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18
517화. 운명 (2)
육함이 가랑눈을 맞으며 방문 안으로 들어가자 임근용이 흰옷을 입고 혼자 등잔 옆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여린 뒷모습에서 그녀가 지금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육함이 안으로 들어가자 임근용이 얼른 그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를 껴안았다.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낙담한 육함의 마음을 살짝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비적들을 토벌한 건 물론 정말 좋은 일이었지만, 만약 이 일로 그가 했던 모든 일이 우스꽝스러운 짓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평생을 따라다닐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럼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낙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임근용은 육함이 왜 낙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육함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그에게 물었다.
“민행, 처음에 당신이 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당신도 분명히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 봤을 거 아니에요.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게 바로 진정한 용기인 거예요.”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용,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 된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임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잖아요. 애초에 당신 목적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재난을 피하게 만드는 거였잖아요. 그럼 당신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한 거나 다름없는 거죠.”
이제 더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닐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육함마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임근용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디디는 수밖에 없었다.
변화는 항상 예상치 못한 때에 들이닥쳤다. 운명의 힘은 너무나 강해서 그녀가 앞에 큰 구덩이가 있다는 걸 알고 피해 가면 예상치 못한 곳에 또 다른 구덩이를 파 놓았다.
* * *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이 되자, 가랑눈이 집 담장을 하얗게 뒤덮었다. 문득 불이 난 듯 하늘의 절반이 붉게 물들고, 사람들이 서로 때리고 죽이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전혀 현실감이 없었지만, 또 위기가 바로 턱밑에 다가와 있는 것처럼 발이 얼어붙었다. 임근용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다급하게 의랑을 안아 들었다. 아이가 울며 보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이에게 서둘러 옷을 입혔다. 그런 다음 평소 준비해 두었던 비상용 보따리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놀란 시녀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했다.
“허둥대지 말고 일단 나가서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해 봐!”
임근용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아주 침착했다. 하지만 그녀는 몸에서 난 식은땀에 속옷이 다 흠뻑 젖어 버린 게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하느님! 역시 운명이 그녀를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남겨 둔 이 시점에 그 일은 예상하지도 못하게 아무런 인사도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어찌 관군들이 승전했다는 소식이 막 들린 이때에 비적의 난이 발생한단 말인가. 임근용은 괴상한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뛰어 들어오는 육함을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민행,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육함이 임근용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 내가 가서 확인해 보겠소. 지난번이랑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오.”
육함은 아주 평온한 얼굴로 가볍게 말했지만, 같은 일이 두 번 연속해서 생길 리는 없다는 걸 내심 잘 알고 있었다. 관군이 압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데다 밖은 어수선하고 상황이 어떤지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무턱대고 문밖으로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임근용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 당장 날개라도 달고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등솔기 안쪽에 금 구슬을 넣어 꿰맨 상의를 꺼내오라 한 다음 속옷 위에 입고, 그 위에 또 미리 준비해 둔 무명 솜옷을 걸쳤다. 그리고 방수가 되면서도 발이 편한 가죽 장화를 꺼내 신고 화장함을 열어 노란 가루를 꺼내 얼굴을 노랗게 칠한 다음 푸른 천으로 머리카락을 꽉 묶어서 틀어 올렸다. 또 날카로운 가위를 하나 집어 품에 넣었다.
모든 준비를 다 끝낸 후 임근용은 밖에서 소곤대고 있는 앵두와 두아 등을 불러들였다. 시녀들은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넋이 나갔다. 반씨는 더욱 놀란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소부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쩌면 좋아요?”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다들 불안해하지 말고 일단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임근용은 춘아에게 시녀들에게 노란 가루와 은전을 조금씩 나눠 주라 말하고 시녀들에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두꺼운 옷과 신발을 신고 오라 지시했다. 그런 다음 시녀들을 주방으로 보내 밥을 만들라 하고, 그녀는 춘아와 몇몇 시녀들을 데리고 의랑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난롯가에 앉아 육함이 소식을 알아보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때쯤 되자 육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깜작 놀라 잠에서 깼고, 사방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주견복은 건장한 장정들에게 곤봉을 들려 각 집의 대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 풀이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온몸이 긴장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육함은 측문 앞에 서 있다가 문에서 3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대문을 열었다. 장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야, 큰일 났어요. 비적들이 쳐들어왔어요. 앞쪽 골목 어귀에 있는 군순포를 늙은 병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 죽였더라고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비적들이 관군으로 위장해 들어와 성문을 열었다고 해요…….또 며칠 전에 적지 않은 비적들이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소인이 다른 거리도 쭉 훑어봤는데 전부 난장판이었어요…….”
그러니까 관군들은 대승을 한 것이 아니라 대패를 한 것이었다. 그 승전보는 거짓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평주성 안은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비적들이 아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평주성은 위험했다! 재빠르게 판단을 내린 육함이 다급하게 물었다.
