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산수
주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지난번 일은 네가 잘못한 거라는 걸 잊지 마. 넌 사람들 앞에서 넷째 언니를 난처하게 만들었어. 나중에 만나면 정중히 사과해야 돼. 그리고 근용이한테 예전처럼 잘해 주고 친하게 지내. 옷 두 벌이 뭐가 대수라고 그래? 원한다면 열 벌이라도 해 줘야지!”
임근지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주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근용이랑 계속 친한 언니 동생으로 잘 지내라는 거야. 셋째 숙모랑 신지한테도 잘하고.”
지난번 난로회에서 임근용은 철저히 임옥진의 미움을 샀고, 또 시골 장원에 있을 때 임옥진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제 임근용은 육씨 가문의 며느리 후보에서 제외되었으니 차남가를 칠 장기말로 쓰기에 딱 좋지 않은가? 도씨의 그 불 같은 성질이야 뭐, 하하…….
임근지는 한참 동안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예전처럼 잘 지내볼게요. 근용 언니만이 근주와 근옥이를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임근지는 그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괜히 임근용을 건드려 말 못 할 손해만 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국면이 순식간에 뒤집혀 임근주와 임근옥이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게 되었다.
주씨는 그제 서야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우리 딸이 많이 컸구나.”
임씨 가문의 세 아들들은 전부 임 노부인의 친자식들이었다. 한 집에서 다른 한 집과 힘을 합치면 나머지 한 집보다 비중이 커졌다. 그리고 한 집에서 다른 한 집을 친다면 둘 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나머지 한 집의 비중만 커지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산수 문제는 그녀도 풀 줄 알았다.
* * *
임근용은 외출하기 전에 침방 시녀에게 붙잡혀 치수를 쟀다. 그녀는 침방 시녀의 전에 없던 열정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옷 모양이나 자수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라 속옷의 옷고름, 단추까지 아주 꼼꼼하고 진지하게 물으며 의견을 제시했다.
여지는 임근용보다 더 놀랐다. 그리고 그녀 또한 전에 없이 열정적으로 침방 시녀를 도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임근용은 오히려 약간 흥미가 떨어졌다.
“알아서 해, 너희가 나보다 훨씬 잘 알잖아. 못 입을 옷을 만들지는 않겠지.”
한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아가씨께서 모르시는 게 있어요. 대부인께서 아가씨가 옷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저희들 월급뿐만 아니라 옷감값도 배상하게 할거라 말씀하셨어요.”
임근용은 그제야 약간 흥미가 생겼다.
“큰어머니께서 농담을 하신 거겠지.”
또 다른 시녀가 말했다.
“예, 주인분들께서 까다로운 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희 같은 사람들은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대부인께서 아가씨를 정말 신경 쓰시는 것 같아요.”
임근용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큰어머니는 늘 인자하고 세심하신 분이지.”
치수를 재는 두 시녀를 돌려보내고 여지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가씨, 대부인이 왜 저러는 걸까요? 이렇게 크게 떠벌리고 말이에요.”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어.”
대부인은 그저 자신이 어질고 덕이 있고 너그럽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뿐이었다. 임근용은 긴 복도 끝에 있는 문 닫힌 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계 마마한테 나랑 같이 저녁 연회에 가자고 해. 넌 다른 애들하고 방에 아직 정리 안 된 물건들을 좀 치워. 외숙부께서 돈을 보내실 거니까 네가 잘 지키고 계원과 두아를 포함해서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누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지?”
여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아요.”
* * *
잠시 후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계 마마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낙담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임근용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마마,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
임근용은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계 마마에게 말했다.
“나로서는 이정도밖에 해 줄 수 없어. 앞으로는 계원이가 스스로 돌봐야지. 오늘 저녁에 마마가 나랑 같이 가면 나중에 계원이가 어머니한테 가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야.”
계 마마의 눈에서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얼른 숨을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 은혜는…….”
임근용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정말 별거 아니니까. 난 마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 이렇게 슬퍼하니 마음이 아프네.”
친혈육과 젖을 먹여 키운 아이가 아무리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이 20여 년 동안 매일을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계 마마는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옷을 여며 주었으며 자신이 그녀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도 미워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힘이 없을 때는 냉담하고 득세할 때만 다정한 사람들을 이미 많이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계 마마 같은 사람을 얻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고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계 마마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웃으며 말했다.
“예, 더는 아무 말 안 할게요.”
그녀는 말 대신 그 은혜를 가슴에 새겼다.
* * *
도씨의 방에서는 황 이낭이 도씨 곁에서 차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신선하고 아름다운 치자꽃과 월계화가 든 접시를 받쳐 들고 유난히 도씨에게 알랑거리며 꽃을 골라 주었다.
“부인, 이 꽃이 제일 싱싱해요, 이건 향이 참 좋고요, 이건 정말 수려하네요. 역시 시골 생활이 건강에 좋은 것 같아요. 부인, 오늘 바르신 분하고 연지는 뭐예요?”
도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 이낭의 아첨을 유쾌하게 즐겼다. 노부인이 그녀를 찍어 누르면 그녀는 황 이낭을 눌렀다. 지금 임역지의 혼사를 주관하는 게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이런 생살권을 손에 쥐고 있을 때 실컷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비위를 맞추려 알랑거려도 내 이 기회에 반드시 이 희고 어린 꽃인 척하는 노란 늙은 꽃을 들들 볶아주마! 이 노란 늙은 꽃도 마음이 조마조마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해 주리라.
