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18)
119화 무림공적
암전과 함께 의식이 가라앉았다.
초절정고수 정도 되면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가지기 마련.
턱을 맞아 뇌가 흔들리는 충격에 잠깐 기절했던 설진궁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초절정 정도 되니까 잠깐 기절이지, 절정고수인 문상길 정도면 턱뼈가 으스러졌을 거다.
“무, 무슨!”
“엄청 빨리 깨네.”
수호는 의식을 차린 설진궁이 반격해오기 전에 얼른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 있네.”
설진궁의 새하얀 머리만큼이나 하얀 옷의 앞섶을 헤치고 그 안에 있던 비급 하나를 꺼냈다.
“이것도 상승무공인가?”
수호가 전리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큼이나 설진궁은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노오옴!”
쩌저저정!
그의 노기와 함께 퍼져나간 기운이 바닥을 얼리고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수증기가 빙결화되어 허연 김이 서린 기분.
그 기세에 저 멀리 떨어진 문씨세가 무사들이 움찔해 뒤로 물러날 정도.
“네놈이 탐낼 물건이 아니다.”
설진궁은 엄히 꾸짖었다.
“이리 내놓아라.”
그 엄한 기세에 수호가 웃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이거 익히면 그렇게 되는 거야?”
빙하신장을 익히면 저렇게 되는 건가?
몸 안에서 빙결의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다니.
사람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아이스팩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괜찮은데?’
주변 정령을 이용해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지만 얼음은 아니다. 그것도 정령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몸 안의 에너지를 변환해 특정 기운으로 형상화하는 건 처음 본다.
내력이란 건 어쩌면 수호의 생각보다 더 매력적인 힘일지도 몰랐다.
‘무혈지체라니.’
문제는 수호의 몸에 어째서인지 단전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력 익히기를 포기하자니,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내력이 1씩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이노오옴!”
설진궁이 노기를 그대로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모든 무공은 극성으로 익혀 그 요체를 모두 익히면 비급으로 남길 수 있다.
반로환동의 고수인 설진궁 또한 아직 제자를 두지 않았으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비급을 남긴 것은 당연한 일.
그걸 뺏겨버렸으니.
슈아아악, 쩌쩌쩡!
설진궁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 공기가 얼어붙으며 빙결정이 튀었다. 그런 결정체에 내력까지 더해져 어지간한 암기보다 더 위협적으로 살을 두드리…….
“아 따거.”
수호는 얼음처럼 단단한 주먹을 쳐내면서 뒷걸음질 쳤다.
수호가 천 년이나 몸을 단련해 1000의 힘을 낸다면, 설진궁은 10을 단련해 내력으로 곱하기 100을 한다.
내공과 외공의 차이가 그것이다.
내력이 무한정한 것이 아니기에, 싸움에서 내력 안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심전력을 내는 시간은 짧고, 공격과 방어에 적절히 내력을 분배해야 한다.
설진궁이 그래서 당했다.
‘전심전력으로 간다!’
이놈은 어설프게 상대해서 될 놈이 아니다. 싸움을 길게 끌고 가면 불리한 일.
설진궁은 전력을 다해 수호를 몰아붙였다.
“와, 묵직하네.”
처음이다.
아직 수호의 레벨이 58에 불과해 온 힘을 되찾은 게 아니지만, 이렇게 큰 힘이 실린 주먹을 맞이한 게 쿠로 이외엔 처음이다.
구천 행성엔 이런 놈들이 적어도 수십은 더 있다는 말이니, 얼마나 재밌는 행성인가.
“쥐새끼 같은 놈이구나!”
설진궁이 분노를 터트리며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요리조리 피하며 손으로 탁탁 쳐내는 그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왼팔은 너덜거리고 오른팔은 금이 갔다.
설진궁은 호신강기를 덧씌워 아예 팔을 얼려버릴 수준으로 빙하신장을 펼쳤다.
팔이 멀쩡했으면 녀석은 벌써 피곤죽이 되었을 터인데…….
“신나네.”
수호도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변신을 통해 야수들의 특성과 힘을 빌리는 것. 하지만 그렇게 싱겁게 싸움을 끝내기엔,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에 흥미가 동했다.
‘무공 연습이나 해 보자.’
