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498
497화. 개꿈 (1)
이때 입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도씨와 임옥진이 함께 들어왔다. 육 노부인은 보이지 않았고 사 마마만이 그녀들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
사 마마가 육건신에게 단정하게 절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인께서 요즘 적적하시다며 의랑 공자를 보고 싶다고 하세요. 영경거에서 며칠 데리고 있게 노비한테 가서 넷째 공자를 데려오라 하셨어요.”
육 노부인은 요즘 속을 알 수 없었고, 생각도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이러는 건 틀림없이 임근용과 육함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육건신은 내심 불쾌했지만 육함과 임근용 앞에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효도가 무엇인지 가르쳐야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밖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주견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 마마는 육건신이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전부 지켜본 사람이라 그의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았다. 그녀는 말없이 절을 한 뒤 웃으며 도씨에게 물었다.
“노비가 넷째 공자를 모시고 영경거로 가려 하는데, 임 삼부인께서도 저와 함께 넷째 공자를 보러 가시겠어요?”
도씨는 사 마마의 이 말이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임근용은 어쨌든 이미 시집을 가서 육씨 가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친정어머니가 너무 깊이 관여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육건신이 화가 나 도씨의 체면을 뭉개 버리기라도 한다면 모두가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럴 때 그녀마저 나서 주지 않으면, 육함과 임근용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도씨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육건신 앞으로 나가 인사했다.
“사돈 어르신.”
도씨는 어쨌든 임옥진의 친정식구이면서, 사돈이고, 동시에 외부인이기도 해서 육건신 역시 그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 육건신은 늘 예의를 중시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속으로 얼마나 불쾌하든 겉으로는 예의를 차려야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살짝 옆으로 피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돈댁께서 오늘 어찌 이리 걸음을 하셨습니까?”
도씨는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육함과 임근용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 어리석은 것들이 멍청한 짓을 저질렀지 뭡니까. 선행이었다곤 하나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었지요. 이 일을 사돈 어르신께 미리 말씀을 드린다고 설마 사돈께서 반대하셨겠습니까? 일전에 사돈께서 종학을 재건하고 제전을 내놓으시며 가문을 위해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요? 그런데도 이렇게 어른도 몰라보고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사돈께서 이 두 아이들을 좀 호되게 혼내 주십시오! 절대 쉽게 용서해 주지 마세요!”
종학을 재건하고 제전을 내놓는 건 오늘 임근용이 내놓은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더구나 종학을 재건하고 제전을 내놓는 건 전부 육씨 가문 사람을 위한 것인데 어찌 오늘 이 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육함과 임근용이 이 일에 대해 육건신에게 미리 말했다면, 그가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았을 거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씨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자 이 일이 정말로 그렇게 단순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육건신이 모처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돈댁께서는 사리를 분별할 줄 아시는 분이시군요.”
도씨가 육함과 임근용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의랑이를 보러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임옥진에게 인사한 다음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며 밖으로 나갔다.
날이 저물자, 방 안도 점점 어두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들어와서 등불을 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가족 4명은 반쯤 어둠에 파묻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두 쌍의 부부, 고모와 조카, 숙부와 조카 사이인 그들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임옥진이 살짝 움직였다. 사실 그녀의 성질대로였다면 벌써 불난 집에 부채질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기 전에 이미 도씨가 그녀를 한껏 추켜세워 준 데다, 방 마마가 그녀를 만류하고, 사 마마 또한 그녀를 타이르고, 주견복이 겁까지 주는 바람에 여전히 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임옥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께서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벌을 내리시지 않았느냐? 아직도 안 가고 뭐하고 있는 게야? 왜 여기서 죽치고 있어?”
육함과 임근용은 말없이 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육건신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느리가 대체 얼마나 기부한 거요?”
임옥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체적인 액수는 모르지만 태반은 된다고 하더라고요.”
임근용은 전부터 혼수가 두둑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요 몇 년 동안 장사를 통해 벌어들인 돈도 꽤 되니 태반이라면 얼마나 많은 돈이겠는가? 육건신이 임옥진을 비난했다.
“당신은 그 동안 아들 며느리를 얼마나 방치했기에 아이들이 저리 제멋대로 구는 거요!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며느리 혼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같이 가놓고 며느리가 얼마나 기부했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오! 의장이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거요. 지금 같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돈 들어갈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거 잘 알지 않소. 나랑 둘째가 복직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거 모르오? 며느리가 되어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 같군. 혹시라도 매보청의 일에 연루되어 돈으로 처리해야 하면 어떡한단 말이오?”
