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잘못을 따지다 (1)
임근지의 눈빛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고 이를 갈며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쌍둥이를 무시하고 가련한 눈빛으로 임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넷째 언니, 용서해 줄래요? 언니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도량도 넓은 사람이잖아요. 동생한테 잘잘못을 따지려는 건 아니죠?”
임근옥은 메스꺼워서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임근주는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조용히 임근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한쪽으로 줄을 서라는 거야? 임근용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임근지의 품에서 가볍게 손을 빼내며 방긋 웃었다.
“자매들끼리 뭘 그렇게 예의를 차려.”
그러고 나서 바로 고개를 돌려 임근주와 임근옥을 보며 말했다.
“두 동생들도 오랫동안 못 봤는데 그간 잘 지냈지?”
임근용은 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유히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숙모님들과 동생들에게 선물을 좀 가져왔어. 물건들이 좀 정리가 되면 보내 줄게. 시골에는 좋은 물건이 없으니 받고 실망하지는 말고.”
임근주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임근용의 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임근지를 힐끗 바라보고 빠른 걸음으로 임근용을 따라갔다.
“넷째 언니, 고모하고 아운이가 온대요.”
임근용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들어 임근주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작 예상했어야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 노부인이 임옥진을 대신해 해명을 한 이상 이참에 고모와 올케 사이의 감정을 풀 자리를 마련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임근주는 마치 이런 것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임근용의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고 오히려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근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 넷째 언니가 뭔가 예전이랑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그 어수룩하고 위축돼서 바보 같았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는 것 같아.”
서생은 삼 일만 안 봐도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임근주는 부채를 부치며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임근지를 힐끗 훑어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
육함이 도씨의 시골 장원에 몰래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모두들 도씨 모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은근히 질투하며 도씨가 이런 수준 낮은 방법을 쓴 걸 경멸했다. 육운에게서 임옥진이 크게 화를 냈다는 걸 들었을 때 그녀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임근용이 그보다 더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근용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임옥진이 가장 신뢰하는 방 마마를 쫓아내고 그저 육함을 동정한 것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지금의 임근용은 물러서려 하지도, 양보하려 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정말로 육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도씨처럼 미련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두 자매는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라 임근옥은 임근주의 말뜻을 바로 알아채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고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렵다 하셨잖아. 아무래도 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육함 오라버니가 왜 제 선생 댁에 안 묵고 고모를 화나게 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그 시골 장원에서 오래 머물렀을까? 이 일은 뭔가 숨겨진 내막이 더 있는 것 같아.”
임근주가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가볍게 웃었다.
“드디어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이때 주씨는 친절하고도 살뜰하게 도씨를 보살피며 임근용에게 침방의 시녀가 치수를 재러 왔었느냐고 물었다. 임근용은 정중하게 주씨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옷감이 참 마음에 들어요. 마침 제가 키가 좀 자라는 바람에 옷을 새로 만들었어야 했거든요.”
라씨는 큰 타격을 입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예전보다 많이 조용했다. 그녀는 임 노부인에게 차를 올리고 물을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때때로 임근용을 눈으로 훑으며 살필 뿐이었다.
임옥진 모녀가 들어오자 라씨가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마치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는 임옥진과 도씨 사이를 열심히 중재하며 각각 차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세상에 풀리지 않는 오해는 없다 했어요. 자, 이 차를 마시고 다 잊어버려요!”
임근용은 자기도 모르게 또 놀랐다. 임옥진과 도씨는 어느 누구에게도 승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가 와서 중재를 한다 해도 양쪽 다 비위를 맞추기 힘들어 결국 자기 발등만 찍는 꼴이 되었다. 라씨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이 기회를 빌려 또 무슨 모략을 꾸미는 거 아니야? 임근용은 곁눈질로 사람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임 노부인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주씨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임근음은 자신과 같은 의혹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임근용이 예상했던 대로 임옥진은 전과 다름없이 거만하게 굴었다. 차를 받긴 했지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씨가 원한 것이 임옥진과 도씨가 서로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림이었다면 그건 불가능했다. 임옥진은 임 노부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도씨와 임근용 모녀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저렇게 악의에 가득 차 있을 리 없었다. 임옥진은 관리가 된 남편이 있고 출중한 아들도 있었다. 도씨는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라씨가 작은 소리로 도씨에게 권했다.
“셋째 동서, 이 둘째 형님 체면 좀 세워 줘. 어머님께서도 두 사람이 묵은 감정을 털어 버리시기를 바라시잖아. 서로 잘 매듭을 지으면 아이들한테도 좋을 것 아니야. 자네가 좀 나서서 이야기를 해봐. 그럼 사람들이 자네의 도량을 칭찬하지 않겠어…….”
도씨더러 자발적으로 나서 임옥진과 화해하고 임 노부인의 환심을 사라는 뜻이었다.
