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62
62화. 물 가까이 (3)
대전의 뒤쪽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청석 같은 돌도 깔지 않고 그냥 흙만 단단히 다져놓았을 뿐이라 표면은 시든 들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참새 몇 마리가 풀숲에서 햇볕을 쬐고 요리조리 뛰어다니면서 풀씨를 찾아 먹고 있었다. 역시 허름하고 황량한 풍경이었다.
묘아가 임근용을 거기에 세워놓고 곡식 낱알을 꺼내 손에 쥐여 주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저 늙은 비구니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이렇게 풀도 제대로 안 뽑는다니까요. 앞이 깨끗하다고 뒤까지 깨끗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뒤는 이렇게 더럽고 망가져 있잖아요. 여기보다 더 뒤는 말도 못 해요. 대들보에 쌓인 먼지가 두 자 두께는 돼서, 쥐가 한 번 뛰면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라니까요. 두 비구니가 돈을 벌려고 온천탕이 있는 편전만 그나마 깨끗하게 치워둔 거예요.”
임근용이 낱알들을 아무렇게나 참새들에게 던지자, 참새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이 온천에는 사람들이 자주 와?”
묘아가 말했다.
“자주는 아닐걸요? 늙은 비구니들이 시주를 받는 건 창 대부인이나 저 선생 가문의 여자 식구들이 왔을 때 아니면 나랑 우리 엄마가 가끔씩 올 때 정도예요. 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무슨 큰일이 있는 게 아니면 혼인 같은 경사를 치렀을 때나 시주를 해요.”
놀라서 날아올랐던 참새들이 담 위에 내려앉아 잠시 지켜보다가 이 소녀들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보고 다시 날아와 즐겁게 그 낱알들을 찾아 먹었다.
임근용은 한동안 멍해졌다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묘아야, 너도 도화어 잡아본 적 있어?”
도화어를 잡는 이야기가 나오자 묘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럼요, 우리 아버지랑 오라버니들이 한가할 때 날 데리고 자주 갔었어요. 나 혼자 몰래 간 적도 있고요.”
“그럼…… 넌 물에 빠지는 게 무섭지 않아? 물은 안 깊어? 차갑지는 않고?”
임근용은 초점 없는 눈으로 낱알을 또 참새들의 몸을 향해 던졌다. 불쌍한 참새들이 몇 입 못 먹고 깜짝 놀라 다시 날아올랐다.
“아가씨, 그렇게 던지면 낭비잖아요.”
묘아는 임근용의 손에서 남은 낱알을 뺏어 가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청량강은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는데 아무래도 깊은 곳으로 가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어요. 물은 대부분 여기 온천에서 흘러나오는 거라 차갑지는 않아요. 그리고…….”
묘아는 발끝을 세워 임근용의 귓가로 가까이 오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난 수영할 줄 알아요. 오라버니가 가르쳐줬어요. 그래서 무섭지는 않아요. 우리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안 그럼 엄마한테 맞을지도 몰라요.”
임근용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마치 금이나 은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묘아를 바라보았다.
묘아가 어리숙하게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임근용은 흘러넘칠 듯한 기쁨을 억누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생에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번 생에서 또다시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없었다. 예전에 강가에서 자란 시골 출신 시녀들이 수영을 할 줄 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 딱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해 묘아에게 그런 사람을 하나 찾아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하늘이 이렇게 그녀를 도와줄 줄이야…….
임근용은 두 손을 가슴에 쥔 채 마음속으로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한층 더 친절한 눈빛으로 묘아를 바라보았다.
“묘아야, 너 내 밑에서 일할래? 뭐 특별한 일을 시키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나랑 같이 놀아 주면 돼.”
묘아가 놀라며 말했다.
“아가씨, 정말이세요?”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이고 말고.”
뒤에서 듣고 있던 계원은 서운한 마음에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묘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계원이 입고 있는 새 치마를 가리키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를 모시면 나도 이런 예쁜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거예요?”
임근용은 계원이 섭섭해하면서도 차마 화를 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보다 더 좋을걸. 너한테 내 치마 하나 줄게. 어때?”
묘아는 쾌활하게 땅을 짚고 공중제비를 돌더니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빙빙 돌았다.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러더니 바람처럼 휙 하고 사라졌다.
임근용은 여태껏 이렇게 개구진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또 배우를 제외하고 이렇게 잽싸게 공중제비를 돌 줄 아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인생을 이렇게 즐겁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계원이 손수건을 배배 꼬며 말했다.
“아가씨, 저, 저 아이는 그냥 버릇없는 애잖아요! 정말로 저 아이를 곁에 두시려고요? 아마 반나절도 안 돼서 사고를 칠 거예요.”