무혈지체라 하여 도무지 단전이 생기지 않는 몸뚱이지만,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내력1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계속 나타났다.
적어도 메시지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기에 이틀간 꾸준히 내력을 쌓은 수호다.
내력 수치가 100을 넘어가자 아주 미약하게나마 내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복부 기해혈이 아닌 몸 전체에 아주 넓게 쌓인 기운들.
내력을 느낌과 동시에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한정적인 부위지만 신체의 내구와 근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발에 힘을 줘서.’
내력을 움직여 발에 보낸다는 생각으로…….
파악!
이전 속도보다 더 빠르고 강한 발차기.
후아앙!
설진궁이 움찔 놀라 몸을 틀어 피해냈다.
‘주먹에 좀 더 힘을 실어서.’
설진궁은 지금 불타는 휴지처럼 활활 타오르는 상태. 싸움을 길게 끌고 가면 곧 사그라들 불씨건만, 수호는 가장 큰 불을 정면으로 맞이했다.
후우우웅!
설진궁의 주먹에 수호도 주먹을 내 뻗었다.
꽈아앙!
“크흡.”
호신강기가 깨져나갔다. 이미 피부가 꺼멓게 부어오른 팔은 다시 기이한 각도로 틀어졌다.
“크아아!”
참았던 고통이 두 배는 더 심하게 몰려든다.
“죽여버리겠다!”
우우우웅!
전심전력을 다한 발차기가 수호의 옆구리를 노렸다.
‘손바닥에 힘을 모아서.’
수호가 두 손을 포개듯이 쥐곤 설진궁의 발을 잡았다.
콱!
나무 밑동에 도끼가 박히듯 꽉 물린 정강이.
‘대충 어떻게 하는지 알겠네.’
본디 기해에 축적된 내기의 운용이 쉬울 리가 없다. 보법이, 권법이, 장법이 수호의 내력운용을 도와 조화를 부려야 정상이건만.
그는 자신의 오감과 민감한 기감으로 스스로 터득해 내력을 운용했다. 이는 무혈지체인 그의 신체 특성에 기반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놈!”
설진궁은 발이 잡힌 채로 반대쪽 발을 차올렸지만, 수호가 몸을 틀어 피하며 그 힘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콰앙!
“이제 관두자.”
“노오오옴!”
설진궁이 후천진기로 쌓은 내력뿐만 아니라 생명의 기운인 선천진기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장법을 펼쳤다.
그의 부러진 손이 기이한 각도 그대로 수호의 가슴을 향했다.
그야말로 모든 기운을 짜낸 동귀어진의 수.
꽈아앙!
수호가 팔을 들어 교차해 막았다.
푸시시시시.
팔뚝에 성에가 달라붙어 하얗게 변해버렸다.
“와, 식겁했네.”
마지막 기운까지 짜내 최후의 일격을 날렸던 설진궁의 눈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빠르게 꺼져갔다.
“시발…….”
허무한 마지막 유언을 남긴 그가 쓰러지자 수호는 두 팔을 털었다. 얼음 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팔뚝의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그게 기회라고 여겼는지 문씨세가 무사들이 움찔움찔 했으나, 문주산은 끝내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
슈슈슈슉!
그때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주변의 나무들이 비쩍 마르더니 초록색 기운이 일어 수호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
수호와 문주산의 시선이 마주쳤다.
“더 귀한 손님 오거든 보내봐.”
“…….”
수호가 대장간으로 돌아 걸었다.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단진철이 입을 쩍 벌렸다.
“허, 저 노괴를 이리 쉽게 이기다니. 정말 은공의 무위가 대단하시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되는 실력이니 공공연하게 무림맹주를 죽이네 마네 하겠지.
*치지지직.
왕일은 꼬치구이가 타지 않게 뒤집기를 반복했다. 대나무꼬치에 닭고기와 야채들이 얼기설기 끼운 꼬치다.
‘대단한 고수야.’
듣기로 문씨세가 가주도 이겼다는데,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아까 낮에 봤던 빙궁의 고수는 정말 엄청났으니까.
“아직 멀었냐?”
“다 됐어요!”
왕일이 서둘러 꼬치를 굽고는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 가져갔다.
대청마루에 앉아 내공수련 중이던 건우가 냄새에 이끌리듯 깨어났는데, 정작 음식을 재촉하던 수호는 마당에 선 채 검을 들고 내려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슈아악, 팟!