도씨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정말 좋은 차라며 칭찬했지만 라씨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나한테 먼저 고개를 숙이라는 거야? 사람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내가 시어머니 환심을 살 생각이었으면 뭐 하러 중간에 널 끼워 넣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임 노부인의 안색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주씨는 살짝 냉소하고 임신지에게 먹고 싶은 게 없느냐며 친절하게 물었다. 또 자신의 맏며느리 해씨에게 눈짓을 했다. 해씨는 품에 안고 있던 포동포동한 아들을 임 노부인에게 건네주고 웃으며 증손주를 불러보라 했다. 이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이쪽의 라씨는 그 두 사람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임근용과 육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 두 바보 아가씨들아, 얼른 어머니들을 설득하지 않고 뭘 하고 있어?”
육운이 얼른 일어나서 예쁘게 웃었다. 그녀는 임옥진에게 가지 않고 오히려 도씨에게 다가가 깍듯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셋째 외숙모, 다 제 잘못이에요. 너무 노여워 마세요.”
도씨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육운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게야?”
육운은 고개를 들어 도씨를 보며 진지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셋째 외숙모, 정말 제 잘못이에요. 예전에 언니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난로회를 열었을 때…….”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더니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또 빙그레 웃었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어요. 제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우리 어머니가 넷째 언니를 오해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언니들이 화가 나는 바람에 소란이 생겼었어요……. 그때 제가 좀 더 잘했더라면 두 어른들 사이에 이렇게 깊은 오해가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보면 다 제 잘못이니 이렇게 셋째 외숙모께 화내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도씨가 아무리 임옥진을 싫어하고 또 자기 자식을 감싸려 한다 할지라도 육운이 눈물을 머금고 웃는 얼굴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도씨는 몸을 일으켜 육운을 부축해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착한 것,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도량이 넓은 아이로구나. 네가 억울한 것도 당연하지. 넷째 언니가 어리숙해서 분수를 잘 몰라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단다. 네가 좀 이해해 주렴.”
육운이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외숙모 무슨 말씀이세요. 넷째 언니는 그냥 솔직했을 뿐인걸요. 제가 언니보다 못했으면 못한 거지, 언니가 저한테 일부러 져 주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러고 나서 바로 임근용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넷째 언니, 사실 제가 속이 좀 좁아요. 어렸을 때부터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고생하며 훈련했는데 너무 쉽게 져 버려서 그때는 속상하고 괴로운 마음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때 내가 처신을 잘 했더라면 근지 언니가 벌을 받는 일은 없었을 거고 언니도 시골에 갈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일이 다 벌어진 후라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 후로 마음이 계속 불편했어요. 진작부터 언니한테 사과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언니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언니, 미안해요.”
이렇게 말을 한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몸을 깊게 숙여 공손히 절했다.
육운의 말이 아주 이치에 맞는 데다 솔직 담백하고 절절해서 일시에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누구도 당시에 그녀가 괴로워하며 화를 낸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이라면 당연한 감정이라 여겼다. 그런 창피를 당하고 괴롭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며 거짓말을 하면 도리어 위선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말하며 반성하고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이만큼 총명하고 너그러우며 전체를 볼 줄 아는 여자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재능과 품성에도 등급이 있어서 재능과 덕을 겸비한 것을 제일로 쳤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거기에 가만히 서 있는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임근용은 조용히 육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처신을 잘하는 아이야. 원래부터 성격이 맞지 않는 두 어른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녀의 잘못이든 남의 잘못이든 모두 스스로에게 돌리고 참고 양보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으니 누가 그녀를 탓한단 말인가? 한쪽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구는 자신과 그녀를 비교하면 이 일의 원흉인 자신은 정말 뻔뻔하고 전혀 뉘우칠 줄 모르며 자만심이 극에 달한 인간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임근용도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난로회 때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녀는 또 다시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것 외에 육씨 가문에서 멀어져 비참한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온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미안하거나 불만스럽거나 혐오스럽거나 걱정하거나 경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육운은 정말로 어릴 적부터 엄동설한과 삼복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연습하며 온갖 고생을 다했고, 좋은 마음으로 자기 자매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결국 자기 자매에게 짓밟혀 버렸다. 그런데 그 상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사과할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임근용마저 자신의 행동이 경멸스러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이 그녀를 멸시하고 육운을 높게 평가하는 걸 탓할 수 있을까?
문득 임근용은 모든 죄책감과 의혹이 싹 사라졌다.
육운은 임근용이 죄책감을 느끼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의리라곤 없는 임근용이 떡 하니 눈앞에 있는데 지금 육운의 행위를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임근용이 품었던 의혹도 바로 이 순간 해답을 얻었다. 해답은 아주 모호했지만 또 아주 분명하기도 했다. 평생을 바쳐도 한 사람의 마음조차 정확히 꿰뚫어 보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육운의 마음과 여러 가지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