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22)
123화 혈마 박수호 (2)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멋진 곳이다.
오래된 명문대파인 해무파 영역의 마을.
“여긴 정말 멋지네.”
“맞아요. 삼촌.”
수호와 건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순필이 덧붙였다.
“연오지라는 호숫가에 이것보다 더 큰 벚나무들이 숲을 이뤘는데, 거기도 꽤 운치가 있지요.”
“이야, 거긴 어디야?”
시대의 명장이라는 천검야장이 된 그이지만, 실상은 남궁가에 잡힌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여행을 가 봐야 얼마나 멀리 가 보았겠는가.
“남궁가 영역에 있습니다.”
“좋아. 복수도 하고 거기서 한잔 마시고 돌아가자고.”
정말 대수롭지 않은 소풍 계획이라도 짜는 듯한 그 모습에 장순필은 웃었다.
“예, 그럽지요.”
대단한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복수를 도울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문씨세가를 떠나 온 지 열흘.
이미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어?”
일단의 무리들이 마을 입구에 쭉 진을 치고 서 있었다. 그 수가 제법 많아, 얼추 봐도 500명은 넘어 보였다.
히이이잉.
왕일은 이제 익숙한지, 평소였다면 기가 질릴 광경을 보고도 그냥 말을 멈춰 세우고 뒤의 마차에 보고했다.
“해무파에서 막아서고 있습니다.”
“그래? 여긴 뭐가 유명해?”
구천 행성에서 나고 자랐다곤 하나, 무사들과 양인들의 삶이 어디 같겠는가. 왕일은 아는 바가 없어 입을 다물었고, 가장 강호 소식에 밝은 당진철이 대꾸했다.
“해무파 개파조사의 절기인 해무십삼장은 무림절기지요.”
“음, 장법은 많은데.”
수호는 그간 전리품으로 얻은 수많은 무공비급 리스트를 뒤적이며 관심 밖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네가 처리해.”
“……저 많은 수를 내가 어찌 감당하오? 대협께서 나서 주시오.”
길 가다가 고수 한둘 만난 것도 아니고, 해무파 무사들은 물론 인근 문파의 고수들이 모조리 나와 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을 홀로 상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당진철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저, 저 선배는 화산제일검!”
유독 아우라가 느껴지는 무사가 있어 자세히 살피던 당진철이 침음성을 삼켰다.
초절정 고수까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협, 나와 보셔야겠소.”
“어유, 애들 많다고 쫄았냐?”
“단순히 많기만 한 게 아니오. 아니! 저 사람은 개방 고수!”
누군지는 모른다. 거적때기 걸친 노인네 허리에 구결매듭이 있어 구결제자임을 알 뿐이다.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
그뿐 아니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이 꽤 많이 보이니, 당진철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큰일 났소. 내 이런 상황을 예견해 길을 잡을 때 조심하자 한 것인데.”
조심하기는커녕 무림맹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 덤벼드는 고수들을 족족 잡으며 왔다.
대놓고 행적을 드러내고 있으니, 아직 갈 길이 반이나 남았는데 정예고수들이 길을 막아섰다.
무리의 규모가 저 정도인 데다 그 구성원들이 여러 문파들의 조합인 것을 보면, 필시 무림맹의 지령을 받고 모였다고 봐야 했다.
“이야, 많이도 모였네.”
수호는 휘이 둘러보다가 그들의 얼굴 옆에 뜨는 레벨들을 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다, S등급이네. SS도 수십은 되고, SSS도 네 명이나 되네.”
“헉, 초절정고수가 넷이나 된단 말이오?”
절정고수 수십에, 나머지 인원들 전원이 일류고수다. 이 정도면 후방에 주둔하는 무림맹 소속 정예들이 모조리 모였다고 해도 좋을 규모.
“거봐, 내가 뭐랬어? 잡을 놈만 딱 잡으면서 오니까 이렇게 알아서 모여 주잖아?”
“…….”
걱정은커녕 오히려 기꺼워하는 수호의 모습을 보며 당진철이 신음을 삼켰다.
‘허세가 아니다.’
이 사람은 정말 혈혈단신으로 강호 전체를 상대하려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어디 좋은 경신법 하나 뜨면 좋겠는데.”
수호가 앞으로 나서는 걸 보고 당진철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니 만만히 볼 일이 아닙니다.”
