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89
488화. 기세
육건신 형제 셋은 아프든 건강하든 관계없이 모두 단정히 차려입고 정중하게 제 선생을 맞이하며 세심하게 그를 대접했다. 그건 이 대유학자가 육함의 스승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온 나라 안에서 존경을 받는 저명한 유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제 선생은 정말로 온 가족들로부터 이렇게 정중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차가 두 순배 돌 동안 사람들은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 와중에도 제 선생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육건신 또한 캐묻기는 곤란해 주견복에게 눈짓했다. 이에 주견복이 기회를 봐서 육함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소야, 대노야께서 소인에게 여쭤보라 하셨는데 제 선생께서는 왜 여기 오신 겁니까?”
금대준의 일은 절대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함은 굳이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사건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은 주견복은 다시 기회를 살펴 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육건신에게 보고했다. 육건신은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하였다. 그 유종성이란 자가 이 일을 잘 마무리 지으려면 분노하는 방법만으로는 부족했다. 금대준 일행은 모르고 있겠지만, 유종성이란 자는 한동안 그들을 위협한 후, 누군가가 와서 중재를 하면 아마 바로 그들을 풀어주며 값싼 인정을 베풀어 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그는 육건중과 육건립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 선생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그리 재능이 출중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제 선생은 그저 웃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제 문하에 있는 학생들이 좀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한 이틀 정도 지나면 조사가 끝날 것 같으니, 이틀만 여기서 폐를 끼치겠습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육건신은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게 제 선생이 묵을 곳까지 직접 안내한 후 육함에게 세심하게 돌보라고 당부까지 하고 나서 작별을 고했다.
제 선생은 자리에 앉아 육함에게 자기 맞은편에 앉으라고 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의(武义) 쪽에도 요즘 산적과 해적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식량을 빼앗아간다고 해. 너도 들었느냐?”
육함이 말했다.
“들었습니다. 그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에 해적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있었지요. 그때도 관아에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지금 같은 때야 더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않겠습니까.”
제 선생이 탄식했다.
“작년에 큰 재난을 당했는데, 또 이렇게 핍박을 받아 생계도 꾸리기 어려워졌으니 누굴 탓하겠느냐.”
그가 답답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정말 내우외환(内忧外患)이 아닐 수 없구나.”
제 선생은 평소에 조정 일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어투로 말을 하는 걸 보고 육함은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선생님…….”
제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하루 종일 고생했을 테니 그만 가서 쉬어라. 나도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구나! 참, 가는 길에 주방에 들러 네 선생에게 맛있는 것 좀 만들어 주라고 일러라! 전에 네 부인이 나한테 보내줬던 술에 절인 새우랑 햇볕에 말린 육포, 여지주가 아주 맛있더구나.”
육함은 호쾌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가서 전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어린 시동에게 잘 모시라고 지시한 뒤 즉시 밖으로 나갔다.
제 선생은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어 복도에 찬란하게 피어있는 붉은 자두꽃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임근용은 이미 확정한 의장규약을 베껴 쓰고 있다가 육함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무의식중에 일단 그의 안색부터 살피고 그를 마중했다.
“혹시 또 밖에 나가야 해요? 그쪽에서 무슨 소식이 왔어요?”
육함은 임근용의 말을 듣고 그녀가 이미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길게 말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당분간은 서두르면 안 되오. 좀 전에 선생님께서 먹을 걸 좀 가져다 달라고 하시더군. 당신이 전에 보내드렸던 술에 절인 새우랑 말린 육포, 여지주를 달라고 하셨소.”
임근용이 말했다.
“여지주랑 말린 육포는 있는데 술에 절인 새우는 없어요. 작년엔 상중에 근신하며 고기를 멀리하느라 안 만들었거든요. 친정에 사람을 보내서 혹시 있는지 물어볼게요.”
그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춘아에게 지시했다.
“빨리 외원으로 가서 임귀한테 친정에 한번 다녀오라고 해.”
* * *
육건신은 제 선생을 정성껏 접대하는 것과 더불어 주견복에게 밖에 나가서 이 일의 경과를 자세히 알아오라 지시했다. 그는 제 선생의 성정과 기질로 볼 때 설령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육씨 가문과 연루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제 선생을 대접하며 혹시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난 후 밖에서 소식을 듣고 온 장수가 말했다.
“안무사 대인과 지주 대인이 돌아오셨는데 오늘 오후에 그 사건을 심리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가 알아 온 걸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역시나 금대준 일행을 고발하며 그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두 고부를 부추겨 소동을 일으키게 했다고 주장했고, 그 이유는 평주와 청주의 성벽을 쌓는 걸 방해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육함이 즉시 가 보려 하자 제 선생은 술을 반 잔 털어 넣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가지 마라. 무슨 황당한 연극을 보자고 거길 간단 말이냐! 그 바보들도 한참 고생하고 따끔하게 교훈을 좀 얻어야지. 그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졌다. 금대준은 법정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조정의 명관을 욕했다고 한다. 금대준은 나쁜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모아 소란을 피워 조정의 변방 방위 계획을 파괴하려 시도했다는 죄명을 쓰고 곤장을 맞은 뒤 감옥에 갇혔다. 그날 당직을 맡았던 사람 역시 해직됨과 동시에 곤장을 맞았고 죽은 사람의 가족 두 사람은 후한 위로금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종성이 실질적인 일을 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고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고 했다.
