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26
525화. 존경
육함은 몹시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육건신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가 눈을 들어 임근용을 바라보니 임근용은 의랑의 작은 피풍 뒤에 반쯤 얼굴을 숨긴 채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한없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육함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우선 의랑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고 다시 임근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신의 미안함과 애틋함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미안하오, 의랑이는 당신한테 맡기겠소.”
임근용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역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강변으로 가지 않았는데도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너무나 싫었다! 임근용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육함의 소매를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육함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을 들고 임근용의 손을 꽉 잡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역참에 있었을 때 일이 정말로 후회되는군.”
그 당시 임근용은 육함에게 그녀를 이렇게 대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육함은 지금 진심으로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고, 그것도 아주 마음 깊이 후회가 됐다.
임근용은 빨개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확 물어뜯어 버려야 이 분이 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육함이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낸 뒤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반드시 돌아가겠소!”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육건중과 육경 앞에 서더니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했다.
“둘째 숙부, 조카 같은 소인이 어찌 숙부님 같은 군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육건중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둘째야, 무슨 그런 농담을 하고 그래?”
육함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숙부께서 할머니, 우리 어머니, 아용, 의랑, 그리고 셋째 숙부 일가를 무사히 고택으로 데려가 주시겠다고 맹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정말로 하늘이 돕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두 분을 탓할 수 없겠지만, 만약 두 분이 이기적으로 자기들만 챙기다 무슨 일이 생기면…….”
육함이 잇새로 내뱉듯 말했다.
“제가 죽어서도 두 분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못 믿겠다면 어디 두고 보세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분노한 육건중이 소매를 힘껏 뿌리치며 말했다.
“대체 날 뭐로 보는 게냐? 내가 이기적이고 나만 챙기는 사람이란 뜻이냐? 네 할머니가 내 친어머니라는 걸 잊었느냐? 네 어머니는 내 큰형수이지 않느냐? 또 네 아들은 내 조카이지 않느냐? 네 셋째 숙부는 내 친형제 아니었느냐? 난 그따위 맹세는 못 해! 이렇게 날 모욕하다니! 어찌 이리 사람을 모함한단 말이냐!”
그가 맹세를 안 하겠다고 버티면 육함이 또 뭘 어쩌겠는가?
육함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점점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빛도 점점 더 어두워졌다.
“둘째 숙부께서 맹세를 못 하시겠다 해도 상관없어요.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거니까요.”
그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 가려는데 육 노부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둘째 너, 무릎 꿇어!”
육건중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육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육 노부인이 딱딱한 얼굴로 냉담하게 말했다.
“둘째 손자는 너한테 맹세를 하라 할 수 없대도 난 할 수 있지 않느냐?”
육건중은 마음 같아서는 솔직히 골백번도 더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어찌 감히 부모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육건중은 몹시 억울했지만 하는 수 없이 육 노부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희뿌연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하늘에 맹세합니다. 저 육건중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육함이 그의 말을 끊었다.
“‘어머니, 큰형수를’로요…….”
육건중은 육함이 미워서 이가 갈릴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머니, 큰형수, 조카, 조카며느리, 조카 손자, 셋째 동생, 셋째 제수를 무사히 고택으로 데려가고 큰형님을 데리러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고 이 맹세를 어기면 저는…….”
육건중이 잠시 망설이자 육 노부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절로 고개를 숙이고 들릴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명에 죽지 못할 겁니다.”
“됐다!”
육 노부인이 고개를 들고 위엄 어린 눈빛으로 육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착한 우리 둘째 손자, 우린 먼저 가마! 몸조심 해라!”
임옥진이 앞으로 나와 육건신 쪽을 힐끗 쳐다본 뒤 다시 육함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해. 우린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임옥진은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던 육함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육함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근용이 의랑을 안고 다가와 의랑에게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게 한 뒤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안 돌아오면, 영원히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바람이 불고 구름이 낮게 깔리며 하늘가에 밤의 기색이 어렸다. 육함은 눈이 녹아 질퍽해진 땅을 밟고 서서 소달구지에 앉아 의랑이를 꼭 안은 채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가는 임근용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의랑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울음소리가 마치 하늘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의랑은 잘 우는 아이가 아니었지만,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달래기 쉽지 않았고, 목소리도 아주 우렁찼다. 육함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는 쫓아가고 싶어 몇 번이나 움찔거리는 발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소야, 거의 준비가 다 됐습니다.”