“거들게?”
“셋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당진철과 같은 경지의 일류고수가 저쪽에 오백 명 정도가 있다.
수호는 피식 웃었다.
“됐다. 마침 초식도 익숙해지는데 한번 써봐야지.”
“삼재검법으로……. 아니, 되었소. 대협 정도의 외공이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 듯하오.”
당진철의 견문 안에서 수호보다 빠르고, 힘세고, 단단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게 검이 아닌 몽둥이라 해도 결과는 비슷하리라.
“내공도 늘었어.”
“기대해 보겠소.”
무혈지체다. 단전도 없는 사람이 내공이 늘어 봐야 그저 기공체조한 일반인 정도일거다.
“전혀 기대하는 말투가 아닌데?”
“아니오. 기대 중이오.”
수호가 한 발 앞서 나가며 허리춤의 곡성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요즘 베기를 한창 연구 중인데 말이야.”
“횡소천군 말이오?”
“그래. 그게 천 명을 벤다는 뜻이라지?”
“그저 비유일 뿐이오.”
“해보면 알겠지.”
수호는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증명의 비석을 만지며 내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단전은 없지만 몸 여기저기 넓게 쌓인 내력.
그리고 물을 만지듯 수호에겐 자연스러운 자연의 기운.
익힌 건 삼재심법과 삼재검법뿐이지만, 초식을 반복하다 보니 간질간질한 느낌이 있었다.
‘될 것 같단 말이지?’
그저 머릿속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심상에만 머무르는 천외천의 무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수호는 요 며칠 많은 고수들을 상대하며, 또 그들의 비급을 모으며 삼재검법의 운용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연구해봤다.
짧은 검 한 자루를 찬 수호가 마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나가자 상대 진영의 무리들이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그 하나하나의 구성원들이 최하 일류고수인지라, 이들이 기세를 피우자 흉흉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주변으로 번졌다.
수호의 발걸음에 맞춰 앞으로 네 명의 사람이 나섰다.
모두 초절정고수들로, 지구로 가면 당장 SSS급 등급을 받을 80레벨 각성자들.
아니, 무림인이라 불러야 하나?
“당신이 박수호요?”
수염을 길게 기른 도사 차림의 늙은이였는데, 성량이 대단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맞아.”
“지구에서 왔다고 들었소.”
“그것도 맞지.”
“어째서 이런 혈겁을 일으킨단 말이오?”
“혈겁? 난 그냥 부하의 원한을 대신 갚으러 온 것뿐이야.”
“으음.”
이미 소식을 전부 듣고 모인 그들이다.
후방에 있는 고수들이 총 출동해 해무파의 영역에 진을 쳤다.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지령은 둘.
지구에서 온 마인을 척결하라.
천검야장을 생포해 오라.
도사의 옆에 있던 거지 차림의 늙은이가 나섰다.
“예부터 도사 나부랭이들은 검보다 설교를 더 좋아하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네.”
“거지가 끼어들 데가 아니오.”
“쯔쯧, 어차피 말해 뭣하나? 죽여 목만 가져가면 될 일.”
협상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천검야장을 인질로 쓸 리도 만무하니, 애먼 싸움에 그가 죽거나 자결하는 것만 막으면 된다.
“이미 사방을 포위했을 테니 그만 시간 끌고 가세나.”
개방 구결제자인 방개의 말대로다.
전방에 500인의 정예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단단히 벽을 쌓고 있는 데다, 주변으론 이류고수들 수천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
놈들의 행로가 너무 예측하기 쉬워 계략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길목에 통발을 놓고 물고기가 오기만을 기다린 꼴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호는 귀를 후볐다.
“뭘 그리 쫑알쫑알거리냐?”
그에 방개가 대꾸했다.
“껄껄, 니 기개는 가상하다만, 오늘 여기서 죽게 되었으니 어이할꼬.”
“죽는 건 너지.”
“끌끌, 어린놈이 말본새가 아주 거지 발바닥보다 더럽구나. 네놈은 내가 개 패듯 다져놓은 다음 친히 예의를 가르쳐준 후에 목을 베리라.”
방개의 말에 수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개가 들으면 기분 나쁜 말만 하네.”
백구를 모욕하다니.
친구로서 용서할 수 없다.
“500명이 모자라지만, 별수 없군.”
