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76
76화. 빨간색 (1)
그릇과 젓가락을 놓자 음식이 배달되어 왔다. 철 마마가 만든 시골 밥과 반찬이 한 상 차려졌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노릇노릇한 도화어 튀김, 참죽잎 무침, 배꽃자루 절임, 호두꽃 절임, 기름과 소금에 절인 오리알, 새로 만든 두부, 기름 튀긴 고추와 데친 쪽파 등이 분채도화 그릇에 담겨 있었다. 음식이 신선하고 보기도 좋아서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임근용이 묘아에게 말했다.
“가서 셋째 공자랑 사촌 공자께 와서 식사하시라고 해.”
묘아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전 지금 장수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날 보면 아마 시비를 걸 거예요. 거기다 내가 한 마디만 대꾸해도 우리 어머니가 내 귀를 잡아당길 거란 말이에요.”
계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노비가 갈게요.”
계원은 즉시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아무도 없는 곳에 서서 조심스럽게 귀밑머리의 구슬꽃 장식을 매만지고 치마를 정리했다. 그리고 품에서 연지를 꺼내 손끝으로 살짝 찍어 입술에 바른 다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쪽 정원에는 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돌탁자 위에 놓여 있던 책이 펄럭이며 펼쳐졌다. 임세전은 책에 찍혀있는 작은 인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선생님 서원의 책이지? 나도 예전에 제 선생님 서원에서 2년 동안 책을 읽었어.”
“맞아요, 제 선생께서 빌려주신 거예요.”
육함은 잠시 침묵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왜 계속 공부 안 해요?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면 이름을 못 떨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만약 어려운 게 있으면…….”
임세전은 그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하하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 공부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건 아니야. 선생님께서 전에 나한테 인내심이 강한 편이라 꾸준히 열심히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공부 쪽으로 머리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하셨어. 그런데 굳이 힘들게 공부할 필요 있나? 난 지금 여동생을 잘 키워서 시집갈 때 혼수를 잘 챙겨 주고 싶은 마음뿐이야.”
육함이 칭찬하는 눈빛을 보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뭐가 있겠어요, 형님이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당연하지.”
임세전이 말머리를 돌렸다.
“네가 외지에서 왔으니 혹시 아나 해서 묻는 건데, 어전에 둑을 쌓는 일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육함이 대답했다.
“네, 작년 봄에 경동(京东)지방에서 최(崔) 제거(*提举: 송대(宋代)의 관직으로 품계는 5품에 해당함)가 농민공들을 징용해서 지형을 따라 제방을 쌓고 파수(灞水) 강의 강물을 끌어다 염지 8만 경을 어전으로 바꿔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것 덕분에 농민들의 수입이 많이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임세전은 마음이 동요해 중얼거렸다.
“우리 평주에도 염지가 적지 않아. 북쪽만 해도 몇 십 경이 있고, 서쪽은 수천 경이나 있는데, 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육함은 그가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평주는 저강에서 너무 멀어서 강물을 끌어오는 게 쉽지 않아요. 상부에서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임세전이 얼른 대답했다.
“꼭 저강의 물이 아니면 안 돼? 일반적인 하천, 아까 네가 오는 길에 봤던 그 하천 같은 걸로는 안 되는 거야?”
“그 하천은 너무 작아요. 기껏해야 끌어온 물을 배수하는 수로 역할 정도밖에 못 해요.”
육함은 임세전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다.
“왜, 누가 어전을 만든대요? 저도 오는 길에 그 하천 옆에 염지가 크게 있는 걸 봤어요.”
임세전은 임근용을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웠다. 그는 그 땅이 임근용의 것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누군가 어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이 동네에 널리고 널린 게 염지인데 다 놀고 있는 게 너무 아까워서. 상부에서 빨리 명령을 내려 농민들을 징발해다 둑을 만들었으면 좋겠네.”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그런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육함이 담담하게 웃었다.
“정말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 부임한 제거(提举)는 나이가 많고 고루해서 자기 임기가 끝나면 퇴직하고 편안하게 누리면서 살 생각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남은 임기 2, 3년 동안에는 아마 별다른 움직임은 없을 거예요. 차기 제거가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백성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할 마음이 있는지 기다려 봐야죠.”
그럼 임근용의 이 땅은 대운을 기다려야만 옥토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임세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는 육함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네가 박식하고 식견이 넓은 덕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
“무슨 과찬을 그렇게 해요. 제가 농업에 관심이 많은 사형을 한 명 알고 있거든요. 그 형님께서 나한테 하셨던 말들 중에 마침 그런 얘기가 있어서 알고 있는 걸 알려준 것뿐이에요.”
