찾아 주었소.”
“장안이는요?”
“떠났소.”
“아무래도 떠날 수밖에 없겠죠.”
임근용이 육함의 목을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행, 나 좀 침상에 데려다줘요. 너무 피곤해요.”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전에 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이 마치 사람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애교 어린 목소리에 육함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육함은 그녀가 너무 슬픈 나머지 위로를 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임근용을 외면한 채 두어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육함이 그녀를 안아다 침상에 내려놓고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만 자요, 내가 옆에서 보고 있겠소.”
임근용이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갑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 봤어요? 방금 내가 그린 복숭아꽃 정말 예뻐요. 평생에 이렇게 잘 그린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당신은 따라오지도 못할 거예요.”
육함도 인정했다.
“여태껏 당신이 그림 그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오늘 보니 놀랍더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규수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은 타성에 젖어 틀에 박힌 것들만 그릴 뿐 영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임근용은 가끔씩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했다.
임근용이 담담하게 웃었다.
“다도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걸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내가 젊을 때 누구도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복숭아꽃을 잘 그렸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육함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하품을 하며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당신도 그만 가서 쉬어요. 나가는 길에 불 좀 꺼 주고요.”
내가 나중에 육건신처럼 변할까 봐 걱정되나 보군? 육함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말없이 임근용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가볍게 불어 등불을 껐다. 임근용은 침상에 누운 채 육함이 밖에서 앵두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 지키고 있어. 혹시 이소부인이 어디 아프거나 하면 바로 날 부르고.”
임근용은 그의 발자국 소리가 옆 건물로 향하는 걸 듣고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빌어먹을!
* * *
이 해 봄에는 결국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찬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비가 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애매하게 흐리기만 한 답답한 하늘도 잠시뿐,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고 나면 다시 회백색 하늘이 드러났다.
임근용은 육함과 함께 소달구지에 앉아 보리밭 옆 큰길을 지나가다가 옥처럼 푸르던 보리밭이 지금은 누런빛으로 말라 있는 걸 발견했다. 소작농 하나가 절망한 듯 논두렁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벌써 서로 물을 빼앗으려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까지 발생한 상황이었다. 하늘에 기대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날씨는 정말로 절망적이기 그지없었다.
임근용에게 가장 많은 건 염지였고, 염지에 벼를 심으려면 4, 5월에 오는 천하수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가 되면 세차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 평주성에 다시 희망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거라 기대했다.
마 장두는 새로 만든 우물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수 맑은 물을 한 통 떠서 소에게 먹이며 웃었다.
“주인분들께서 돈을 아끼지 않고 미리 우물을 파두신 덕에, 우리 장원의 소작인들은 편하게 물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랑은 너무 일찍 판 것 아닙니까? 나중에 천하수가 내려올 때가 되면 오히려 이 도랑을 막아야 하는데요.”
만약 천하수가 와야 할 때 오지 않고, 오지 말아야 할 때 온다면? 임근용이 마 장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가뭄이 계속될까 봐 걱정하고 있던데, 비가 계속 오지 않으면 천하수가 내려오겠느냐?”
마 장두가 잠시 멍해졌다가 말했다.
“그럼 주인마님께서 만들어둔 이 우물에 의지해 저희는 전처럼 수수를 재배해야 합니다. 그건 가뭄과 침수에도 잘 견디니까요. 거기에 콩을 조금 섞으면 될 것 같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올해 벼 모종은 조금만 기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요.”
임근용이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한 뒤 말했다.
“우물과 도랑을 잘 살피도록 해. 계속 이렇게 날씨가 안 좋으면 사람들도 여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조금이라도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해서 사람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으면 좋잖아. 난 농사짓는 일은 잘 모르니 마 장두 자네가 수고 좀 해 줘.”
마장두가 얼른 일어나 인사하며 말했다.
