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잘못을 따지다 (2)
막혀 있던 곳이 갑자기 시원하게 뻥 뚫린 것 같아 임근용은 후련한 기분에 육운을 향해 생긋 웃으며 깊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운아, 너 왜 이리 겸손한 거야.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는데 왜 네가 사과를 해? 정말 내가 고개를 못 들게 만드는구나. 전에 난로회에서 있었던 일은 내 잘못이야. 할머니께 혼나고 나서 스스로도 인정했어. 시골 장원으로 간 건 내가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던 거야. 우리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요양을 하셨어야 했거든. 그때 난 내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내 잘못을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건 정말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절대 자책할 필요 없어.”
마주보고 고개를 숙인 채 절을 하고 있는 두 여자아이들은 누구도 먼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여태껏 한 번도 육운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임근용은 이 순간 육운의 눈 깊은 곳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놀라움을 포착했다. 육운은 아마 임근용이 이렇게 빨리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육운은 이때 임근용의 눈 깊은 곳에서 냉담함을 보았다. 그녀는 임근용이 결코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오늘 그녀는 완벽하게 승리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세술에서 임근용이 감히 그녀와 비교나 된단 말인가? 임근용은 가난한 먼 친척을 돕는 것 따위로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이라도 했던 건가?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
라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의 팔을 부축해 주고 임 노부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이것 보세요, 동생이 언니에게 사과하고, 언니가 동생한테 사과하니 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임 노부인도 매우 만족스러운 듯 위엄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래야 내 손녀들이지! 이거야 말로 명문가 아가씨들이 갖춰야 할 품성인 게야!”
그녀는 바로 임근지, 임근주, 임근옥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희도 전부 이 아이들을 보고 배우거라!”
주씨가 임근지를 힐끗 쳐다보자 임근지가 눈을 깜빡이고 곧바로 차를 한 잔 따라 앞으로 나오더니 임근용에게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다.
“넷째 언니, 방금 내가 언니한테 차를 바치고 사과한다고 했었는데, 이 차를 받아 줄래요?”
임근용이 입꼬리를 올리며 두 손으로 차를 받았다.
“다섯째야, 너랑 나는 한 가족이야. 난 처음부터 널 탓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차가 왜 필요하겠어? 아니면 내가 이 차를 빌려서 고모님께 올리고 사죄를 드리는 건 어떨까?”
임근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 차를 높이 받쳐 들고 임옥진을 향해 걸어갔다.
“고모, 모두 제 잘못이에요. 조카의 잘못을 따지지 마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육운이 했던 장황하고 입에 발린 좋은 말들을 할 수 없었다. 설령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고개를 숙여야만 도씨와 그녀가 임 노부인 앞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옥진은 임근용의 이런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났다.
이걸 임근용의 진심이라고 하기에는 이 차는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었으며 사과의 말이란 것이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화제를 자연스럽게 전환하긴 했지만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임근용은 그다지 정중해 보이지도 않았고 어떤 해명이나 애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별로 용서를 바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꾸짖기에는 임근용의 자태와 표정, 말투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임근용은 마치 이미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받아들이든 말든 화를 내든 말든 모두 네 손에 달린 일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상 임옥진은 이 차를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이 차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임근용이 손목이 다 시큰거릴 때까지 차를 들고 받아달라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도씨가 육운을 칭찬하고 위로해 주었는데 자신이 어찌 도씨보다 못하게 굴겠는가? 그녀는 이 차를 받아야만 했다. 모양새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육함이 시골 장원에 머물렀던 일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모든 불쾌함이 마치 그 난로회에서 비롯되어 그 난로회에서 끝난 것 같았다.
라씨는 마침내 임 노부인이 칭찬하는 듯이 자기를 보고 웃자 내심 기뻐했다. 주씨는 보고 싶었던 광경이 펼쳐지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씨의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오늘 이 자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던 셈이었다. 젊은 아가씨들은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오직 임 노부인만이 기뻐하고 있었다.
동양주(东阳酒)는 매운맛과 단맛이 적고 황금색 빛을 띠었다. 술에서 깨끗한 향이 나고 맛이 독특해서 정말로 맛있었다. 임근용은 이미 연거푸 서너 잔을 마셨는데도 더 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더 달라고 하려다가 임근음의 반대하는 눈빛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언제쯤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을지 생각했다. 시골 장원에 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잘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을 대신해 아파 줄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을 대신해 괴로워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설령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작별인사를 나눌 때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래 보였다. 육운은 아쉬워하며 임근주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임근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임근용 앞에 와서 웃으며 말했다.
