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86
86화. 변화
도씨는 마음속의 불쾌함이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고 다시 슬퍼졌다.
임근음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시집가도 다른 형제자매들이 할머니 곁에 남아 있잖아요? 몇 년 안 있으면 남동생들이 장가를 갈 테고 그럼 다시 집안이 북적북적해질 거예요. 그럼 또 할머니께서 시끄럽다고 귀찮아하실지도 모르지요.”
임근용은 이때 진심으로 임 노부인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말로 사람을 때리기도, 누르기도, 당기기도 했다. 그녀들은 모두 임 노부인에게 이런 기술을 잘 배워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임 노부인에게는 큰 단점이 있었다. 바로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을 너무 싸고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랬으면 임옥진과 라씨도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임근용은 한창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임 노부인이 주름진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넷째야, 넌 다 커 가지고 어째서 아직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구는 게냐? 별일 없으면 언니한테 자주 들러서 좀 배워라. 듣기 좋은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내가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몰라서 싫어한다는 건가? 임근용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예, 할머니,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임근용은 주의하겠다고 했지 고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천성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누적되면 처음의 기호가 변하기도 했다. 임근용은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어쩌다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지만 하소연할 상대를 찾지 못해 그냥 혼자 삼켜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이 누적돼 지금의 임근용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쓸데없이 이런 걸 고치겠다고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그녀도 때론 그럴듯한 몇 마디 말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 노부인은 자신이 이렇게 지적을 했는데도 임근용이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못마땅해했다. 그녀는 강산은 변하기 쉬워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는 말을 떠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가 보거라.”
* * *
임근음은 도씨와 상의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씨도 임근음에게 지시해야 할 것이 있어 두 자매는 저녁에 같이 자기로 약속하고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계 마마는 일을 세심하게 하는 사람이라 임근용이 안락당에 문안을 드리러 갔을 때 사람들을 시켜 우선 그녀의 침실 안의 물건부터 정리했다. 그래서 임근용은 돌아오자마자 편안하게 침상에 올라가 쉴 수 있었다.
임근용은 30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방 안은 아주 조용해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나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거지? 그녀는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러들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침상에 누워 잠에서 반쯤 깬 몽롱하고 나른한 상태를 즐겼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 앞에 있는 발 받침대에 떨어졌다. 수많은 작은 먼지들이 빛줄기 속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 빛줄기 속으로 손을 뻗어 즐겁게 날아다니는 먼지 요정들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요정들은 아주 영리하게 잘 피해 다녀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신나는 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먼지를 잡고 또 잡았다. 그녀는 먼지가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더욱 신나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더 크게 웃었다.
이때 밖에서 아주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이 아주 조용하지 않았다면 거의 들리지 않았을 정도의 소리였다. 하지만 이 소리로 인해 임근용의 좋았던 기분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옷을 갖춰 입고 휘장을 젖히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방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극히 드문 일이긴 했지만 그녀들이 막 집으로 돌아와 해야 할 일은 많고 일손은 달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낮잠을 잘 때 시녀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도 더는 생각하지 않고 복도를 따라 소리의 근원을 찾아 걸어갔다.
긴 복도 끝에는 계 마마 모녀 두 사람이 사는 곁방이 있었다.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어 임근용은 어렵지 않게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방 안에서 계 마마가 이를 악물고 계원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계 마마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원망과 비통함을 담아 아주 매섭게 손을 휘둘렀다. 계원은 아픔도 호소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계 마마가 뺨을 꼬집고 자신을 밀치는데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를 썼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만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흐느낄 때마다 계 마마는 동작을 멈추고 긴장한 눈빛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한참 동안 방 안에서 승강이를 하던 모녀가 마침내 조용해졌다. 계 마마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직도 감히?”
계원은 잠시 멈췄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흑…….” 하고 낮은 소리로 울었다.
“못하겠어요. 어머니, 난 어머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가 아가씨한테 말씀 좀 해 주세요……. 절 쫓아내지 말라고요.”
계 마마가 잠시 침묵했다 차갑게 말했다.
“이 어미는 절대 너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넌 이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어. 나도 계속 여기 있을 면목이 없고.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아가씨와 부인 곁에서 본분을 잘 지킨 덕분이었어.”
