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68
68화. 봄빛 (1)
다음날 임근용은 열심히 도씨를 설득했다.
“벌써 여기까지 왔는데 몇 걸음 더 떼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오라버니는 글자를 읽을 줄 알고 고생도 알고 인정과 패기도 있으니 뽑아서 쓸 만한 사람이에요. 앞으로 신지한테 유용한 보조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 집 쪽에는 어머니와 류아가 정이 많이 들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가 어미를 잃었으니 어머니 같은 어른이 보살펴 주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셋째 오라버니는 우리 쪽에서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집에서 반대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리하여 임세전은 이날 이후 이 시골 장원의 일원이 되었다.
임씨 가문의 원래 저택으로 돌아가자 이 일로 인해 임씨 집안이 또 떠들썩해졌다. 어떤 사람은 도씨가 명성을 얻고자 하는 불량한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한 거라고 말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임역지를 충동질하며 도씨가 임역지를 자기 아들로 생각하지 않아 임신지에게 보조를 붙여 그를 막고 그에게 대항하게 하려는 거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임신지를 부추기며 도씨가 그 아이들을 거둔 건 임신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임 삼노야를 찾아가 이렇게 큰일을 남편인 그와 상의하지 않은 건 도씨가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라면서 그녀의 혼수도 아무 상관없는 남에게 빼앗길 것이라 충동질 했다. 임 삼노야는 즉시 장원으로 가 그 아이들을 죽이고 부군으로서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임근음의 간곡한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
이 일은 임신지를 통해 임 노태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 노태야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마디 했다.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는 건 좋은 일이란다. 우리 가문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임씨 집안사람으로서 어찌 같은 가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오명을 뒤집어쓰게 한단 말이냐? 일곱째야, 너도 장차 크고 나면 일가친척들을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 명성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집안만 얻을 수 있는 거란다.”
이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누구도 더는 감히 도씨가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 * *
설을 지내기 위해 섣달 20일에야 임근용을 데리고 임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갔던 도씨는 설을 보내고 초닷새가 되자 임근용을 데리고 다시 시골로 돌아가 계속 요양을 했다. 임신지가 또 전처럼 울어서 콧물이 입까지 내려왔지만 도씨도 독한 마음을 품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 있을 때 밤마다 임신지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장녀가 전보다 훨씬 더 듬직해지고 임신지 또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솜씨가 많이 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녀는 얼른 이 병을 뿌리 뽑아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임근용은 임근음과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임신지를 골리며 노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녀는 세배를 하러 온 임옥진 등의 사람들과 만나지 않아 당연히 육함과 육운이 전부 고훈을 부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봄날에 갑자기 천둥이 치더니 싱그러운 기운을 머금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들판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깨어나 논과 밭, 정원과 화원을 부드럽고 연한 녹색으로 물들인 것 같았다. 새하얀 앵두꽃, 하얀 배꽃, 붉은 살구꽃, 아리따운 복숭아꽃이 저마다 아름다움과 상큼함을 뽐내며 나뭇가지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정말 봄빛이 가득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이 맑아지고 미풍이 솔솔 불었다. 밭에서 바쁘게 일하던 농부들도 나른해져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들은 조롱박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가족들이 보내 준 밥을 먹으며 즐겁게 농사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은 말이 나온 것은 어머니가 죽은 후에 갑자기 도씨 저택으로 들어가 일을 돕게 된 임세전과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딸 류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임창 대인 댁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임창 대인의 잔인함과 임 대공자와 그 가족들의 고약한 심보에 탄식했다. 누군가는 임세전과 어린 소저를 동정하며 도씨와 임근용의 착한 마음을 칭찬했다. 다른 누군가는 임세전이 임씨 가문이라는 큰 나무에 의탁하게 된 것을 부러워했다. 또 임세전 같은 공자님이 과연 남의 집 집사 노릇을 하는 고생을 참아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든지 간에 임세전은 수수하게 차려입고 밭두렁 옆 나무 그늘 밑을 지키고 서서 자기 소임을 다 하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 곁을 지나가는 소작인들에게 고생한다고 인사를 하면서도 밭농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점검했다.
그는 때때로 눈을 들어 저 멀리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있는 작은 절을 바라보았다. 그 절에서 착한 마음을 가진 자신의 먼 친척 여동생이 지금쯤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을 하며 어머니를 위해 복을 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착한 사람들은 있었다.
* * *
이때의 청량사는 아주 깨끗했다. 임근용이 향을 피우고 온천에 몸을 담그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늙은 비구니는 절 문을 꼭 닫아걸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무명으로 만든 천 옷을 입은 임근용이 청량사의 높지 않은 뒤쪽 담 위에 엎드려 담 밖에 서 있는 묘아를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묘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격려했다.
“뛰세요, 얼른 뛰세요, 저처럼 눈 딱 감고 뛰어내리면 돼요. 겁먹을 것 없어요. 제가 아가씨를…….”
임근용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두 손으로 기와를 꽉 움켜쥔 채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 그 실처럼 가는 팔로 어떻게…….”
