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86
485화. 경멸과 증오
이때 임근용과 육함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임근용은 20일간 사람들에게 나눠줄 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서 재작년에 풍년이 들었을 때도 식량을 내다 팔지 않고 일부러 모아 두었다. 혹시라도 민란이 일어나면 어차피 이 많은 식량들을 짊어지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식량을 팔아 백성들로부터 돈을 벌고 싶지도 않았다. 임근용은 차라리 이럴 때 좀 더 베풀어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서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육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이 죽막을 설치하는 일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육 노태야의 항상 가득 차 있는 곡물 창고는 나중에 육씨 가문 일가를 구제하는 데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육함은 더욱 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작년에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올해의 춘경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하루걸러 하루씩 임근용, 장남가, 삼남가의 장원에 들러 거느리고 있는 장두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또 죽막을 설치하는 건 큰일이라서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선행을 하려다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육함은 주변 민심 또한 살펴야 했다. 유종성에게 상황이 이러하니 적당한 수준에서 수탈을 그만두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이유를 제대로 대지 못하면 설득을 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미약한 힘으로나마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은 임세전이었다. 그는 임근용의 요구에 맞추느라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최근 임근용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말했던 의장을 만들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임세전은 그녀가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강남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임근용은 재작년 초부터 강남 쪽의 이윤을 평주로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전부 현지에서 땅을 사서 가게를 열거나, 현지 전장(*钱庄: 옛날, 개인이 운영하던 금융 기관)에 맡겨 두라 하고 있었다. 임세전은 이번에도 강남 쪽에 있는 돈을 일부 가져와 급한 불을 끄려 했지만, 예상외로 임근용이 반대하며 오히려 평주 쪽에 있는 돈을 빼서 쓰라 말했다.
또 찻집 일은 더더욱 심상치 않았다. 5년의 임대 기간이 거의 만료될 때가 되어 집주인이 보낸 사람이 와서 재계약을 할 건지 물었다. 찻집은 줄곧 장사가 잘 됐고, 이미 몇 년이나 운영해 꽤 이름도 난 상태라 한창 돈을 잘 벌고 있는 때였다. 그래서 임세전은 재계약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고, 또 반드시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임근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먼저 대답하지 않고 임근용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임근용 쪽에서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이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임세전은 누군가가 자신과 임근용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임근용이 평주 쪽의 장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고, 심지어 손을 떼려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임근용이 지금껏 그에게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임세전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염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임세전은 이런 걱정거리들을 생각하며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무릅쓰고 휘적휘적 찻집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육함이 안에서 걸어 나오며 허름한 옷을 입은 몇몇 사람들에게 주먹을 말아 쥐고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임세전은 말을 세우고 조용히 한쪽에서 기다리다가 육함이 그들과 인사를 마치자 그를 불렀다.
“둘째야, 넌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그를 본 육함이 기뻐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셋째 형님, 어디 가요?”
임세전이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근용이 만나러 가. 요즘 좀 이상해진 것 같아서.”
그는 육함에게 찻집 일에 대해 말한 뒤 넌지시 그녀가 평주 쪽의 돈을 빼서 의장을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임세전은 차마 강남의 사업까지는 말할 수 없어 경성의 귀중품 상점과 화정현에서 하고 있는 사업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쪽에 모아 둔 자금이 꽤 돼.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모아두기만 했거든. 그래서 난 그쪽의 자금을 가져다 쓰자고 했는데, 근용이가 안 된다고 하면서 꼭 평주 쪽에 있는 돈을 쓰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럼 이쪽 사업에 차질이 생기잖아? 게다가 찻집같이 장사가 잘 되는 곳을 왜 재계약하려 하지 않는지 정말 모르겠어. 설마 이걸 남한테 헐값에 넘기는 건 아니겠지?”
임세전이 살짝 분개하며 말했다.
“지금껏 나한테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어. 내가 알기로 근용이가 날 경계하거나 못 믿는 건 아니라 혹시 날 쫓아내려고 이러는 건가 싶기도 해!”
육함은 임근용의 사업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지만, 임세전의 이 말을 듣고 황급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다독였다.
“셋째 형님,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일단 정확한 이유부터 확인해 봐요. 제 안사람이 잘못한 거면 제가 형님 대신 한 소리 할게요!”
임세전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화가 안 날 수가 없잖아!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온갖 노력을 쏟아붓고, 한 걸음 뗄 때마다 조심조심하면서 겨우 이만큼 키워놨는데, 근용이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려 하면 안 되지. 내 입장에서 화가 안 날 수가 있겠어? 근용이가 가게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이러는 거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어. 근용이가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고.”
“화내지 말고 그만 진정해요!”
육함이 그를 자기 집 방향으로 밀며 말했다.
“아용이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같이 가서 직접 불러다 물어보면 왜 그런 건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임세전이 말했다.
“내가 직접 가서 물어볼 거야. 근용이가 정말 멍청한 짓을 하려 하면, 둘째 네가 좀 말려 줘! 여기가 바로 우리 고향이고 본거지잖아.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의랑이를 위해서 여기에 더 많은 기반을 남겨 둬야 해.”
그는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강남이 아무리 좋다 해도 육씨 가문에게는 전혀 기반이 없는 곳이었다. 의랑은 육씨 가문 사람이라 평주에 자기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안정적으로 딛고 설 수 있었다.
