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32
531화. 기다림
마부는 마차 바퀴에 기름을 칠하고 고정해야 할 곳도 단단히 고정했다. 시녀가 잘 마른 푹신한 이불을 한 아름 들고 와 우마차 안에 깔고 주방에서 서둘러 만든 비상식량을 마차 안의 틈새에 가득 채워 넣었다. 임근용은 이제 더는 할 것이 없어 쌍전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몇 번 돌자 정면에서 두아가 의랑을 데리고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의랑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서러운 얼굴로 그녀의 품에 달려들었다.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개어 짙푸른 하늘에 그림 같은 흰 구름이 보였다. 의랑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투명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임근용은 그것이 마치 그녀의 가슴속에 돋아난 봄날의 새싹 같았다. 그녀가 의랑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왜 그래?”
의랑은 말없이 그녀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두아가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울면서 아가씨를 찾으셨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요즘 좀 불안해하세요. 잠에서 깰 때도 늘 깜짝 놀라면서 깨시고 전보다 더 자주 우시기도 하고요.”
의랑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정확히 말하면 이틀 전에 차남가 식구들이 떠나고 그의 눈에 더는 역랑과 복랑이 보이지 않게 된 후부터였다. 혹시 이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불안감이 가득찬 걸까? 임근용이 아이를 안고 나지막이 물었다.
“의랑아 왜 그래?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그래? 외숙부 댁의 형이랑 누나들이랑 놀면 되잖아.”
두아가 조용히 말했다.
“공자가 외숙부 댁 사촌들이랑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 아침에 사촌 공자가 의랑 공자의 장난감을 뺏었는데, 바로 사촌 공자 얼굴을 꼬집더니 그다음부터 더는 같이 놀려고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임씨 가문에는 의랑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두세 명 있었지만, 별로 친분이 없어서 같이 놀긴 해도 소소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임근용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의랑이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의랑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의랑아, 그 아이들도 네 형제 자매들이야. 역랑이나 복랑이랑 똑같은 친척이니까 네가 너그럽게 잘 해줘야 해. 그럼 그 아이들도 너한테 잘 해 줄거야.”
의랑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는 대충 고개만 끄덕인 뒤 다시 임근용의 목을 꼭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의랑은 아직 너무 어려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어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긴장감과 불안감을 감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임근용은 의랑을 도씨와 많이 접촉하게 해야 나중에 빨리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도씨에게 보내 두었는데, 지금 이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임근용이 두아에게 지시했다.
“가서 의랑이 물건을 정리해서 내 방으로 옮겨. 어머니한테는 내가 아이를 돌보겠다고 했다고 말씀드려.”
의랑도 이 말을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임근용의 볼에 뽀뽀를 한 뒤 가만히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임근용이 아이를 안고 앞으로 걸어가며 속삭였다.
“우리 의랑이 아버지는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차남가가 떠난 후로 고택 밖에 살던 육씨 가문 사람들 역시 대부분 피난길에 올랐다. 처음부터 가지 않겠다고 했던 증조부 어르신을 포함해서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가난해 떠날 수 없거나, 집안에 노인이나 환자가 있어 떠나기 곤란한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장남가가 피난을 가지 않는 걸 보고 좀 더 기다리려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청주 쪽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거라곤 청주성 외곽에 사는 사람들이 벌써 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소식을 알아보라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 대영 기병에 대해 아주 극악무도하고 끔찍한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동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대 이쪽으로는 올 수 없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갑자기 대문 앞에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놈들은 임산부와 갓난아기 가리지 않고 싹 다 죽인다고 해요…….”
임 노태야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일 아침 일찍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씨의 건의에 따라 도순흠의 친척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이제 육건립의 고열도 내려 육함과 육건신만 돌아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임근용은 이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부터 계속 마음이 초조했다. 전생에 그녀는 육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과연 기다릴 수 있을까?
의랑도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가 임근용은 금세 팔이 아팠다. 그녀가 자세를 바꾸며 의랑에게 작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었다.
“의랑아, 우리 의랑이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의랑이는 엄마가 곁에 없더라도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어르신들께 효도하고, 혼자서도 꿋꿋하게 잘 자라야지만 진정한 사내대장부인 거야.”