주견복의 목소리에 육함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육함이 얼굴을 쓸어내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노새 마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되돌아갔다. 그들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달아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육함이 뒤돌아보았지만 육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사람들 속에 파묻혀 더는 임근용 모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소야, 이소부인은 무사하실 겁니다. 한근이가 따라갔지 않습니까. 제 처와 아들 녀석도 그리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주견복은 육함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는 평소 문약하고 과묵한 데다 부드럽게든 강경하게든 육건신과 자주 대립을 해 왔던 육함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선택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더니 대노야가 후계자 하나만큼은 제대로 선택한 것 같았다. 이 일로 주견복이 육함을 대하는 태도 또한 약간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그도 신분과 지위 때문에 육함에게 아첨하며 비위를 맞췄다면, 지금은 오히려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주견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육함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육건신만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상처가 가벼운 것 같지가 않아. 아까 그 구(邱)씨네 집에서 우리를 도와줄지, 또 좋은 의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소야,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대노야께서 금방 정신을 차리실지도 모르지요. 대노야께서 무사하시면 저희도 곧 노부인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좀 전에 들렀던 장원이 가까워지자 주견복은 곁을 지키던 하인들을 불러 지시했다.
“조금 이따가 이소야께서 저 집 주인에게 가서 부탁을 해야 하니, 너희도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사납게 굴면 그쪽에서 너희를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있어.”
하인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육함은 옷과 모자를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협상을 하러 갔다. 이미 날이 저물어 장원 밖에는 아까처럼 앉아서 쉬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몇 무리가 띄엄띄엄 앉아서 모닥불을 둘러싼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육함은 그들 뒤로 에돌아 후문 쪽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가 횃불을 들고 계단을 밟아 담벼락 위로 올라오더니 바깥쪽으로 불을 비췄다. 그가 거친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뜨거운 물은 앞에 가서 달라고 하시오. 후문 쪽으로는 오지 말고. 말 안 들으면 돌로 쳐 죽여 버릴 거요!”
육함은 이런 상황이라면 분명 이쪽 방면의 전문가에게 후문의 방비를 맡겼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이제야 나와서 육함을 상대하는 이유는 이렇게 뻔뻔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 짜증 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육함은 화를 내지도, 또 거절당했다고 해서 치욕스러워 하지도 않고, 인내심 있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 전 아까 낮에 주인 어르신께 저희 집안 여자 식구들이 화장실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사람이에요. 성은 육이고 이름은 함이고 자는 민행이에요.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구 어르신을 다시 한번 뵙고 싶어요.”
담벼락 위에 횃불이 두 개가 더 늘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불빛을 비춰 육함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좀 전에 말을 했던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또 뭘 어쩌란 말이오? 화장실을 쓰게 해줬으면 됐지, 뭐 그리 바라는 게 많소? 저리 가시오, 얼른 가시오!”
육함은 그가 자기 말을 듣지도 않고 가 버릴까 봐 황급히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저희 가문은 평주성 안에서 나름 명망이 있는 가문이에요. 문인 가문이고 가산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무슨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 은혜를 저버리고 나쁜 짓을 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댁에서 아량을 베풀어 저희를 좀 도와주시길 부탁드려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실 거예요!”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육씨 가문에 대해서는 우리도 들은 적이 있고 제대로 된 집안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당신이 효심이 깊어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되돌아왔다는 것도 이해하오. 하지만 담장 밖에는 당신네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 규칙을 깰 수는 없소. 한 번 이 규칙이 깨지면 다른 사람들도 거절할 수 없을 거요. 우리 집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일손도 많지 않아 그런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가 없소. 의원은, 이런 시골에 무슨 좋은 의원이 있겠소!”
육함이 거듭 간청했지만, 그는 계속 거절하며 심지어 자기 주인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고 밤이 깊어 주인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고 핑계를 댔다. 육함이 절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육씨 가문입니까?”
육함이 눈을 번쩍 뜨며 재빨리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젊은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쪽 집안의 한 자제가 일전에 평주성에 쟁기와 앙마를 도입하고 나중에는 진사에 합격했다고 하던데…….”
육함은 겸손을 떨 겨를도 없어 냉큼 대답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접니다. 작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와 상을 치렀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이런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염치없지만 댁에서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과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안이 조용해지고 담벼락의 횃불도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