육함이 두말없이 승낙했다.
“당연하죠, 그럴게요.”
어쨌든 임세전은 산전수전을 겪은 성인 남자였다. 그는 분노와 답답한 감정을 억누르고 육함에게 죽막을 설치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 집에서 죽막을 설치했지만, 우리처럼 한 데는 없고, 연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어. 지금 육씨 가문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그 죽막을 너랑 근용이가 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육함이 말했다.
“누구든 우리를 보고 따라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죠. 그런 쓸데없는 명성을 얻는다고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는 이 말을 한 뒤 길게 탄식했다.
“근데 이 정도로는 택도 없을 것 같네요.”
임세전은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 재빨리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육함은 잠시 참는 듯하다가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성벽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요 며칠 여기저기 살펴보니까, 천재지변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더라고요.”
임세전은 문득 세간에 떠돌고 있는 소문 몇 가지가 떠올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핍박을 받아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둘째 너도 그저께 그 일에 대해 들었지?”
어느 가난한 집의 이야기였다. 그 집은 젊은 남자가 없고 부역을 뺄만한 돈이나 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인과 어린아이가 성벽을 쌓으러 가야 했다. 그러다 결국 어린아이가 병이 나 노인이 사죄하며 하루만 휴가를 달라고 간청 했지만 위에서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아픈 몸으로 사력을 다해 벽돌을 메고 나르다가 현기증이 나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성벽 아래로 추락해 죽었다. 노인 또한 너무도 비통하고 분개한 나머지 성벽에 머리를 찧고 죽었다.
육함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만에 나지막이 말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임세전이 그에게 무엇을 기다릴 수 없는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갑자기 물이 흐르는 것처럼 거리의 사람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장수가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 사람이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저쪽에 지금 난리가 났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장수를 밀치고 가 버렸다.
장수가 쓴웃음을 짓고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히려 길가에서 차를 팔고 있던 아주머니가 그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틀 전에 성벽을 쌓다가 죽은 할아버지와 손자 집에서 찾아 왔는가 봐. 70대 할머니랑 30대 부인, 7~8살쯤 된 어린 여자애가 지주부 관아 앞에서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울고 있다고 하더라고. 에라이, 천벌을 받을 놈들!”
육함과 임세전은 눈을 마주쳤고, 서로의 눈에서 우려를 읽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을 따라 지주부 관아 쪽으로 향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물 샐 틈도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들이 어디 그런 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햇볕이 매서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지만, 구경 나온 사람들은 햇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을 길게 빼고 흥미진진해하며 안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초조한 듯 말했다.
“안에서 뭐라고 하는데? 설마 곤장을 때린 건 아니겠지? 에이, 안 보이잖아!”
불쌍해하며 탄식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냥 구경을 나온 구경꾼들이 훨씬 더 많았다.
육함은 임세전과 함께 길 건너편 찻집에 들어가 앉으며 장수에게 지시했다.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알아 와.”
장수는 은전을 몇 개 소매에 집어넣고 들고 있던 음식을 입에 쑤셔 넣은 뒤 알아보러 밖으로 나갔다.
육함과 임세전이 대충 다과를 주문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한껏 기가 죽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 형님?”
육함이 고개를 들어보니 육적이 낡은 장포를 입고 한쪽에서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적은 그가 바라보자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둘째 형님,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으니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이 찻집은 그다지 고상한 곳이 아니어서 아주 조악하게 꾸며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이곳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자 육함은 내심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어쨌든 육적도 친척이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육함이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서 말해. 혹시라도 또 무슨 이상한 짓 하면 바로 가 버릴 거야.”
육적은 그의 말을 듣고 얼른 허리를 폈다. 그는 마치 어린 시종처럼 한쪽에 서서 비위를 맞추려는 듯 임세전을 향해 미소를 짓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육함을 보고 말했다.
“둘째 형님께서 이런 데 오실 시간이 다 있으세요?”
육함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힐끗 보았지만, 그의 침묵 속에는 약간의 경멸과 증오가 담겨 있었다.
육적이 황급히 자기 입을 때리며 말했다.
“입이 방정이라니까. 둘째 형님, 뭐 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전 형님한테 이번 일에 제 선생님의 제자도 몇 명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말씀드리려고 온 거예요.”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일부러 말을 멈춘 뒤 교활한 눈으로 떠보듯 육함을 응시했다.
“형님이 제 선생 문하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셨으니 그래도 동문들에 대한 정이 조금은 있으실 것 같아 형님한테 말씀드리면 혹시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지 않을까…….”
육함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육적을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증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분위기를 본 임세전이 얼른 육적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고 웃으며 말했다.
“동생, 여기 앉아! 차 한 잔 마시면서 목 좀 축이고 천천히 말해.”
육적이 흘끗 곁눈질하며 육함의 표정을 살피더니 웃으며 말했다.
“세전 형님, 감사해요! 하지만 둘째 형님이 앉으라고도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찌 감히 앉겠어요.”
육함은 소매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임세전이 육적을 향해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 뒤 육함을 따라 나갔다.
육적은 임세전이 따라준 차를 들어 한 입에 털어 넣고 표독스럽게 찻잔을 다과상 위에 내던졌다. 그는 음산한 표정으로 뒤돌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