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35
534화. 이심전심 (1)
“네가 다섯째라고? 죽은 거 아니었어?”
육함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섰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또 그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육함은 정말로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육륜은 그런 육함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따뜻해요, 따뜻하다고요!”
장수가 육륜의 허벅지를 껴안고 두 손으로 열심히 더듬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육함에게 말했다.
“이소야, 오공자의 다리가 따뜻해요. 말도 따뜻하고 숨도 쉬고 있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럼 당연히 숨을 쉬지 안 쉬겠냐!”
육륜이 그를 발로 찬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육함에게 고택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적들은 대략 백여 명쯤 되고, 그중 절반은 말을 타고 있어요. 지금 고택을 포위하고 있는 중이고, 밖에 있는 친척들 집을 불태웠어요. 다행히 안에서도 야간 당직을 세우고 계획도 세워 둔 덕에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이 고택 안으로 들어가 숨었어요. 임 대노야와 여섯째가 사람들과 함께 담벼락 위에서 비적들과 싸우는 걸 봤는데 기세등등해 보이는 걸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들은 육함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 주고 있었다. 육함은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낮게 환호성을 지르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공자께선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육륜은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옷을 찢어서 말발굽을 감싸. 그럼 말발굽 소리 때문에 비적들에게 들키는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육함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내 친구들을 몇 명 데려왔어요. 원래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에서 칠 생각이었는데 그러기엔 우리 인원수가 너무 적더라고요. 그래서 이 길로 돌아 비밀 문으로 들어가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과 계획을 짜고 양쪽에서 협공해 포위를 풀려고 했어요. 가는 길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에 누군지 확인하러 왔는데 그게 형님일 줄은 몰랐네요.”
그가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큰아버지는 어떠세요?”
육함은 육륜이 마차 안에 누가 있느냐고 묻지 않고 곧바로 육건신이 어떠냐고 묻는 걸 보고 그가 여기 도착한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그는 육륜이 아마도 비적의 난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감동이 밀려왔다.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야.”
육함이 잠시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말했다.
“다섯째야, 종은 네가 친 거지?”
육륜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동란이 났다는 소식를 듣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곧바로 달려왔어요.”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도착하던 날, 마침 그분들께서 떠나시더라고요.”
육륜이 말하는 그 분들이란 육건중과 육경이었다. 육함은 그가 차남가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화제를 돌렸다.
“네가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니 정말 기쁘다. 네 둘째 형수도 널 보게 되면 아마 너무 좋아서 울 거야.”
그는 육륜이 왜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또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육함이 육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랑 같이 갈 거지?”
육륜은 동문서답했다.
“여기 오래 머무를 수는 없어요. 일단 비적들을 물리친 후에 되도록 빨리 강을 건너야 해요. 자, 이 앞쪽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적들이 순찰을 돌고 있거든요.”
그는 육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앞에 조용히 그를 마중 나온 두 개의 검은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친구들이니까 너희는 저 사람들을 따라가. 둘째 형님, 우리는 같이 걸어가요. 내가 형님이 비밀 문을 통해 고택으로 들어갈 때까지 엄호해 줄게요. 들어가고 나서는 등불로 신호를 줘요. 준비가 다 되면 위아래로 세 번 흔들어요. 그런 다음 종소리가 울리면 대문을 열고 일제히 밖으로 나와 비적들을 죽이는 걸로 해요.”
육함은 허리춤에 비수를 단단히 차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자 속에 숨어서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그 비밀 문을 찾아냈다. 육륜과 그는 겉으로 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청석 벽돌을 깨끗하게 떼어내 한쪽에 쌓으며 그 뒤에 숨겨진 나무문을 드러냈다. 그 문은 이 고택의 가장 은밀한 곳이자 가장 취약한 곳이었으며 동시에 유일한 탈출구였다.
* * *
동트기 전은 가장 어두우면서 사람들이 가장 피곤해하는 시간이고 또 가장 깊게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고와 기습들이 이 시간에 발생했다.
임 노태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하인에게 찬물을 들고 따라오라 한 뒤 크게 소리 지르며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졸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찬물에 담근 수건을 건네주며 얼굴을 닦으라 하고, 이럴 때 비적들이 2차 공격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주지시켰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라 지시하고 담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 당부했다.