“그게 바로 소인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이 해에는 임근용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비가 와야 할 때에 오지 않았다. 태양이 마치 하늘에 뿌리라도 박은 듯 계속 그 자리에서 작열하자 저강에서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지만, 물은 내려오던 도중에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농민들은 미친 듯이 괭이를 휘두르며 원래의 수로를 망가뜨렸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을 자기 논에 끌어다 대 불쌍한 모종들을 살리고 자기 생계도 꾸릴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인간의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인지 어쩌다 비가 와도 땅만 살짝 적시고 이내 그쳤다.
마 장두는 침착하게 소작인들을 지휘해 수수와 콩을 심었다. 가뭄과 홍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전처럼 모내기를 하고 벼를 심었지만, 경험 있는 자들은 전부 작물을 바꿨다. 육, 임 두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마 장두의 방법을 따랐다.
이 해 가을은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세찬 비로 시작됐다. 수많은 밭과 농작물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우뚝 솟아있던 평주 성벽마저 끝없이 내리는 빗물에 잠겼다. 망가진 수로는 이때가 되어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드러냈다. 물이 정해진 수로에서 벗어나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질주하기 시작하자 평주의 농민들은 울고 싶어졌지만,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장원의 모든 논밭과 소작농들이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천혜의 조건이 좋은 양전들은 가뭄과 홍수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수확량이 나왔다. 하지만 모두들 날씨 때문에 큰 손해를 본 건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10의 수확량이 나왔던 곳에서 고작 1, 2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근용이 제일 먼저 나서 올해의 소작료를 전부 면제해 주겠다고 선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육씨, 임씨, 오씨 가문에서도 정도는 달랐지만, 어쨌든 소작료를 감면해 주었다. 하지만 육건신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불쾌해했다. 이런 큰일을 어찌 어른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결정한단 말인가? 설령 소작료를 면제해 준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그가 먼저 나서서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의 며느리는 겉으로는 누구보다 법도를 잘 지키는 것 같이 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그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대로 한 번 임근용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감하게 분위기를 읽은 육함이 임근용에게 권유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먼저 나서서 일을 하지 말고, 어른들과 상의부터 한 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임근용이 미소 지었다.
“만약에 아버님께서 승낙하지 않으시면요? 내 땅의 소작료를 내가 면제해 주겠다는데 그게 아버님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년부터는 그녀가 해야 할 일도 더 많아질 예정이었다. 매사에 지시를 청하고 그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육함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근용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
“그래도 당신이 내 편 들어 줄 거죠?”
육함은 잠시 침묵하며 벌써 한쪽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의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부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말했다.
“응.”
* * *
육 노태야의 소상(小祥)에는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온 집안사람들은 제사상 앞에서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 *
날씨가 따뜻해졌다가 갑자기 또 추워졌다. 이런 때는 정말로 몸이 상하기 쉬웠다.
이듬해 봄은 전년보다 훨씬 춥고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어제는 태양이 화창하게 떠서 참기 힘들 정도로 덥다가, 오늘 아침에는 또 큰 눈이 내리는 식이었다. 이렇게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자 임근용이 아는 사람 중에 둘이나 병으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하나는 육건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멀리 청주에 있는 도순흠이었다.
임근용은 걱정이 되었지만 동시에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육건립의 병은 그저 풍한에 지나지 않았지만, 임근용은 그가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전생에 그는 이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결국 기력이 없어 피난조차 가지 못했다.
하지만 도순흠 쪽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씨가 세상을 떠난 후 도순흠이 남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진심으로 즐거워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조만간 병을 불러올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생명의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임근용은 오히려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근음은 일전에 도봉당을 따라 강남에 가서 반년 정도 산 적이 있었고, 도봉거도 지금 그쪽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그러니 날씨가 좀 안정되고 나면 도씨 가문에 가서 이참에 강남에 가서 기분전환을 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도씨 가문은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씨 가문 쪽은 정말 골치가 아팠다. 육씨 가문 사람들은 그래도 몸을 피할 고택이라도 있지만, 임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임근용은 이리저리 고민해 본 끝에 아무래도 육씨 가문 사람들을 따라 육씨 가문의 고택으로 피난을 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씨 가문 사람들이 육씨 가문 사람들을 따라가는 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임옥진이 있는 한 누구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