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96
495화. 협박
주견복이 문밖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대노야, 이소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기, 사돈 부인께서도 오셨습니다. 대노야께 사죄를 드리러 왔다고 하십니다.”
육건신은 “허”라고 한 마디 내뱉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육건신을 모신 주견복은 그가 도씨를 만나주지 않고 푸대접하려는 거라는 걸 알아채고 말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말했다.
“대노야, 사돈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대노야께서 만나실 시간이 없으시면 일단 노부인께 가서 문안을 드리고,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다시 오셔서 사죄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육건신은 절로 화가 치밀었다.
“임 삼노야는 죽었다더냐!”
처자식이 이렇게 밖에서 제멋대로 버르장머리 없이 날뛰고 있는데, 남편이란 작자가 어찌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유유자적하게 천하태평이란 말인가. 어쩌다 그런 칠칠치 못한 인간이 그의 사돈이 되었을까!
육건신의 말에 감히 뭐라 대답할 수 없었던 주견복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육건신이 한숨을 내쉬고 손을 휘저었다.
“가서 전해라. 둘째 며느리한테는 즉시 사당으로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해라. 그리고 잘못을 깨닫거든 그때 다시 나에게 와서 이야기하라고 해라.”
육함이 말했다.
“아버지, 이 일은 제가…….”
육건신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닥쳐! 너도 가서 무릎 꿇어!”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고 주견복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의랑이 물건을 정리해 대부인 방으로 옮겨라. 의랑이는 앞으로 대부인이 기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육함과 주견복은 혹시 잘못 들은 건가하며 귀를 의심했고, 육건신 본인마저 “어쩌다 이런 말까지 나왔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말은 마치 벌써 마음속으로 수천 번은 생각해왔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다. 그렇다, 육건신은 이렇게 해야했다! 이렇게 해야만 임근용과 육함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육함과 임근용이 자초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육건신은 속으로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건 두 사람이라고 되뇌었다. 그가 중간에 입양해 들인 후계자와 며느리를 믿을 수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의랑이를 데려다 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육건신은 더욱더 냉랭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여 주견복에게 일갈했다.
“내 말 못 들었느냐?”
이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주견복은 본래 총명하고 기민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자기 주인이 왜 이러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말의 여지는 남겨 두는 것이 나중에 서로 얼굴 보기도 좋지 않겠는가? 범포의 예를 떠올려 보아도 그랬다. 육 노태야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모두 그를 따랐지만, 나중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설령 육건신이 말년에 아들을 낳는다 해도 이 장남가는 여전히 이소야와 이소부인이 주인이 될 운명이었다. 주견복은 멍청한 척하며 걸음도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다.
“소인, 대노야께서 말씀하신 것 똑똑히 들었습니다. 바로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멈춰라!”
육함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냉랭한 얼굴로 육건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지금 뭘 하시겠다는 거예요?”
육건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와 네 부인은 효도도 모르고 예의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어.”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육함의 이마에 불끈하고 솟는 것이 보였다. 육함은 주먹을 꽉 쥐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의 이 차디차고 어두운 눈빛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육건신은 순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찻잔을 가볍게 들어 한 모금 들이켠 뒤 냉소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주견복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노야, 이소야,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대화로 잘 푸시면 되지 않습니까. 서로 감정 상하게 이러지 마십시오.”
육함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하며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인품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반성할게요. 하지만 그 명은 거둬주세요.”
육건신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세상에 이런 태도로 부탁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방금 전에는 그래도 무릎이라도 꿇더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지 않은가. 이건 상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하는 태도였다. 그는 절대 이런 짓을 용납해줄 수 없었다!
육함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목소리도 훨씬 커서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주견복의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주견복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육건신이 손에 든 찻잔을 있는 힘껏 땅바닥으로 패대기치며 노성을 질렀다.
“이런 개 같은 노비! 아직도 여기 서서 뭐하는 게냐? 가서 내 말 전해! 당장!”
주견복은 혼비백산해 도망쳐 나왔다. 그가 멀리 가서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꼿꼿하게 서 있는 육함의 뒷모습이 보였다.
죽을 뻔했네. 주견복은 소매로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으며,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부리나케 말을 전할 사람을 찾으러 달려 나갔다. 그가 막 문밖으로 나가니 임근용이 고개를 숙인 채 정원 밖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곁에는 임옥진도, 도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움직여 다급하게 그녀에게 달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부인, 큰일 났습니다.”