매끄럽게 움직인 검이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춰선다. 허공에 실이라도 매단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속도로 떨어져 같은 자리에 멈춰섰다.
“삼촌, 드세요.”
“어, 먼저 먹어. 서른한 번 남았어.”
슈아아 팟!
수호의 내려치기가 반복되는데,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린 당진철이 닭꼬치 하나를 베어물곤 박수쳤다.
“내 수많은 직도황룡을 보았지만 대협이 펼치는 것처럼 완벽한 직도황룡은 처음이오.”
“이건 그냥 내려치기야.”
“그게 직도황룡이잖소.”
“달라.”
당진철이 어깨를 으쓱하곤 닭꼬치를 베어물었다.
수호는 처음 마음먹은 횟수를 채우곤 검을 갈무리했다.
“오랜만에 하니 새롭네.”
이건 직도황룡이니 삼재검법이니 하는 게 아니다. 목검을 들고 수천, 수만 반복한 내려치기다.
물론 목검보다 목창이 더 위력적이라 내려치기보다는 찌르기가 더 숙련도가 높다.
어쨌든 수만 번 반복한 한 동작이 이곳에선 검술의 한 토막 초식이다.
까앙, 깡!
하루 온종일 잠들었던 장순필이 해가질 무렵 일어나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운철을 녹이고 비도를 정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것도 사흘이면 끝나겠지?”
“그렇소.”
비도가 12자루나 되다 보니 한 벌을 만드는 데 3일을 잡아야 했다. 당진철의 것 하나, 건우의 것 하나.
수호는 닭꼬치를 한 입 물고는 말했다.
“너 무공 가르치고 나면 뭐 할 거냐?”
애초에 약속은 그것이 전부다.
감옥에 갇힌 그를 구출한 대가로, 조카에게 진산절기를 가르쳐 주기로 한 것.
거래라고 불러도 좋을 약속은 그것이 전부다.
“은공의 복수를 돕겠소.”
“응? 굳이 안 그래도 돼. 네 싸움이 아니니까.”
“아니오. 이것은 내 싸움이기도 하오.”
멸문한 사천당가를 재건하는 것이 그의 필생의 숙명이다.
그러나 그것엔 앞서 이뤄야 할 일이 하나있다.
“내 가문을 멸문시킨 원흉. 그들을 단죄할 것이오. 재건은 그 뒤요.”
“그래서?”
“대협의 복수와 나의 복수가 다르지 않소.”
“응? 남궁세가가 그랬어?”
“전대 무림맹주, 모용적산. 그가 살아있는 한 이 중원 땅 어디에도 사천당가가 설 자리는 없소.”
변두리 어디 귀퉁이에 사천당가 현액이라도 걸어봐라. 당장 무림맹의 무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뭐야? 다르네.”
“어찌 다르오? 원흉은 모용가이나, 무림맹 전부가 내 원수나 다름없소.”
“이야, 엮는 거 봐. 난 남궁가만 지우면 돼.”
당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공연히 무림맹주를 죽이겠노라 떠들었는데, 그 말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소?”
“그게 뭔 상관이야.”
대비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까.
수호의 자신만만함에 당진철은 히죽 웃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나서 이토록 설레게 하는가.
“이미 당신은 무림공적이나 다름없소.”
“그게 뭐야?”
“무림맹 소속 무사들 전원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 눈이 벌게져 찾아올 거요.”
수호는 씩 웃었다.
“비급 좀 줍겠군.”
무림인들은 죄다 호승심도 강한데,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 믿는지 가장 안전해야 할 비급을 자신의 품에 지니고 다닌다.
그때 대문 너머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례한 지구인은 나와서 내 도끼를 받으라!”
수호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벌써 하나 왔네.”
“저치는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 문씨세가에서 구원을 청한 고수일 것이오.”
“요것들, 약속해 놓고 비겁한 데가 있네.”
수호는 검을 챙겨 나섰다.
목검만 다뤘지, 쇠검은 처음이다.
아니, 운철검인가?
“갔다 올게.”
검술 훈련 정도를 받아낼 실력이면 아량을 베풀 것이고, 아니면 죽을 것이다.
먹지 않아도 슬슬 사냥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