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99
99화. 불꽃
“네 고모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도씨가 무의식적으로 한 감탄 한 마디가 임근용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는 이로 인해 몸이 경직되어 심지어 잠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도씨는 전생에서도 육함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감탄했었다. 다만 말투와 표정이 그때만큼 초라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운명은 바뀌고 있었다. 그럼 내 운명은? 임근용은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바로 올겨울, 임근음의 혼인 피로연 자리에서 임옥진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육함과 임근용의 혼인을 제안했다. 당시 도씨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임근음의 혼례가 끝난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미뤘다. 하지만 그 후 임근음이라는 버팀목이 없어진 도씨의 형편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수시로 병이 나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첩 비홍은 걸핏하면 사람을 못살게 굴었고 임 삼노야도 그녀를 괴롭혔다. 장남가와 차남가 또한 도씨를 몹시 압박해 이듬해 봄 도씨는 결국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임근용은 전에 없던 긴장감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임옥진이 서둘러 육함의 혼사를 정하지 않는 것이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떤 방법을 써야 그의 혼사를 신속하게 성사시켜 스스로 안심하게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이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녀는 임옥진 모녀와 육함이 자신을 혐오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임근주를 돋보이게 해 현재 임옥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도씨의 몸과 마음은 건강했고 임신지 역시 활발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어서 임 노태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임 삼노야는 소란을 피우지 못했고 황 이낭 모자 역시 그런대로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 같았고 전생과도 어느 정도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두려웠다.
혹시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임근용이 비녀를 뽑아 조심히 심지를 골랐다. 기름등에 심지를 몇 개 넣으니 불꽃이 더 크고 밝아졌다. 그녀가 비녀로 심지에 붙어 있던 시커먼 가루를 깨끗이 털어내자 갑자기 노란색 불꽃이 커졌고 옅은 푸른색 불꽃도 빠르게 번졌다. 임근용은 그 불꽃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순간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왜 이 방법을 잊고 있었지? 작년에 매화를 보러 갔을 때 생각을 안 해 보았던 건 아니지만 곧이어 바로 시골 저택으로 간 데다 염지를 사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 오랫동안 이 사람을 보지 못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 시기가 딱 좋은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임근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돌려 도씨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오씨 가문에 직접 가서 선물을 드릴 건가요?”
도씨는 임근음과 함께 적당히 선물로 보낼 만한 것이 있는지 옥패 같은 물건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외숙모 친정인데 안 갈 수는 없지 않겠어?”
임근용이 다가가서 옥패 하나를 꺼냈다.
“이거 괜찮네요.”
도씨는 타원형에 오리 한 마리가 조각된 백옥패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안에 담긴 뜻이 좋구나.”
임근음은 반대했다.
“일등은 한 명뿐이잖아요. 제일 좋은 물건을 오씨 가문에 보내면 오씨 가문에서야 좋아하겠지만 육씨 가문 쪽에는 뭘 보내시려고요? 이등 선물을 보내실 거예요? 두 가문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뭘 보내도 뒷말이 나올 수 있으니 안 보내는 게 차라리 나아요. 이건 뒀다가 우리 신지한테 줘요.”
도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뒀다 신지한테 주자.”
임근용도 선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잡히는 대로 명주끈을 손으로 잡아 매듭을 지으며 지나가는 말로 도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오씨 가문에서도 외숙모 생일을 축하하러 청주에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요?”
올해는 오씨의 마흔 살 정생일(*整生日: 40, 50 같은 끝수가 없는 나이의 생일)이었다. 도씨가 확신하며 말했다.
“당연히 보내겠지.”
“그럼 같이 가면 좋지 않겠어요?”
명주끈은 임근용의 숙련되고 정교한 손놀림을 따라 금세 매화 모양의 매듭으로 변했다.
도씨가 말했다.
“아직 잘은 모르겠다만 한 번 물어보마. 안 그래도 그 집에 신세진 게 많은데 갚을 기회가 없었어.”
오씨네는 청주에 자주 가는 편이었는데 갈 때마다 늘 와서 청주에 보낼 것이 있느냐고 묻곤 했다. 물건이나 편지는 큰 부담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녀를 파견하는 건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돌보아 주었으며 돌아올 때도 종종 도씨 가문을 대신해 그녀에게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도씨는 정말로 그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오상의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큰 시험을 치르고 난 후니 사방으로 놀러 다니려 할 것이 분명했다. 오상도 함께 가려나? 그가 아니더라도 양씨가 가게 된다면 더 좋았다. 그런데 만약 둘 다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면 어떡하지? 임근용은 마음이 약간 어수선하고 조급해졌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녀의 권한 밖이었다. 임근용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속 매듭을 지었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임근용이 아침 문안을 드리러 화락당으로 가니 안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임 노부인은 평소처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표정으로 침상에 앉아 있었다. 주씨는 담담해 보였고 라씨는 뭔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도씨는 있는 듯 없는 듯 한쪽에 서 있었고 임근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으며 임근옥과 임근주는 그 옆에서 자기들끼리 속닥대고 있었다. 사촌 오라버니의 새언니들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고 임 삼공자와 임 사공자는 구석에 움츠린 채 마치 부모상이라도 당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근용이 임근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임근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댁에 축하하러 가는 일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야.”