제 선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민행, 어떠냐?”
육함은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명함을 보내겠습니다.”
제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사제 두 사람은 함께 지주부 관아를 방문했다.
* * *
“이소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장수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는 아주 순조로웠다고 해요. 지주 대인께서 직접 나와 제 선생을 맞이했다고 하니 아마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방죽이 임근용의 옆에 앉아 함께 바느질을 하며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안무사 대인께서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대부분 지주부 관아에만 숨어계셔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고 하네요.”
이미 방죽과 많이 친해진 춘아가 웃으며 말했다.
“방 언니도 말을 참 웃기게 하네요. 숨어 있다니요? 그 관료 대인께서는 그저 집에서 칩거하시는 거겠죠.”
임근용이 한창 만들고 있던 호랑이 머리를 수 놓은 신발을 마무리하며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봐봐, 어때?”
춘아와 방죽은 당연히 아주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지 고 계집애는 3년 만에 애를 둘이나 낳고 이소부인께서 직접 이렇게 신발까지 만들어 주시다니 참 복도 많네요.”
임근용이 살짝 미소 지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곁으로 돌아와 날 모시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 왔지 뭐야.”
그녀들은 잠시 잡담을 나눴다. 달이 벌써 하늘 높이 떴는데도 육함과 제 선생이 돌아올 기미가 없자 육건신 쪽에서도 사람이 와 물었다.
“이소야께서 언제 돌아온다는 소식은 없으셨나요?”
“없었어.”
임근용도 다소 마음이 초조해 방죽에게 지시했다.
“네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와서 전해.”
방죽이 얼른 밖으로 나가더니 차 두 잔을 마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달려왔다.
“돌아오셔서 일단 대노야를 뵈러 가셨어요. 이소야께서 노비한테 이소부인께 가서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 하셨어요.”
임근용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방죽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기색은 아니었어요. 제 선생님과 이소야의 표정이 전부 평온하셨거든요. 제가 볼 때 누군가와 다툰 것 같지는 않았어요.”
임근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깨끗하게 세수를 한 뒤 침착하게 육함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등잔에 기름이 다 떨어지자 앵두가 안으로 들어와 기름을 채우려 했다. 임근용이 말했다.
“됐어, 오늘 밤은 달빛이 좋네. 달빛 아래서 잠시 정좌하고 싶어.”
육함은 제 선생을 방까지 잘 모셔다드린 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임근용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조용히 창문 아래에 앉아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떻게 됐어요?”
육함은 약간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순간 긴장됐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별로 안 좋소.”
임근용이 얼른 일어나 그를 마중하며 부축해서 앉힌 뒤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육함의 곁에 다가가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육함이 물을 반 잔 마시고 나서 나지막이 말했다.
“그날 선생님께서 내 의견서를 찢어 버리셨소.”
“알아요. 제 선생께서도 그 유종성이란 사람이 악독한 소인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선생께서는 당신이 그 사람의 미움을 사 괜히 척을 지는 걸 바라지 않으셨겠죠. 그래서 당신도 굳이 나서지 않은 거고요.”
“선생께서 이 일은 차를 끓이는 것과 같아서 물이 다 끓지 않으면 좋은 차를 만들 수 없다고 하시더군. 천천히 하라 하셨소.”
육함이 입술에 힘을 주며 꾹 다물었다.
“근데 오늘 선생님께서 내가 의견서에 썼던 그 말들로 유종성에게 인정사정없이 퍼부으셨소!”
“어?”
임근용은 깜짝 놀라 몸을 곧추세웠다. 달빛 아래에서 점점 창백해지는 육함의 얼굴을 보며 문득 그의 괴로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육함이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날 아끼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 정도로 아끼시는 줄은 몰랐소. 당신은 그때 유종성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상도 안 될 거요…….”
임근용이 육함의 손을 가볍게 잡자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가 보니 선생님께서 짐작한 그대로더군. 지부(*知府: 부지사)가 우리를 마중 나왔고, 지주는 방문 앞에서 선생을 맞이했소. 그는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존경해 왔네 어쩌네 하더니 또 우리 집에서 죽을 나눠주어 조정에서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됐다고 칭찬했소. 그러더니 나한테 금대준 일행이 이런 소란을 피운 건 내가 그 사람들을 선동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더군. 물론 자기가 그 말을 믿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오……. 이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격노하셨소…….”
육함은 당시 제 선생의 드높은 기세와 궁지에 몰려 분노하면서도 감히 화도 내지 못하던 유종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제 선생님께서는 정말 진정한 선생님이셨소.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시던지. 난 스승님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