임근음은 한쪽에 구부정하게 서서 부드럽게 웃으며 산가지를 가지고 임신지에게 산수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임신지는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부드럽고 동그란 작은 얼굴에 잔뜩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보기 좋구나. 임근용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달려가서 산가지를 옮기고 있는 임신지에게 장난을 쳤다. 임신지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며 임근용은 왠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고 나서 산가지를 내려놓고 기회를 보다 한참 바쁜 공 마마에게 말을 걸었다.
“마마, 요 며칠 많이 바빴지?”
공 마마와 그녀는 시골에서 반년 넘게 같이 생활해서 예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임근용을 더 이상 철없는 아이로 보지 않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하소연했다.
“예, 역시 일손이 많이 모자라네요. 춘아는 부인의 장신구랑 책들을 정리해야하고 하엽이는 부인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밑에 있는 다른 시녀들은 빠릿빠릿 하지가 못해서 맘이 조급해 죽겠어요…….”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한 이틀 정도 사람을 한 명 빌려줄까? 마마가 써보고 데려다 쓸만한지 볼래?”
공 마마는 임근용이 농담을 하는 걸로 생각했다.
“좋지요, 아가씨가 나중에 부인께 가서 아가씨를 모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울고불고 하지만 않는다면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도씨가 임씨 가문으로 시집왔을 때 임씨 가문 아가씨들 곁에는 집사 역할을 하는 마마가 한 명 있었고 곁에서 시중드는 시녀가 네 명이었으며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임씨 가문 아가씨들은 전부 마마 한 명, 시중드는 시녀 두 명,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든 시녀 한 명 그리고 어린 시녀 한 명이 전부였다. 자기 집안일도 다 돌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듯한데 남한테 빌려 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임근용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럼 마마가 나한테 시녀 한 명을 보내 줘서 서로 교환하면 되지. 오래 데리고 쓸 수 있게 나이가 어리고 자기 본분을 잘 아는 영리한 아이로다가.”
쓸만해지자마자 시집을 보내야 하지 않도록 말이다.
공 마마가 어떤 사람이던가, 그녀는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춘아가 계 마마와 속삭이고 있는 걸 보고 목소리를 낮추고 임근용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게?”
“앞으로를 생각해보면 모녀 두 사람이 내 집에서 계속 같이 일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차라리 계원이한테 실용적인 것들을 가르치면 좀 더 쓸만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임근용의 침착한 표정에서는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마를 난처하게 하는 거야?”
“아니요, 난처하긴요. 노비가 내일 보낼 아이를 골라 볼게요. 혹시 아가씨께서 마음에 둔 아이가 있나요?”
공 마마는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 그녀는 또 다른 뜻을 담아 교활하면서도 약간의 기쁨이 담긴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넷째 아가씨는 이제 정말 철이 들어서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집사 역할을 할 마마 한 명은 안채에 두어 자기가 쓰고 다른 집사 마마는 첩실들에게 두어 적절히 관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난 마마의 안목을 믿어. 여지는 정말로 좋은 아이야. 당시에 어머니께 계 마마를 남기라고 건의했던 것도 마마라고 들었어.”
임근용의 이 말이 공 마마를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즉시 머릿속으로 후보를 추려 적당한 사람을 골랐다.
한편 저쪽에 있던 도씨는 시간이 꽤 지난 것을 보고 황 이낭을 괴롭히는 걸 그만두고 치자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더니 두 딸을 불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각각 하얀 진주 월계화를 꽂아준 뒤 만족스러워하며 임신지를 데리고 화락당으로 갔다.
“넷째 언니, 돌아왔군요. 보고 싶었어요. 우와, 언니 키가 나보다 훨씬 커졌네요. 역시 시골 생활이 건강에 좋다는 말이 진짠가 봐요? 그 시골 장원의 마마가 요리 솜씨가 엄청 나다던데, 정말이에요? 나도 언제 한 번 맛보게 해 줘요.”
임근용이 화락당의 문턱을 밟기도 전에 임근지가 꽃나비처럼 날아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꽃송이처럼 웃으며 임근용이 키가 컸네 어쩌네 하고 농담을 하며 온몸으로 다정함을 드러냈다.
임근용은 깜짝 놀랐다. 지난 설에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 잠시 금족령에서 풀려난 임근지가 식탁에서 그녀를 얼마나 죽일 듯이 노려봤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 또 이렇게 생글생글 웃는 걸까? 설마 임근지가 아직도 내가 같은 천으로 옷을 만든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뭔가 이상한데.
임근지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넷째 언니,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거예요? 내가 잘못했어요. 전부터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니가 못 믿겠다고 하면 내가 사람들 앞에서 차를 올리고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이때 쌍둥이도 저쪽에서 다가왔다. 임근주는 부채를 들어 입을 반쯤 가린 채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다섯째 언니, 좀 천천히 해요, 넷째 언니가 놀라잖아요. 넷째 언니한테는 그런 수법 안 통해요.”
임근옥이 냉소했다.
“쓸데없이 아첨하는 인간은 배신자 아니면 도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