육함이 일어서서 답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근데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어요? 제가 평주로 돌아오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형님이 처음이라서요.”
임세전은 그에게 이미 많은 조언을 들은 탓에 그의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넷째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 기억났을 뿐이야.”
“오.”
육함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돌 탁자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넷째가 아는 게 정말 많네요.”
“응. 넷째가 호기심이 정말 많아. 들풀이나 산나물 이름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아.”
임세전이 가볍게 웃는데 정원 문 근처에 분홍색 그림자가 얼핏 스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곧 식사시간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시녀들이 식사를 하라고 이야기를 전하러 왔다가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방해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누구냐?”
계원이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와 허리를 구부리고 인사를 했다.
“노비 계원이 사촌 공자와 셋째 공자께 인사드립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부인께서 두 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임세전도 육함에게 말했다.
“가보자. 철 마마가 만든 집밥이 정말 별미야. 평소에는 못 먹는 거라고.”
육함이 책을 정리하러 가려던 차에 계원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사촌 공자께서는 어서 가보세요. 여기는 노비가 정리하겠습니다.”
시녀나 시동이 물건을 정리하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육함도 원래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계원의 손끝에 빨갛게 무언가 묻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선명하게 책장에 찍히자 그는 저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저리 치워! 누가 내 책에 손대랬어!”
* * *
계원은 남몰래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 사촌 공자가 정말 잘생겼네, 몸에서 나는 향기도 정말 좋구나, 이건 침향목향 인가?’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노성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넋이 나가 손을 떨며 책을 떨어뜨렸다.
손이 빠른 임세전이 책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낚아챘다. 한눈에도 책 겉 표지에 빨간색 연지가 찍혀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계원의 입술에도 같은 연지가 발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저리 가!”
웃고 있던 두 공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사람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계원은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두려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사촌 공자, 노비를 용서해 주십시오. 노비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육함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두운 얼굴로 소매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책장에 찍힌 그 빨간 연지를 닦았다.
임세전은 계원이 아직도 못 박힌 듯 거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며 임근용의 얼굴에 먹칠을 한 이 경박한 계집애를 걷어 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쪽에서 약을 달이고 있던 춘아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부채를 들고 달려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왜 그러세요?”
계원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 같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춘아 언니, 정말 제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춘아의 눈이 그녀의 입술과 육함의 손에 있는 책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이것아, 일하러 오면서 손도 안 씻고 왔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봐, 얼른 사촌 공자님께 잘못했다고 빌지 않고 뭐해? 가서 공 마마한테 말씀드리고 벌 받아야 하는 거 알지?”
계원은 즉시 무릎을 꿇고 육함에게 절하며 큰 소리로 사죄했다.
“사촌 공자, 노비를 용서해 주세요.”
육함은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계속 책만 닦았다.
춘아가 웃으며 말했다.
“공자, 조급해하지 마시고 일단 저녁식사를 하러 가세요. 노비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육함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흰 손수건을 돌 탁자 위에 던지더니 책을 춘아에게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춘아 언니, 고마워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계원은 일어나서 춘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춘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너 전에 첫째 아가씨를 모시던 포도(葡萄) 기억하니?”
계원은 잠시 멍해졌다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첫째 아가씨가 일찍 시집을 가신 데다 그때 넌 어려서 아마 기억이 잘 안 날거야. 그때 첫째 아가씨한테 가장 예쁨을 받았던 시녀가 바로 포도였어. 얼굴이 예쁘고 고운 아이였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룻밤만에 급사했어.”
춘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도 너처럼 쓸데없이 연지와 분을 바르는 걸 좋아했지. 평소에 자기가 반쯤은 아가씨인 것처럼 우쭐거리며 다녔지만 결국 죽어서 낡은 거적떼기 하나를 덮게 됐어. 계 마마가 평소에 나한테 잘해 주고 나도 아가씨의 체면이 상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서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니까 이 말을 듣든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춘아는 계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 책을 들고 가 버렸다.
계원은 멍하니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술에 발라져 있는 연지를 얼얼할 정도로 힘껏 문질러 닦고 서쪽 정원에서 마치 도둑이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녀는 차마 식사를 하고 있는 정원으로 돌아가 식사 시중을 들 수가 없어 동쪽 정원에 있는 오래된 우물가에 숨어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진흙이 묻은 치마를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촌 공자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제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