육씨 가문이 정식으로 손님들을 초대하는 건 이틀 후였다. 하지만 임옥진은 사람을 보내 그날은 사람이 많이 올 예정이라 일도 많아서 가족들끼리 이야기 나누기 불편하다며 좋은 요리를 준비해 둘 테니 친정 식구들은 오늘 와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이건 임옥진이 친정 사람들이 난처할 것을 생각해 배려한 것이었다. 임씨 가문의 두 아들은 육함에 훨씬 못 미치는 터라 축하연 자리에서 임씨 가문 사람들이 다른 손님들을 만나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임씨 가문에서 축하하러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절충하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오늘 미리 가서 축하했으니 정식 축하연에는 가든 안 가든 상관없었다.
임옥진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주씨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임 삼공자가 두 번이나 시험을 치르고도 꼴찌를 한 데다 또 누군가와 비교까지 되어 정말로 창피했다. 반면에 라씨는 임 사공자가 합격하지 못했는데도 전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왠지 흥분한 듯한 모습으로, 심지어 임 노부인보다 더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임근용은 내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임근음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넷째 오라버니가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는 왜 하나도 화가 난 것 같지가 않지?”
전생에서도 임옥진은 이렇게 했었다. 임근용은 당시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는 것은 그때 육씨 가문에 갔을 때 육함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함은 일이 있어 태명부에 남았다고 전해 들었었다.
임근음이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오리한테 하늘을 날라고 할 수 있겠니?”
임근용은 너무 웃겨서 참을 수 없었다. 오리가 하늘을 날면 뜻밖의 경사겠지만 날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차남가는 정말로 생각이 트인 사람들이었다. 라씨가 기뻐하는 건 육함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육함을 이미 자신의 사위로 취급하기 때문이었다. 장모가 사위의 출세를 기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이로 인해 임근용의 위기의식이 조금 더 낮아졌다.
임근주는 옆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임근용을 보고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넷째 언니,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이렇게 즐거워 보여요?”
임근용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외출한다고 하니 기뻐서 그래.”
임근주가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임근용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요, 언니가 한동안 고모 댁에 안 갔죠.”
그동안 육운이 몇 번이나 임씨 자매와 만났지만 임근용은 매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았다. 다들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육씨 댁에 간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기뻐하는 걸까?
임근용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임근주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도 참 성격 괴팍해요. 우리랑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육운이가 매번 언니는 왜 안 오냐고 물어봐요. 맞다, 지난번에 육륜 오라버니도 언니가 왜 이렇게 안 보이느냐고 물어봤어요.”
임근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괴롭힐 사람이 없어서 심심한가 보지?”
임근주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 검은 뚱땡이는 정말 하루 종일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점점 까매지고 뚱뚱해지는데 키는 또 안 커요. 지난번에도 또 일곱째랑 한바탕 싸울 뻔했잖아요. 글쎄 연못에서 파낸 구린내 나는 진흙을 던져서 일곱째 치마를 더럽힌 거 있죠. 얘기 들어보니까 또 한바탕 두드려 맞았대요.”
비록 지금은 그의 키가 작았지만 앞으로는 건장해지고 기골이 장대해질 예정이었다. 임근용은 육륜의 장난기를 떠올리고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육륜 오라버니는 혼나도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잖아. 일곱째 동생하고는 왜 또 시비가 붙은 건데?”
임근주는 그녀가 흥미 있어 하는 것을 보고 신이 났다.
“오라버니가 나무 위에서 새총으로 우리를 맞혔어요. 육륜 오라버니가 키가 작잖아요? 그래서 일곱째가 작고 시꺼먼 뚱땡이라고 놀렸는데…….”
임근지가 옆에서 차갑게 말했다.
“육륜 오라버니도 바로 근옥이한테 쪼그맣고 흰 뚱땡이라고 놀렸어요. 그랬더니 누군가가 되게 기분 나빠하더라고요. 오라버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쌍둥이 자매는 둘 다 키가 작았다. 임근용이나 임근지와 비교했을 때도 조금 더 작았고 몸은 포동포동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녀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녀들은 자신들의 그런 몸매를 아주 싫어했다. 임근지의 이 말은 임근주의 아픈 곳을 찌른 셈이었다. 임근주는 얼굴색이 확 변하며 임근지를 죽어라 노려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다섯째 언니, 주 사촌 오라버니가 올해 태명부에서 해시에 합격한 1등하고 2등을 만나러 서둘러 돌아오겠지요?”
임근지가 갑자기 한껏 분노한 얼굴로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올 거예요. 서생들은 전부 재능 있는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또 친척이기도 하니까요. 앞으로 동기가 될 수도 있는 사이니 틀림없이 올 거예요.”
임근주는 틀림없을 거라며 한마디를 던지고 의기양양해하더니 자리를 떴다.
임근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억울하면서도 괴로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