역시나 비적들이 담을 넘어 들어오려 시도했지만, 육씨 가문 고택의 담벼락은 아주 높았고 또 위로 올라갈수록 바깥쪽으로 기울어진 형태였다. 그렇게 긴 사다리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이런 기괴한 모양의 벽을 타고 오르는 건 더욱 쉽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이쪽은 대부분 기껏해야 명절에 닭 모가지 정도나 잘라 본 일반 백성일 뿐이었고 저쪽은 칼날에 묻은 사람의 피까지도 핥는 비적들이었으니 아무래도 심리적으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굵직한 나무 기둥이 대문을 때려댈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그들은 대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닐까 하고 몹시 초조해했다.
임근용은 이 일이 단시간 내에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계속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철같이 튼튼한 남자들이라도 쉴 시간은 필요하지 않은가. 여자들도 쓸데없이 앉아서 걱정이나 할 바엔 차라리 뭔가 할 일이 있는 것이 더 나았다. 다른 건 힘들더라도 식칼이나 장작 칼 같은 걸 들고 교대로 내벽을 따라 한 번씩 순찰을 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임근용은 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제일 먼저 나서서 첫 번째 순찰조의 선두에 섰다. 그녀가 여자들을 데리고 횃불을 높이든 채 내벽을 따라 절반쯤 순찰을 돌았을 때 쌍전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앞에 노태야가 계세요.”
임근용이 고개를 들어보니 임 노태야가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앞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할아버지.”
그녀는 최소 꾸지람 몇 마디는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임 노태야는 가볍게 한 마디 했다.
“잘했다. 늘 조심하면서 다녀라.”
임 노태야의 입에서 잘했다는 말이 나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임근용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려 사람들을 데리고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고택의 후원에는 유난히 어두침침한 작은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예전에 불충하고 못된 노비 몇 명이 거기에 갇혀서 죽었는데, 밤이 깊어지면 안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담이 큰 하인들조차 웬만해서는 그 근처를 지나다니려고 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들어가서 어슬렁거리는 짓은 더욱 상상도 짓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건물이 담벼락을 끼고 있어서 내벽을 따라 순찰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밖에서 들어온 친척들은 그런 소문에 대해 몰라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그 소문을 알고 있는 몇몇 시녀들은 들어가길 꺼려 했다. 육유의 처가 임근용을 한쪽으로 불러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소부인, 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마세요.”
임근용은 일전에 그 소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귀신을 믿지 않는다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임근용은 이미 한 번 생과 사를 거쳐 다시 혼백이 돌아온 사람이라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한가롭게 훈롱 옆에 앉아 향을 피우며 차나 마시는 여자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집안의 딸이면서 며느리였으며 또 이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곁에 없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임근용이 굳은 얼굴로 냉랭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 남자들은 지금 밖에서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데, 내가 그까짓 걸 두려워할 것 같아?”
그녀는 육유의 처가 들고 있던 횃불을 확 빼앗았다. 그런 다음 어깨와 등을 곧게 펴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으며 크게 소리쳤다.
“들어갈 사람은 날 따라와! 무슨 귀신이 있거들랑 다 나한테 와서 붙어라! 들어오기 싫은 사람은 안 들어와도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쌍전이 제일 먼저 나서 그녀의 뒤를 따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부인, 밖에 있는 비적들보다 더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노비는 부인께서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드신대도 따라갈 거예요.”
육유의 처도 잠시 멍해졌다가 이를 악물더니 성큼성큼 그녀들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이소부인께서도 이렇게 무서워하시지 않는데 저희가 이소부인보다 더 겁을 내서 되겠어요? 제 남편과 아이들도 저 담벼락 위에서 지키고 있는데요!”
임근용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야지만 살길이 열리고, 더 잘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사람이 많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녀들은 구석구석 뒤지며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돌렸다. 사람들이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정원 어디에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
육유의 처가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서더니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임근용도 나무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긴 했지만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사람들에게 대문을 막으라고 눈짓한 뒤 엄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에 누구냐?”
이에 소리가 멈추고 고요해졌다. 모두들 무기와 횃불을 꽉 움켜쥔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귀에 다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근용이 앞으로 한 발짝 나가며 상대를 떠보았다.
“다 봤으니까 빨리 나와, 순순히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빨리 가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라 눈짓했다.
육함은 잡동사니 더미 속에서 힘겹게 기어 나오다가 자기 아내가 허세를 부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매서운 표정으로 협박을 하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참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요!”
밖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임근용의 미심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이름을 대!”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아까의 그런 기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름은 육함이고 자는 민행이오, 집안에서 둘째이고, 의랑이라는 아들이 있소.”
육함은 밖에 임근용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재회하게 된 것도 기쁘고 그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임근용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