임근용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아 같은 아이는 그저 잠시 놀이 상대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말로 자신과 함께 임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가면 아마 저 아이는 숨이 막혀 죽게 되지 않을까? 역시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저 아이는 작은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야하는 총명하고 쾌활한 사람이지, 뒷방에서 법도에 얽매여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말 한 마디를 꺼낼 때조차 한참을 고민해야 하는 삶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 * *
아마도 그 온천수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임 삼노야는 반나절이나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집에 돌아온 후 그날 밤 또 열이 올랐다. 다행히 수의원이 솜씨를 발휘해 약을 처방해 주었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열은 바로 내렸다. 다만 두통이 조금 남아 있어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을 뿐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복용하는 약이 갈수록 진해지자 귀신 같은 소리를 내며 싫어했다.
도순흠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청량사에 돈과 곡식을 시주해 부처상을 새로 만들고 비구니들에게 나중에 도씨와 임근용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그 온천탕과 바깥쪽의 문과 창문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 임 삼노야의 몸이 마침내 완전히 회복되었다. 도순흠은 도씨에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병을 잘 치료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임근용이 조심스럽게 도순흠을 떠보았지만, 도순흠은 임 삼노야를 평주에 바래다 주고 다시 청주로 돌아간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근용은 사흘이 멀다 하고 청량사에 가서 향을 피우고 도씨의 복을 빌었다. 물론 갈 때마다 그녀는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묘아로부터 수영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녀가 전부터 숨을 참는 연습을 해오긴 했지만 수영은 그다지 빨리 배우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지도 않았다. 온천에서 나올 때면 그녀의 얼굴은 늘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묘아라는 영특하면서도 요상한 계집애와 함께 어울리다 보니 그녀의 성격 또한 많이 밝아지고 몸도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두 늙은 비구니는 이미 많은 돈을 챙긴 터라 그녀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녀들이 얼마나 오래 놀든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세심하고 신중하게 후전을 지키며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이 일이 도씨의 귀에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씨는 임근용이 온천에서 목욕하는 걸 좋아하는 줄 알 뿐 거기서 몰래 수영을 배우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느 날 정신을 가다듬고 임근용과 함께 청량사로 갔다. 그녀는 향을 피운 뒤 향불값을 조금 시주하고 두 비구니와 앉아서 한참을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 뒤 임근용과 함께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도씨는 돌아와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또 재삼 고민하더니 공 마마에게 지시했다.
“우리 딸이 날따라 이 시골에 내려와서 매일 내 탕약 시중이나 들고 있으니 얼마나 무료하고 답답하겠느냐. 가끔씩 천진난만해 보이는 것도 날 기쁘게 해 주려고 일부러 꾸민 것이었지. 다른 집 같았으면 이렇게 얌전하고 다정한 딸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예뻐했겠느냐. 근용이와 근음이가 하필이면 나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나 이리 억울함을 당하는구나. 아이가 모처럼 좋아하는 게 생겼고 크게 나쁜 것도 없어 보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어라. 철 마마에 말해서 그 아이 시중을 들 유능한 하인 몇 명을 더 데려오라고 해. 내 시중을 드는 것처럼 털끝 하나도 모자람 없이 시중들라고 하거라.”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임씨 가문은 이 마을의 대지주였다. 도씨가 이렇게 명령을 내리자 그 온천은 고정된 날짜에 임근용 혼자서 쓰는 것처럼 인식되어 더 이상 누구도 청량사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사실 도씨가 자신에게 이런 자유를 줄 거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도씨와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 어렵게 얻은 자유를 잃게 될까 두려웠다. 그녀는 매번 청량사에 갈 때마다 성실하게 경서를 베끼고 향을 피운 뒤 규칙적으로 온천탕에서 수영을 몇 바퀴 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도씨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책을 읽지 않으면 자질구레하지만 힘이 많이 드는 집안일 같은 것들을 했다. 그리고 또 스스로 장부를 만들어 매일의 지출을 기록해 두었는데 옆에서 보고 있는 여지에게도 가르치며 가끔씩은 여지에게 기록하는 걸 시키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산뜻하고 유쾌하면서도 비할 바 없이 충실한 나날들이었다. 임근용은 전생과 현생을 전부 합쳐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웃음은 갈수록 찬란해지고 발걸음은 가벼워졌으며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시간이 한참 흐르자 그녀는 자연스레 두 늙은 비구니와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고 그들에게 종종 농사를 짓는 법에 대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그녀가 밭일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흥미 있어 하는 걸 의아해 했지만 모두들 그녀를 좋아해 어떤 질문이든 무시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임근용은 어느 절기에 파종을 해야 묘당 생산량이 올라가는지 등등을 하나하나 다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행운이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오지 않고, 기회는 준비된 자만 잡을 수 있는 법이다. 만일 그녀가 냉철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녀는 자신의 두 손과 능력으로 자신을 위한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번 생에도 자신이 그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게 될지 두고 볼 것이다! 또 누가 거짓된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과 생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힘이 없을 때는 손 놓고 운명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 일어나기 위한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는 깊은 규방에 숨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세상 물정도 모르고 공허한 풍월이나 읊어대는 삶을 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순종적으로 모든 것을 당연시하면서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임근용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고 온천수에 머리를 푹 담갔다. 그녀는 묘아의 격려 속에서 마치 서툰 물고기처럼 물을 힘껏 박차고 팔을 저으며 온천의 이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헤엄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