임근용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주견복은 이참에 그녀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좌우를 확인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노야께서 이소부인께 사당 밖에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또 소인에게 가서 넷째 공자의 물건을 정리해 대부인의 방으로 가져오고 앞으로는 대부인께서 기르게 하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는 임근용의 표정이 확 변하는 걸 보고 얼른 말을 멈췄다.
“이소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소야께서 대노야와 맞서고 계십니다. 소인이 이소부인께 이렇게 미리 말씀드리는 건 이소부인께서도 뭔가 계획을 세우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임근용의 표정을 살폈다.
임근용은 어느 새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주 대집사, 고마워.”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주견복은 그녀가 자신을 칭찬한 뒤 그녀를 대신해 도씨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거나, 혹은 나중에 노부인이나 임옥진에게 잘 말해 줄 테니 빨리 그녀들을 데리고 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임근용이 이런 부탁을 하면 이참에 그녀를 도우며 환심이나 사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가벼운 말 한 마디만 한 뒤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주견복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소부인이 이걸 순순히 받아들였단 말인가? 아니, 이소부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임근용을 바라보니 그녀는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귓가의 잔머리를 매만진 뒤 담담한 표정으로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주견복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소부인, 사당으로 가시는 겁니까?”
임근용이 뒤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
주견복은 놀라면서도 의아해했다.
“그럼 어딜 가시는 건지요……”
임근용이 천천히 말했다.
“저택의 대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으려고. 아버님께서 용서해 주실 때까지 안 일어날 거야.”
“아!”
주견복은 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왜 쓸데없이 입을 놀렸을까? 그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임근용이 거기서 무릎을 꿇으면 비단 육씨 가문 사람들의 체면만 상하겠는가? 평주 사람들 전체가 비웃음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의 책임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겠는가? 주견복이 다급하게 임근용을 말렸다.
“이소부인, 제발요!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대노야께서 지금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런 것뿐이니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임근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님의 명과는 관계없이 그냥 내가 잘못한 걸 속죄하러 가는 것뿐이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주견복의 곁을 지나쳐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갔다.
왜 스스로 무덤을 팠을까? 주견복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는 감히 손을 뻗어 임근용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주변에는 시녀들도 없어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견복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소부인, 소인은 호의로 부인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 제발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임근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주 대집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대집사가 미리 상황을 귀띔해 준 건 정말 고마워. 내가 잊지 않고 나중에 보답할게. 아버님께서 나한테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으라 하신 건 내가 잘못은 했지만, 그래도 내 체면을 생각해 주셔서 조용히 가서 꿇고 벌을 받으라 하신 거잖아. 하지만 난 내 아들을 차마 내 품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보여드리면 아버님께서도 더 빨리 용서해 주실 것 같아서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겠다는 거야.”
한 마디로 임근용은 체면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으니 주견복에게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건 육건신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인인 그를 대놓고 핍박하는 것이지 않은가. 주견복이 깊게 절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부인,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곧 노부인과 대부인, 사돈 부인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럼 뭔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한 가족이니 오며 가며 계속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사이 아닙니까. 이소야께서 이미 대노야께 맞서고 계신데 이소부인께서도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시면 중간에서 중재하기가 더 힘들 겁니다.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임근용이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말했다.
“완강하게 굴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제발 기다려 주십시오!”
언제나 모든 일은 하인들의 잘못이 아니던가. 주견복은 식은땀을 닦고 다급하게 영경거로 달려가 사람을 찾았다. 그는 가는 도중에 임근용이 생각을 바꿔 정말로 대문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기라도 할까 봐 기민하게 먼저 사람을 보내 춘아에게 말을 전하고, 방죽에게 가서 그녀를 말리라 하고, 두아에게 육건신의 명령에 대비해 의랑의 물건을 정리해 두라고 전했다.
임근용은 멀리 가는 주견복을 바라보며, 이제 그가 감히 더는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주견복이 자기 대신 뭔가 방법을 강구해 노부인 등을 데려올 거라 짐작하며 안심하고 치마를 턴 뒤 정원 안으로 들어가 침착하게 안을 살폈다. 황혼빛이 내려앉은 데다 앞에 몇 개의 문도 놓여 있었지만, 임근용은 꼿꼿하게 선 육함의 뒷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육함의 목소리는 분노가 가득하고 격앙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방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