수호는 쭉 일렬로 늘어선 500명의 무림맹 고수들을 보며 허리를 굽혔다.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츠츠츠츠.
몸 안의 내력이 들불처럼 일어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주변의 기운이 장작처럼 타오르며 기세를 더했다.
“저, 저놈이…….”
어정쩡하게 자세로 검을 뽑으려는 수호를 보며 무림맹 무사들 몇이 긴장했다.
얼굴이 굳은 이들은 넷.
‘예사 경지가 아니다.’
‘화경의 고수인가?’
초절정무사들은 분명히 보인다.
요동치는 대기와 주변의 기운들이.
모든 기운들이 저 지구인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모르지만, 더 시간을 줘서 좋을 것이 없다.
“개진!”
완전한 포위섬멸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파팟!
500명의 고수들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앞으로 치고 달렸다.
하나하나가 일류고수, 거기에 절정의 고수들도 끼어있어 기세가 대단했다.
오백의 고수들이 달려드는데 수호는 태연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불나방들 같구나.’
저리도 죽자 살자 뛰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고오오오.
수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횡으로 베었다.
샥!
종이라도 썬 듯한 아주 간결한 소리다.
기세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소리.
하지만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호수에 던진 돌이 파동을 일으키듯, 수호의 베기가 넓게 기파를 뿌렸다.
두두두두.
오백의 고수들이 달려들던 관성에 못 이겨 그대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팔이 잘렸고, 누군가는 목이 잘렸다. 아예 허리가 절단난 자들도 있었고, 드물지만 보이지 않는 그 참격을 막아낸 자들도 있었다.
까아아앙!
파아아앙!
겨우 검을 틀어막은 초절정고수들이 안색을 굳혔다.
‘화경 그 이상!’
검기상인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야 많다. 헌데 이렇게 넓게,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모조리 검격에 넣을 정도의 괴물이 있었던가?
이건 현 무림맹주라도 해내지 못한다.
“크아아아!”
“으어!”
지금 바닥을 구르며 사지 하나 잘려 비명을 지르는 일류고수들은 운이 좋은 자들이다.
대부분의 일류들이 모조리 참격 한 번에 도륙당해 고혼이 되어버렸다.
겨우 막은 이들은 초절정 고수 넷과 절정고수 아홉이 전부.
우습게도, 절정고수 중에도 단번에 절명한 이가 있었다.
“…….”
눈이 마주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더 거리를 주면 위험하다.
큰 기술과 동작은 언제나 빈틈과 허점을 동반한다. 지금이 그 기회.
퍼억!
방개의 죽봉을 손으로 잡아버린 수호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수호의 의식은 길들인 야수들과 일정부분 이어져 있었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내 개가 들었어.”
“무슨 개 같은 소리냐!”
“이제부터 개한테 맞을 거란 소리지.”
“……?”
이건 무슨 개 같은 소리지?
방개가 인상을 쓰며 죽봉을 빼려 했다.
하지만 죽봉을 잡은 수호의 손에 털이 돋아나더니, 길어진 발톱이 죽봉을 으깨버렸다.
심지로 심어 놓은 쇠까지 구부리며 뭉개버린 후에 방개의 목줄을 쥐었다.
“……!”
방개는 팔십 평생 이렇게 놀란 적이 있을까 싶었다. 그간 그의 몽둥이에 다져진 개가 수백 마리는 될 테고, 뜯어먹은 개고기는 수천이 넘을 터다.
백구도 그걸 느꼈을까?
“네놈을 씹어 먹어버리고 싶군.”
오랜만에 백구와 변신했다.
그간 백구가 레벨이 많이 높아졌지만, 처음으로 길들인 녀석이고 친밀도가 높아 변신 부작용이 가장 덜한 녀석이다.
변신해도 백구의 자아는 아주 일부만을 점유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으르르.”
방개를 보니 치솟는 살심을 억누를 수가 없다.
콰직!
날카로운 이빨이 방개의 어깨를 물고 뜯어버렸다.
“크아악!”
거지로 살아온 팔십 년.
개방 구결제자 방개가 개한테 물어 뜯겨 최후를 맞이했다.
“왈, 와르르! 컹!”
포효한 반인반수가 화산제일검을 다음 타깃으로 잡고 발톱을 휘둘렀다.