임옥진이 불쾌해하며 말했다.
“내가 방치했다고요? 방치한 건 당신이죠! 애들 교육이요? 이 2년 동안은 당신이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잖아요, 그래서 당신은 잘 가르쳤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참지 못하고 냉소했다.
“당신이 속으로 친아들을 낳고 싶어 한다는 거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요.”
육건신은 수치스러움에 벌컥 화를 내며 소매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대체 어디까지 끌어다 붙이는 거요!”
육건신은 씩씩대며 정원으로 걸어갔다. 육건중은 혼자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가 그가 오는 걸 보고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큰형님, 저녁은 드셨어요? 방금 셋째 며느리한테 오늘 일을 들었어요. 큰형님과 큰형수께서 이렇게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착한 며느리를 두셨다니 정말 부럽네요. 근데 그 두 아이는 왜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거예요?”
육건신이 담담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두 가지 잘못을 했어. 제 잘난 멋에 취해 법도를 잊은 것 같기에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으라고 벌을 내린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봄밤은 늘 약간은 쌀쌀했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고, 담장과 지붕을 오가며 싸워대는 고양이들 때문에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기왓장이 흔들리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이로 인해 엄숙하고 조용했던 분위기도 약간은 누그러들었다.
임근용은 시큰거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한쪽에 있는 육함을 바라보고 속삭였다.
“민행, 내가 당신까지 끌어들여 버렸네요.”
육함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요!”
육함은 허리와 등을 곧게 펴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임근용처럼 가끔씩 꾀를 부리려 하지도 않고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성실하게 벌을 받고 있었다.
육함은 그녀와는 달랐다. 그는 임근용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녀를 지지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한 일에 대한 결과도 기꺼이 책임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육건신이 내린 벌 또한 이렇게 성실하게 받고 있었다. 임근용은 허허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한 적 있나요, 당신 정말 잘 생겼다고?”
육함의 얼굴에 살짝 수줍은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지만, 입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점잖게 굴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육함은 사방이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어깨를 들어 올리며 살짝 긴장을 풀었다.
육함은 그저 말하는 장소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말인즉, 다른 장소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도 좋아했을 거라는 뜻이었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웃으며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열쇠 꾸러미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세 개나 없어졌네요.”
물론 없어진 세 개는 의장에 기부한 것이었다.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지. 그렇게 많은 돈을 죽을 때 다 싸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그걸로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은 거 아니겠소. 그래서 당신이 기쁘다면 그걸로 된 거요.”
육함은 속으로 열쇠를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의 임근용보다 지금의 임근용이 훨씬 더 즐겁고 홀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임근용이 나머지 두 개의 열쇠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잖아요. 굶주림과 추위를 이길 장사는 없어요. 소작료를 줄여주고, 죽을 나눠주고, 의장을 설치하고 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남은 건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임근용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육함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은 왜 꼭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런 난리가 생기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육함도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육건신의 말이 맞기를 바랐다. 아마도 평주에서는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임근용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꼭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걱정되고 무서운 것뿐이죠.”
어두컴컴한 사당 깊은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며칠 전에 악몽을 꿨어요.”
육함이 의아해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임근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에서 평주에 비적의 난이 발생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질렀어요. 가족들은 뿔뿔이 도망쳐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내 곁에 있는 건 여지뿐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평온하고 또렷하기만 했다.
“난 무의부두에 있는 강신묘로 가서 며칠 동안 당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육적 공자가 오더니 당신은 이미 다른 길로 갔다고 말했어요. 그다음에 비적들이 몰려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여지를 죽였고 난 피해서 도망가다 강에 빠져 죽었어요…….”
봄밤이 쌀쌀해서인지, 옷이 얇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어두운 사당에 모셔진 수많은 위패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육함은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몸 안팎이 다 불편한 것 같았다. 이런 꿈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육함은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의랑이는?”
임근용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서 작은 초승달이 유난히 밝게 빛나며 창백하고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꿈에서는 의랑이가 없었어요.”
육함은 한참을 침묵했다가 낮은 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오. 여지는 벌써 시집가지 않았소? 또 내가 어찌 당신을 버리고 혼자 떠나겠소? 그러니까 그건 개꿈이오. 낮에 걱정하는 것들이 밤에 꿈으로 나타난다지 않소. 며칠 전 일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 걸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