묘아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착한 아가씨, 내 팔이 실처럼 가늘어도, 아가씨가 넘어졌을 때 잡아당겨 줄 수는 있어요. 안 갈 거면 그만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요.”
임근용은 발바닥에 쥐가 나 발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손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등줄기는 으슬으슬했다. 그녀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무서워서 몸을 돌릴 수가 없어.”
묘아는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그럼 아까 제가 했던 것처럼 앞으로 뛰세요. 빨리요,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안 그럼 앞으로 다시는 못 나와요.”
임근용은 이를 악물고 조심스럽게 자세를 가다듬은 뒤 눈을 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두 발이 땅에 떨어질 때 다리가 약간 저릴 정도로 흔들린 것 외에 다른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니! 그런데 넘어지지도 않았어! 임근용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들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묘아야, 방금 느낌이 정말 이상했어. 꼭 날아오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심장은 또 엄청 빠르게 뛰어서 거의 튀어나올 것 같았어.”
“그래요, 정말 잘하셨어요.”
묘아는 이미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빨리요, 우리 둘째 오라버니가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오라버니가 어제 한밤중까지 그물을 수선했어요. 이따가 강에 내려가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제 말을 들으셔야 해요. 이 길로 쭉 가면 나무로 만든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나무가 좀 썩었어요. 지난번에 저도 떨어질 뻔했으니 오른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알았어.”
임근용이 활짝 웃으며 묘아처럼 아무렇게나 발을 내디디고 등 뒤의 청량산을 향해 달려갔다. 따스한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거리낌 없는 자유의 맛이 느껴졌다.
이 도약 이후로 그녀는 지금까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수많은 도리들을 던져 버렸다.
규칙을 따르던 예전의 임근용은 조용히 죽었다.
* * *
두 사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안 될 정도의 시간을 걸었다. 길가의 나무 아래에서 아직 덜 자란 소년 하나가 일어나 이쪽으로 오더니 임근용을 훑어보며 말했다.
“왜 이제 와? 안 오는 줄 알았잖아.”
그는 바로 묘아의 둘째 오라버니 철이우(铁二牛)였다.
묘아가 말했다.
“아가씨가 담을 못 넘어서. 둘째 오라버니 이따가 사다리 좀 찾아줘.”
철이우가 ‘오’ 하더니 땅바닥에 있던 장작 패는 칼과 어롱(*鱼篓: 물고기를 잡아서 넣어두는 작은 바구니)을 집어 들고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묘아가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 내가 분명히 말했어. 오늘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안 그러면 내가 아버지한테 오라버니가 노루 고기랑 은목탄 훔쳐서 눈밭에 가서 구워 먹은 거 하고 술 훔쳐 먹고 만취했었던 거 다 일러 버릴 거야.”
철이우가 매섭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못된 계집애야, 그만 좀 할 수 없어? 말 안 한다고 했으면 안 하는 거지, 못 믿겠으면 따라오지 마, 나도 돌아갈 거야.”
그는 화를 내고 나서 또 붉은 얼굴로 임근용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돌아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임근용은 고요한 산길을 바라보니 내심 조금 무서워져 얼른 말했다.
“사람을 쓰기로 했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러운 사람이면 쓰지 말라 했어. 묘아야, 이번에는 네가 잘못한 것 같아.”
묘아는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사과하며 말했다.
“아가씨를 봐서 화내지 마. 서둘러야 해. 시간이 아주 촉박해.”
세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산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이때 봄빛 속에서 한 수수한 평상복을 입은 한 소년이 어린 시종을 데리고 천천히 걸어 와 문이 굳게 닫힌 청량사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닫힌 절 문을 바라보다가 어린 시종을 시켜 문을 두드렸다.
* * *
대전 밖에 앉아 햇볕을 쬐며 졸던 두 늙은 비구니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고 지평이 급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소박한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스님,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여기가 청량사입니까?”
지평은 좋은 꿈을 꾸다 방해를 받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서생인 것 같은데 앞에 써 있는 글자도 못 읽는 건가? 하지만 소년의 침착한 얼굴과 우아한 태도에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녀는 아주 점잖게 인사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여기가 바로 청량사 입니다. 시주께선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소년이 또 답례했다.
“소생은 제 선생 쪽에서 왔습니다. 여기 후전에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아주 명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제가 한 번 볼 수 있을는지요?”
지평은 온천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제 선생 문하에서 비문을 보러 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숙연한 태도로 공경하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알아보지 못해 실례했습니다. 제 선생님 문하에서 오신 분이니 도리상 어떻게든 들어가서 비석을 볼 수 있게 해드려야 하나 오늘은 공교롭게도…….”
소년이 아주 의아해하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절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마치 무슨 일이 있어서 문을 닫아놓으신 것 같은데요?”
지평이 말했다.
“어떤 여시주께서 안에서 경을 읽고 염불을 하고 계시는데,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하십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시주께서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다음에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들은 존중하는 태도로 안타까운 듯 말했지만 그들을 안으로 들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