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13
512화. 점진적인 발전 (1)
육함은 편지를 읽어본 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말없이 편지 봉투를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저 때문에 여기서 이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경성으로 돌아가면 위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제 자리는 마련해 줄 거예요. 아직 젊은 제가 경성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무슨 더 좋은 자리를 바라겠어요.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세요. 그럴 가치도 없어요.”
육건신은 언짢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차만 마셨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근용은 마음속으로 남몰래 웃었다. 그녀는 육함이 지금 일부러 멍청한 척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전생에 육건신은 바로 이 이유를 들어 그녀의 혼수를 빼앗아 갔다. 그는 직접 나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집안의 여자 식구들을 번갈아 가며 보냈다. 송씨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와서 한 마디씩 하며 그녀에게 돈을 내놓지 않는 건 큰 불효이고, 이기적인 행동이며, 냉혈하고 무자비한 인간이나 그런다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갔다. 하지만 결과가 증명해주듯 냉혈하고 무자비한 인간은 임근용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임근용을 이용해 먹은 다음 그녀가 죽든지 살든지 신경도 안 쓰고 이 집에 버리고 가 버렸다.
전생의 그때 육함은 집에 남아 집안일을 한 적도 없었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근심을 덜어 주는 일 같은 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지금 같은 이런 상황을 기대나 해 볼 수 있었겠는가!
임근용은 이런 생각 끝에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져 자기도 모르게 육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육함도 임근용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임근용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임근용은 다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육건신의 시선이 몇 번이나 임근용에게 향했다가 의랑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다시 의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육함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육건신은 평소와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의랑을 예뻐하며 말했다.
“의랑아, 할아버지랑 같이 정원에 놀러 나갈까?
의랑은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임옥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주 총명한 의랑은 오랫동안 관찰해 본 결과 지금 같은 상황에 육건신에게 대항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아니라 임옥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육건신도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할머니도 가실 거야. 그럼 우리 같이 증조할머니를 뵈러 가자. 효도를 하러 가는 거니 안 가겠다고 하면 안 돼.”
의랑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육함이 말했다.
“의랑아, 할아버지께서 너한테 말씀하시잖아. 버릇없이 굴면 안 되지.”
그러더니 곧바로 의랑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가자.”
육건신이 손을 내저었다.
“넌 태명부에 가야한다 하지 않았느냐? 넌 네 부인이랑 셋째 숙부랑 숙모 쪽에 가서 혹시 여섯째한테 뭐 전할 말은 없는지 여쭤보아라. 두 사람도 여섯째를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게다.”
임근용은 육건신이 의랑과 친분을 쌓겠다고 결심한 걸 보고 두아와 반씨에게 눈짓하며 나지막이 지시했다.
“잘 모셔.”
그녀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두아와 반씨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른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임근용은 그제야 육함과 함께 삼남가로 향했다.
* * *
육건신과 임옥진의 집이 시끌벅적했던 것과 비교하면 육건립과 여씨의 집은 아주 쓸쓸하게 느껴졌고 온 사방에 짙은 약 냄새가 가득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육건립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밥을 먹고 있었다. 여씨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의 밥그릇에 끊임없이 반찬을 놓아주었다. 육건립은 말없이 그녀가 집어 준 반찬을 다시 밖으로 골라냈다. 여씨가 화를 내며 말했다.
“뭐하는 거예요?”
시력이 매우 나쁜 육건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여씨도 더는 성질을 부리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만들라고 할게요.”
그러더니 또 불만스럽게 말했다.
“당신 몸이 이 모양인데, 무슨 삼년상을 다 지키겠다는 거예요? 어찌됐든 몸을 보양할 수 있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죠.”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랑 여섯째는 어떡해요?”
문 앞에서 이 광경을 다 지켜본 육함은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로 발이 무거워졌다. 임근용이 앵두에게 얼른 가져온 약재를 여씨의 시녀에게 건네주라 눈짓하고 웃으며 말했다.
“셋째 숙모, 무슨 불길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 * *
임근용의 말을 들은 여씨와 육건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랑이 보이지 않자 다시 눈이 어두워졌다. 여씨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의랑이는? 의랑이를 본 지 벌써 한참 된 것 같구나.”
육함과 임근용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육건립이 입을 열었다.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가는 게 우선이지 어찌 여길 자주 오겠소!”
육건립은 이렇게 말하고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사람을 불러 그릇을 치우라고 한 뒤 육함과 임근용에게 앉으라고 지시했다.
“셋째 숙부, 몸은 좀 좋아지셨어요?”
육함은 육건립의 병세가 좋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미건조한 말투로 끊임없이 물었다.
“약을 잘 챙겨 드셔야 해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의원으로 바꿔드릴까요?”
육건립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매일 똑같지, 푹 쉬면 천천히 좋아질게다.”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여섯째가 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구나. 예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네가 진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지셨던 것처럼 나도 그럴지 누가 알겠니!”
육함이 살짝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
“분명히 그러실 거예요.”
그는 육건립과 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전환했다.