임근용은 시선을 거두고 창가 벽에 몸을 붙이고 섰다. 그녀는 고개를 든 채 미동도 없이 정원에 있는 무성한 느릅나무만 바라보았다. 오래된 느릅나무는 가지가 빼곡하고 잎이 무성해 푸르름이 방울져 떨어질 듯했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의 잎 위에 흰 나방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흰 나방의 얼굴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나방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근용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계원의 일을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그녀와 계 마마 사이의 인연이 그녀가 다 자라기도 전에 끊어져 버리게 되지 않을까? 임근용은 계 마마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녀가 언제나 계 마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남겨 두어야 했기 때문에 계원은 쌀미음을 먹고 자랐다. 임근용은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친혈육과 젖을 먹여 키운 아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 중간에 의존적인 주종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친혈육을 대체하거나 바꿀 수는 없었다.
마당 문에서 작은 소리가 나더니 여지와 두아가 손에 옷감을 한아름 안은 채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창가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임근용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임근용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들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두 모녀가 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여지와 두아가 있었고 곧이어 임근용의 뒷모습도 보였다.
계원은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갑자기 계 마마를 밀며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어서 가서 아가씨한테 부탁해 보세요!”
임근용은 연지 사건 이후 더욱 그녀를 멀리했다. 계원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임근용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몫이었던 많은 일들이 여지에게로 넘어갔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묘아에게 빼앗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녀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갔다. 계원은 임근용이 묘아를 임씨 가문 저택으로 데려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까 봐 걱정했다. 묘아는 진심으로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임근용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묘아가 임씨 가문 저택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계원은 내심 다행스러워하며 용기를 내 다시 임근용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임근용은 그녀를 꾸짖지도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임근용이 전처럼 자신에게 일을 주지 않는 걸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골 저택에서는 사람을 내쫓기도 또 보충하기도 어려웠지만 임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원은 고기 냄새를 맡으며 침이나 흘리고 있어야 하는 말단 시녀는 되고 싶지 않았다!
계 마마가 매서운 눈길로 계원을 노려보더니 빨개진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며 고민하다가 결국 책상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계원도 어떻게 할 수 없어 얼굴을 가리고 잉잉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 * *
여지는 두아에게 문 앞을 지키라 하고 혼자서 옷감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임근용은 창문 앞에 있는 평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앞에 있는 자수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임근용은 소리를 듣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여지야, 네 생각엔 이 베개에 어떤 목재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는 여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다시 말했다.
“어머니가 숨겨두신 침향목 한 토막이 있었던 것 같아. 크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야. 침향목의 향은 비장에 영향을 끼쳐서 정신을 맑게 하고 오장을 보양하고 기침을 멎게 한대. 또 가래를 없애고 위를 따뜻하게 하고 통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다고 했어. 외숙모한테는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 저녁에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분명 아낌없이 내주실 거야.”
그녀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말을 하자 여지는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침향목이면 아주 좋지요, 이것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도 대부인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여지는 바로 그 옷감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임근용에게 와서 보라고 청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잠 드시자마자 대부인을 모시는 석류(石榴)가 와서 아가씨께서 이번 봄에 봄옷을 안 만드셨으니 그것까지 합쳐서 여름옷으로 만들게 옷감을 골라달라고 하더라고요. 아가씨가 주무신다고 했더니 나중에 이 견본을 보여 드리고 고르라고 했어요. 혹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세요? 이번에는 무늬와 색깔이 다 예뻐요.”
임씨 가문 아가씨는 한 사람당 계절마다 두 벌의 새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었고 경사가 있을 때는 또 별도로 새로 지었다. 이렇게 되면 임근용은 이번에 네 벌의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여지도 보통 여자들처럼 예쁜 장신구와 옷을 좋아해서 자기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즐거워했다.
“안 그래도 키가 커서 입던 치마가 좀 작아진 참이었어.”
임근용은 자수품을 다 치우고 탁자로 다가가 옷감을 골랐다.
이번에 주씨는 표면적으로는 이긴 것 같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화를 삼켜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라씨가 갖다 바친 수천 냥의 은자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심을 쓰기로 결정했다. 집안에 있는 좀도둑을 막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또 그걸 막겠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괜히 남 좋은 일만 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차라리 그 돈을 가지고 이렇게 모두에게 인심을 쓰고 좋은 평판을 얻는 게 더 이득이었다. 그래서 올해의 옷감은 예년에 비해 한 등급 높았다. 무늬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질도 현저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