“안무사 댁과 지주부 댁의 움직임은? 수비군들은?”
장수는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육함도 더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정보를 알아 온 것만 해도 아주 잘한 일이었다. 어찌 그리 세세한 것까지 다 알아 올 수 있겠는가? 그는 장수의 어깨를 토닥인 뒤 황급히 뒤돌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육건신은 하 이낭의 부축을 받으며 함월루의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그가 육함을 보자마자 소리 질렀다.
“빨리 사람을 시켜 마차를 준비하라 해라! 여기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육함은 잠시 멍해졌다가, 속으로 아직 바깥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온 식구가 함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죽느니 차라리 대문을 잘 지키고 집에 숨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막 육건신을 설득하려 입을 여는데 육건신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마차를 준비하라니까! 귀가 막혔어? 여기서 죽고 싶어?”
하 이낭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육건신을 다독였다.
“대노야, 조급해하지 마세요. 조급해하시면 안 돼요.”
“입 닥쳐!”
육건신이 노성을 내지르며 분노한 눈빛으로 육함을 노려보았다. 육함은 말없이 곁에 있던 장녕에게 손짓하며 육건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자 함월루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육함은 숨을 훅하고 들이마셨다.
아직 채 밝지 않은 하늘은 암담한 회백색으로 덮여 있었고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안무사 댁과 지주 댁 쪽에는 큰불이 나 하늘이 반쯤 붉게 물들어 있었고, 육씨 가문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평소 군순포였던 건물 위쪽에서도 짙은 연기가 치솟는 걸 보니 분명 불이 난 것 같았다. 그는 육건신이 왜 그렇게 조급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군순포 건물에 불이 났다는 건, 거기 있는 군인들도 비적들이 죽였다는 뜻이었다. 설령 운 좋게 일시적으로 비적들을 막아냈다 하더라도 그 불길만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일대는 워낙 집들이 밀집된 곳이라 다들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불길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선견지명이 있는 육씨 가문의 선조들이 담벼락과 건물 사이에 꽃과 나무를 심어 간격을 띄워 두었지만, 밖에서 사람들이 횃불을 던지고 기름을 뿌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육함이 황급히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나무로 된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육함은 텅 빈 함월루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다급하고 두려워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며 눈송이가 창호지에 탁탁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처마 밑에 걸린 구리로 된 풍경이 바람에 날리며 다급하고 맑은 종소리를 미친 듯이 울려댔다. 마지막으로 육함은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심장이 목구멍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육함은 그날 밤 사당 앞에서 임근용이 그에게 말했던 악몽과 그가 역참에서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화원은 초목이 다 메말라 나뭇가지에 눈만 잔뜩 쌓여있을 뿐, 다 죽은 것처럼 사방이 온통 황량했다. 육함은 황급히 중간을 가로질러 가며 원래 길을 따라가지 않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서 갔다.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그의 몸으로 떨어져 그의 정수리에서 녹아 물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뛰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삼남가의 대문 앞에서 육선을 마주쳤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육선은 평소처럼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손에 팔뚝 굵기의 빗장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혼자 거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몹시 당황한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는 것 같았다. 육함이 오는 걸 본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허리에 힘을 주어 곧게 펴고 육함을 향해 경직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째 형님.”
육함은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어 힘껏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 짐을 싸서 고택으로 갈 준비해. 명심해,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순간 육선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빗장을 들고 있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를 덜덜 떨며 가까스로 한 마디 내뱉었다.
“둘째 형님, 무슨 일이에요?”
육함은 그제야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육선은 너무 연약했다. 그가 육선의 어깨를 짚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최대한 온화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이럴 때는 남들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 스스로 보호해야 해. 지금은 네가 셋째 숙부와 숙모를 보호해 드려야 할 때야. 그러니까 넌 빨리 들어가서 짐을 싸고 두 분을 모시고 정당으로 가.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옷을 두껍게 입고 먹을 것을 챙겨. 너무 걱정 하지 마. 아마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은 없을 거야.”
육함은 육선이 좀 안정된 것 같아 보이자 다시 그를 격려했다.
“넌 사내대장부니까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만약에…… 일단 넌 고택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육선이 힘겹게 침을 한 모금 삼키고 무의식적으로 육함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육함이 온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네 할머니, 둘째 형수, 조카, 큰아버지, 큰어머니 다 곁에 아무도 없어.”
육선은 말없이 손을 놓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멀리 가는 육함을 바라보았다. 육함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되자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형! 걱정 마요!”
육함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황급히 뒤돌아 달려갔다. 그는 가는 도중에 자신을 찾으러 나온 장수를 만났고 장수를 보자마자 지시했다.
“넌 말을 한 필 가지고 나가서 어떻게든 임씨 가문에 가서 소식을 전해. 만약에 성 밖으로 피난을 갈 생각이라면 우리 고택으로 오라고 말씀드리고 네가 길을 안내해 줘! 그러고 나서는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