“내일모레 태명부로 갈 생각이에요. 혹시 셋째 숙부와 숙모님께서 여섯째한테 가져다줄 물건이나 전할 말씀이 있으신지 여쭤보러 왔어요.”
여씨가 즉시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내가 여섯째한테 갖다 줄 옷 몇 벌이랑 음식을 좀 만들어 놨어.”
그녀는 처음에는 시녀를 불러 가져오라 하려다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가지러 갔다.
육건립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더니 결국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가서 마음 편히 시험 보라고 해. 아직 나이가 어리고 기회는 많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전해 주어라.”
문가에 다다른 여씨가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걸음을 멈추고 임근용을 불렀다.
“아용, 와서 나 좀 도와주렴.”
임근용은 그녀가 아마도 이때를 틈타 그 찻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하며 빼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여씨가 곁방에 있는 십여 개의 꾸러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다 여섯째한테 갖다 줘야 하는 물건들이야. 이건 약재고, 이건 옷이고, 이건…….”
임근용이 슥 둘러본 뒤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지 않나요?”
여씨가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 말했다.
“어차피 마차랑 배에 싣고 갈 거잖아. 누가 들고 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떠니.”
임근용은 입을 다물었다. 이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육함도 반대하지 않는데 그녀가 뭐 하러 괜한 참견을 하겠는가? 이미 이렇게 다 준비해 두었는데 쓸데없는 말을 해서 서로 기분만 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임근용에게 따로 할 말이 있었던 여씨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고 다시 말투를 바꾸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서 챙겨 가.”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드린 약재는 셋째 숙부를 위해 특별히 부탁해서 며칠 전에 사 온 거예요.”
여씨는 잠시 침묵했다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임근용은 그녀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여씨는 잠시 참는 듯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 찻집을 그만할 생각이라면서, 왜 닫는 거야? 장사가 잘 안 되니? 너무 아깝구나.”
임근용은 일전에 임세전에게 했던 말을 그녀에게 그대로 했다.
“평주는 재력 수준이 높지 않아서 사실 버는 게 얼마 안 돼요. 삼년상을 끝내고 나면 민행이 어디로 발령 나는지 보고 이쪽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다시 차릴 생각이에요!”
여씨가 말했다.
“그럼 인수하겠다는 사람은 있어?”
임근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여씨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나한테 넘겨. 얼마에 넘길지는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주면 돼.”
임근용이 말했다.
“셋째 숙모께서 왜 갑자기 찻집을 하실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거기 신경 쓸 시간은 있으세요? 수하에 적절한 관리인은 있으시고요? 그 찻집은 그냥 차만 갖다 놓는다고 운영이 되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을 쓰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손님을 붙잡아 둘 수 있어요.”
여씨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내가 알아서 찾을 거야. 넌 넘길지 말지만 말해 주면 돼.”
임근용은 그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만약 셋째 숙모께서 직접 경영하실 생각이라 하시면, 안 넘겨드릴 거예요. 숙모께서 직접 하시면 손해만 보시게 될 게 뻔하니까요. 숙모한테는 그 찻집을 맡길 만한 믿을만하고 유능한 관리인이 없잖아요. 혹시 숙모께서 다른 사람 대신 물어보신 거라면, 그 사람한테 직접 절 찾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여씨는 생각지도 못하게 임근용으로부터 단칼에 거절을 당하자 화가 나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나한테 어쩜 이럴 수가 있니? 네가 할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도 안 주고, 우리 둘 다 손해 보면 너한테 좋을 건 또 뭐가 있는데? 어쨌든 나도…….”
임근용이 나지막이 말했다.
“숙모님께서 이러시니까 저도 숙모님께 이러는 거예요. 기분 나쁘시면 민행한테 가서 말씀하세요.”
여씨는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임근용은 침착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여씨는 노기등등하게 문발을 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복도에 서서 안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여씨가 말했다.
“둘째야, 뭐 하나만 묻자, 너희 부부가 그 찻집을 나한테 넘기지 않기로 벌써 얘길 끝낸 거니?”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 차분하게 말했다.
“셋째 숙모께서 운영하실 능력이 있으시면, 당연히 숙모께 넘겨드리겠죠. 하지만 숙모께서는 그런 능력이 없으시잖아요. 숙모는 그냥 집에 계시면서 셋째 숙부의 건강을 돌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벌써 제 선생께 말씀을 드려 놨으니 여섯째가 이번 시험에 합격을 하든 못 하든 집에 돌아오면 제 선생의 서원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시고 집안일도 하게 하세요. 셋째 숙모께서는 찻집에 신경 쓰실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여섯째를 더 잘 돌볼 수 있을지 고민하셔야죠. 숙모께서 이 집안을 잘 돌보시는 것만으로도 여섯째가 걱정을 많이 덜 수 있을 거예요.”
여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너…….”
그러더니 또 육건립을 불렀다.
“쟤 좀 봐요…….”
육건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둘째 말 들으시오. 틀린 말 하나 없소.”
그는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