“넷째 언니, 우리 오라버니가 청량산에 핀 복숭아꽃과 배꽃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더라고요. 청량사에 있는 비석도 볼 가치가 있고 청량강에 있는 도화어도 정말 맛있다고 했어요. 청량사에 온천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임근용이 담담하게 웃었다.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라 특별하진 않아. 그런데 눈 오는 겨울날에 온천에 몸을 담그는 건 정말 좋아.”
육운이 그녀의 말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려하자 임옥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운아, 이제 그만 가자.”
“알았어요.”
육운은 애교스럽게 임근용을 향해 혀를 살짝 내밀고 손을 뻗어 그녀의 귀밑머리에 꽂혀있는 월계화를 한 송이 뽑더니 웃으며 말했다.
“넷째 언니, 이 꽃 정말 예쁘네요. 한 송이만 나눠 줘요.”
그러더니 꽃을 들고 임옥진을 향해 달려갔다.
임근용은 안락거의 문 앞에 걸려있는 등롱 밑에 서서 조용히 육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임근주가 다가와 살짝 그녀의 곁에 붙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운이 정말 괜찮은 아이죠? 역시 어릴 때부터 고모를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아이예요.”
“그러네, 아운이 앞에서는 나도 부끄러울 지경이야.”
임근용은 머리에 남은 월계화 한 송이를 뽑아 손으로 비벼 바닥에 버렸다.
임근주는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임근용의 행동을 관찰하며 미소 지었다.
“넷째 언니, 정말 감탄했어요. 방 마마한테 그렇게까지 말을 하다니요.”
임근용이 고개를 돌리고 임근주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네가 나였으면 아마 너도 그랬을 거야.”
불빛 아래에 서 있는 임근용의 얼굴은 앳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이 웃음은 아주 어여뻤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픈 기색도 담고 있었다. 임근주는 이런 느낌을 뭐라 형용할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정말 보기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그녀가 임근용에게 말했다.
“그 시골 장원이 정말 그렇게 좋아요? 육함 오라버니도 너무 좋아서 집에 돌아가는 걸 잊을 정도였잖아요.”
임근주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근용은 임근음의 손을 잡고 이미 저 멀리 가고 있었다.
* * *
밤바람이 불어오자 느릅나무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나뭇가지와 잎을 흔들며 바스락거리는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하늘에 높이 걸린 보름달의 달빛이 비스듬하게 비쳐 집 안팎에 마치 은빛 서리가 내린 것 같았다.
임근용은 창문 앞 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임근음과의 대화를 마쳤다.
“그래서 내가 황 이낭 대신 돈을 좀 벌어 줬어. 나도 한몫 벌었고. 언니 돈은 내일 돌려줄게.”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달빛에 비친 임근용의 표정이 유독 온화해 보여 임근음은 오히려 동생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임근용은 일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분명하게 말했고 황 이낭이 남긴 그 증서도 보여주었다. 임근음은 도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 이낭이 임역지의 혼사를 위해 돈을 내놓는 것을 반대할 이유도 없거니와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장녀인 그녀는 그래도 나이가 있는지라 집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직접 나서서 일을 하기는 힘들었다. 이게 바로 딸로서의 고충이었다. 딸들은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친정의 재산을 탐낸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임근용은 이렇게 일을 계획하고 또 성공시켰다. 임근음은 이러한 임근용의 변화가 정말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임근용은 임근음의 의심하는 눈초리에도 아주 태연했다. 지금의 임근용은 전과 너무 달라서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근음이 놀라거나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 후, 임근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돈은 내가 너한테 빌려 준 거야. 난 원금만 있으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어쨌든 넌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야 해. 만약 어머니께서 네가 황 이낭을 돕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난리가 날 거야.”
임근용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언니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은 거지. 황 이낭은 아마 돈이 많을 거야.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또 이낭을 끼워 줄 생각이야…….”
황 이낭이 전에 내놓았던 정도의 은전은 소꿉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벌어 봤자 얼마나 벌었겠는가? 임근용이 도씨를 속이고 황 이낭의 돈을 굴려 이득을 얻으려면 임근음의 도움이 필요했다. 물론 다음 단계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임근음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임근음은 그저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만 하면 됐다.
임근음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해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일단 어머니한테는 숨기고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하자. 그때가서는 어머니께서 아무리 화가 나셔도 황 이낭의 돈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머니의 혼수를 꺼내 보탤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근음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그때가서 황 이낭이 갑자기 큰돈을 내놓으면 도씨와 임 삼노야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까? 그럼 또 남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