따스한 햇살이 아이의 몸에 내리쬐자 의랑의 몸이 따끈하게 데워졌다. 어머니의 따스하고 향기로운 품에 안겨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아이는 너무도 편안해 눈꺼풀이 절로 달라붙었다. 의랑은 작은 몸을 꼼지락거리며 임근용의 어깨에 기대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임근용이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가 잠을 잘 수 있게 햇빛이 잘 드는 곳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정원에는 그녀와 의랑, 쌍전과 주견복의 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월에 다듬어져 옥처럼 매끄러워진 청석판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바짝 말라 곧 죽을 것 같은 국화 몇 송이가 담장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재에 대비하려 수시로 물을 가득 채워두는 큰 항아리에 날아가던 새가 내려앉더니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금씩 물을 쪼아 먹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이 얼마나 쾌적하고 편안한 겨울날의 오후란 말인가? 와야 할 것은 반드시 오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최선을 다했고, 이제 와서 긴장한다 한들 아무 소용없었다. 임근용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의랑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온몸에 힘을 빼고 벽에 기대며 가장 편안한 자세로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편안함을 즐겼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두아가 그녀의 뒤로 다가와 속삭였다.
“아가씨?”
임근용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소야가 돌아왔어?”
두아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대부인께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오라고 하세요.”
임근용은 하늘 색을 보고 또 텅 빈 대문을 응시한 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의랑을 두아에게 건넸다. 그녀가 막 시큰거리는 팔을 살짝 풀고 있는데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의랑이 두아의 품에서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아이는 그녀 쪽으로 팔을 뻗고 울며 소리쳤다.
“엄마, 안아 줘, 안아 줘!”
두아가 아이에게 말했다.
“의랑 공자, 이렇게 못되게 굴면 안 되죠, 어머니께서 한참 동안 안아 주시느라 팔이 아프신데, 공자 때문에 어머니께서 아프셔도 괜찮아요?”
의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큰소리로 계속 울었다. 아이는 정말로 슬픈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임근용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아이를 안고 천천히 임옥진의 거처로 향했다. 그녀는 걸으면서도 내심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달려와 육함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왜 여태 안 오는 게야? 거리만 놓고 보면 정오쯤엔 도착했어야 하지 않느냐. 벌써 날이 어두워졌는데 어째 그림자도 안 보여.”
임옥진은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임근용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마 아버님께서 움직이기 힘드셔서 천천히 오는 걸 거예요. 아니면, 둘 정도 더 마중을 나가라 할게요.”
임 노태야가 말했다.
“벌써 두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 않느냐? 지금 일손이 부족한 데다 밖이 어수선해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 괜히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자.”
임옥진은 말문이 막혀 말없이 손을 뻗어 의랑을 데려갔다.
임 노태야가 임근용에게 말했다.
“방금 네 둘째 큰아버지랑 같이 보고 왔는데 마차를 아주 잘 준비해 뒀더구나.”
임근용은 살짝 미소 지어보였지만, 다른 말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임 노태야는 두 고부가 육함과 육건신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 않느냐. 못 올 것 같았으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겠지. 아무도 안 오는 걸 보면 아마 오는 중일 게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 안으로는 무슨 소식이 올 게야.”
임근용은 육함이라면 그녀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 그들이 무사함을 알렸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예상치 못한 변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두려워졌다. 전생의 이맘때 임근용은 죽음을 맞이했는데, 육함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임근용이 깊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육선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들어오더니 매우 분개해하며 말했다.
“둘째 형수, 초빙해 온 의원이 몰래 도망쳤어요! 우리 당나귀도 한 마리 훔쳐 서요!”
임근용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도망갈 거면 가라죠.”
그 사람도 처자식이 있을 테고, 자기 살겠다고 도망을 갔는데, 억지로 끌고 와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 *
우마차는 너무 천천히 움직여서 속도가 걷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밤바람이 숲의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핏빛 노른자 같은 태양이 느리지만 꿋꿋하게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산들은 점점 어둠에 휩싸였다.
육함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그의 숨결이 흰 입김으로 변했다. 그는 이 변덕스럽고 추운 날씨가 절로 원망스러웠다. 육건신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마차 안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눈빛과 표정으로 몹시 분노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육건신의 목구멍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주견복이 육건신에게로 몸을 굽히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대노야, 조금만 참으세요. 아무리 아파도 참으셔야 해요. 이제 곧 고택에 도착할 거예요.”
그는 육건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육건신은 그 구 의원이 계속 그의 상처를 치료해 불구가 되지만은 않게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흔들림을 견디며 가야 하니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영의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고, 비적들도 수시로 성 밖으로 나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에 구씨 가문 사람들도 곧 피난을 떠날 것이라 해 도저히 더는 거기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가족들과 합류해 강변으로 가지 못하면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